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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리포트 - 인생 제2막을 위한 융 심리상담
대릴 샤프 지음, 정여울 옮김 / CRETA(크레타) / 2026년 2월
평점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캐나다 출신의 융 심리학 권위자 대릴 샤프가 '소설'로 읽는 융 심리학 개론서를 펴냈다. 이 책 《서바이벌 리포트》(2026, 크레타)는 중년의 위기를 심하게 겪고 있는 가상의 내담자 '노먼'과 융 심리학 분석가 '나'를 등장시켜, 이들의 대화를 통해 분석심리학의 기본 개념과 원리를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덕분에 카를 융의 분석심리학 기법이 부부 문제, 우울증, 번아웃을 비롯한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지 파악할 수 있다. 가령 상담 과정에 '꿈 분석'과 그림 그리기, 글쓰기(일기 쓰기) 같은 '적극적 명상' 기법이 어찌 활용되는지 잘 보여준다. 책의 부제는 '인생 제2막을 위한 융 심리상담'이다. 참고로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번역이기에 더욱 호감이 간다.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삼십대 후반의 노먼은 다국적 기업의 영업 관리자로, 현재 아내 낸시와 냉전 중이다. 자녀는 다섯 살 이안과 네 살 제니퍼가 있다. 노먼은 스스로를 헌신적인 가장으로 포장하지만, 말만 그렇지 바깥에선 바람을 피우느라 바쁘다. 아내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즈니스 출장 중에 일탈의 모험을 즐기는 편이다. 기분이 꿀꿀해지면 자택 지하실에 내려가 홀로 대마초를 피우곤 한다. '제2의 사춘기'를 겪고 있다고 할까. 노먼은 안에서 철저히 무너졌다. "중년의 위기와 관련된 모든 증상이 보인다. 불안, 우울, 자기 연민과 죄책감. 그는 먹지도, 자지도 못한다. 그는 매사에 기운이 없고 깊은 혼란에 빠져 있다."
낸시는 노먼과 2년 전부터 섹스리스 부부처럼 지낸다. 남편과의 잠자리에 흥미를 잃은 것이다. 하지만 낸시에게는 상간남이 있으며, 남편은 이 사실을 모른다고 믿는다. 낸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오직 노먼의 이야기를 통해서 재현될 뿐인데 심리치료에선 오히려 이런 재현 자체가 중요하다. 한편, 분석가 '나'는 15년 경력의 융 심리학 전문가인데, 자기 경험에 비추어 남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에 꽤나 회의적인 편이다.
융은 인간의 인격 요소를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며, 무의식으로 가는 왕도가 '콤플렉스'라고 보았다. 꿈이나 병리적 징후 뒤에 콤플렉스가 있다는 얘기다. 무의식의 콤플렉스가 내 기억, 사고, 기분,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콤플렉스에 압도되거나 끌려다니는 상태가 바로 신경증이다. 우리는 의식적인 선택에 따라 행동할 때도 있지만, 무의식의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행동을 할 때도 있다. 연애나 결혼도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매우 닮았거나 정반대인 여성에게 끌린다. 노먼도 예외는 아니다.
콤플렉스에는 원형적 뿌리가 있다. 누구나 무의식에 아버지 콤플렉스나 어머니 콤플렉스가 있다. 가령 어머니 원형의 경우, 크게 긍정적인 어머니상과 부정적인 어머니상으로 구성된다. 긍정적인 어머니상이란 양육과 안전을 제공해 주는 보편적 어머니의 이미지를 말하고, 부정적인 어머니상이란 아이를 집어삼키는 소유욕의 어머니를 말한다. 노먼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어머니 콤플렉스와 깊은 관련이 있다.
융에 따르면 누구나 세 개의 얼굴(정체성)이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이자 남에게 보이는 얼굴인 '페르소나', 나 자신도 잘 모르는 어둠의 얼굴인 '그림자',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이성적 얼굴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다. 페르소나는 '본캐'가 아니라 사회적 가면이다. 가령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도 홀로 있지만 사회적 페르소나는 가지고 있다. 표류자가 아닌 '섬의 영주'로서 말이다.
노먼의 핵심 갈등은 페르소나와 그림자 사이의 갈등이다. 노먼의 페르소나는 '가정적인 남자'인데, 그림자는 도처에 정을 뿌리는 난봉꾼 '돈 주앙'이다. 한편, 노먼의 아니마는 분열된 상태다. 융에 따르면, 남성의 심리적 발달 과정에서 아니마는 이브, 헬레네, 마리아, 소피아 네 가지 단계를 거쳐 발달한다. 그런데 노먼의 아니마는 현재 이브와 헬레네 사이에 갇혀 있다. 아내 낸시를 볼 때 이브를 보고 다른 여성들에게 끌릴 때는 헬레네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