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고전을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세상이 좀 더 나아진다고 믿는다. 나는 충직한 고전 애호가다. 고전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독서인은 누구나 내 동지다. 베스트셀러 작가 고명환도 고전을 사랑하는 독서인이다. "사람에게 묻지 말고 고전에 물어라"면서 고전이 읽을수록 좋은 이유를 들려준다.
고전은 은유와 상징, 비유와 압축의 보고이기에 읽는 이가 구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구할 수 있게끔 인도하는 힘이 있다. 진정한 교육의 시작이 고전에 있다. 그런데 고전은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 독자가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고전은 모양이 없다. 나는 모양이 있다. 내가 고전을 읽으면 고전이 내 모양으로 바뀐다. 그 고전은 세상과 싸울 어떤 무기보다 단단한 갑옷이 된다.
모양 없는 고전을 내 모양의 갑옷으로 만들어 겹겹이 입어야 한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특히 요즘처럼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는 순간순간 내 약점이 노출된다. 수천 년의 지혜가 녹아 있는 고전이 아니고서야 내 약점을 막아줄 존재는 없다. 그러니 사람에게 묻지 말고 고전에 물어라. 이미 모든 고난과 역경을 겪어온 경험이 농축된 고전에 답을 구하라."(7쪽)
고전에 길이 있다. 그 길은 느리지만 정확하다. 그리고 그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다. 고전의 해석은 열려 있다. 닫힌 해석은 이내 썩어버리고 만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맞게끔 창조적으로 해석을 변용해야 한다.
혹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어 보았는가. 하룻밤 사이에 흉측한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 잠자의 기괴한 비극 말이다. 그때의 감상을 기억하는가. 정확하진 않지만 나는 부조리, 당혹, 불안, 공포, 모멸감 같은 감정이 이리저리 뒤엉킨 기억이 난다. 그럼, 저자는 어떤 감상을 가졌을까.
우리말 쌍욕의 대명사가 '개'와 '벌레'다. '개새끼'나 '기생충'이 대표적이다. 우리는 동물적 본능이나 원초적 욕망에 노골적인 놈들을 이렇게 부른다. 그런데 저자는 카프카의 『변신』을 다 읽고 난 후 이런 각성을 한다. "한낱 벌레일지라도 자기 의지대로 산다면 그렇게 살지 않는 인간보다 낫다." 와우, 벌레가 된 그레고르에게서 건강한 용기와 의지를 읽어냈다. 얼핏 '오독'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허를 찌르는 독특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자기 의지'는 분명 이기적인 본능이나 욕망은 아닐 것이다. 그건 분명 '소명'이나 '자립'과도 같은 '직관'이다. 저자는 쇼펜하우어의 '직관'과 '개념'을 대조하면서 직관의 의미를 크게 강조한다. 개념이 다른 사람들이 정리해놓은 생각이라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관찰하는 것이 직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