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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 2024 스웨덴 올해의 도서상 수상작
리사 리드센 지음, 손화수 옮김 / 북파머스 / 2024년 12월
평점 :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삶이 인연의 매듭을 풀어가는 여정이라면, 임종을 앞둔 삶의 마지막 순간은 가장 진한 인연의 매듭을 풀어내는 마지막 기회다. 스웨덴 최북단의 꼬장꼬장한 어르신 보는 끝내 성공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이런 유언을 남길 수 있었으니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난 네가 자랑스럽단다." 제법 근사한 마지막 작별이다. 나도 유언으로 사랑과 축복의 말을 남기고 떠나고 싶다. 내 인생을 돌아보는 총평이나 두려움의 토로보다도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을 주는 말을 마지막 작별의 인사로 대신하고 싶다.
보는 외동아들 한스와의 관계가 늘상 어렵고 서먹했다. 가끔 다투기도 하고 갈등도 겪긴 했지만, 늘 행복을 염원하고 사랑을 퍼주고 싶었던 대상이 아들이었다. 다만 표현 방식이 꽤나 서툴었을 뿐이다. 사민당이 아닌 온건당을 지지하는 아들, 반려견 식스텐을 딴 데 보내려는 아들, 난로 장작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아들, 며느리와 이혼한 아들, 임플란트를 권하는 아들이 못마땅했다.
여기에는 보의 트라우마도 한몫했다. 정작 보 자신이 '노인'이라고 부르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무척 험악하고 냉랭했다. 둘의 틀어진 관계는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노인이 건넨 마지막 화해의 제스처를 보가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보에게 상처가 되었고 내면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하지만 보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사랑을 확인했다. 밀린 방학숙제를 다 끝낸 아이처럼 보는 일말의 여한도 없었다. 한스 역시 분명 그러했다. 훗날 한스가 자기 딸 엘리노르에게는 어떤 유언을 건넬지 궁금해진다.
90세를 앞둔 보는 심장과 관절 모두 안 좋은데, 의사의 권유대로 심장약을 먹으면서 류머티즘약은 끊었다. 현재 재택 요양 서비스를 받고 있다. 여러 명의 요양보호사가 돌아가며 보를 보살핀다. 잉리드, 요한나, 칼레 등이 청소와 식사, 목욕 등을 맡아가며 보를 보살피고 있고, 보 역시 이들과 잘 지내는 편이다. 허나 꼰대답게 지역 차별이 없진 않다. 프뢰쇤 출신의 젊은 요양보호사를 대놓고 험담한다. 스웨덴의 지역 차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보의 이런 뉘앙스가 다소 생경했다.
하지만 보는 성소수자 차별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보의 직장 동료이자 오랜 친구 투레가 바로 동성애자다. 아내가 오래 전부터 보와 투레의 우정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투레와의 우정을 굳건히 지켰다. 보의 하루 일과 중에, 식스텐과의 산책과 투레와의 전화 통화가 그나마 낙이다. 투레는 보보다 먼저 요양보호사가 보살펴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삼년 전 사랑하는 아내 프레드리카가 브룽쿨라고르덴 요양원으로 떠났다. 치매가 급격히 심해졌기 때문이다. 보는 프레드리카를 사랑하지만 자기가 보살필 여력이 없음을 인정했다. 치매는 인간의 기억을 말소해 온전한 정체성을 앗아가는 무서운 병이다. 아내는 남편과 아들을 잊었지만, 보는 아내의 체취를 기억하기 위해 아내의 스카프를 항아리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