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색환시행
온다 리쿠 지음, 이정민 옮김 / 시공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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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탤지어는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눈시울이 젖거나 왈칵 눈물이 터져나오게 할 만한 그리운 것을 보게 만든다. 잊었는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없어진 줄 알았는데, 그런 줄도 몰랐는데, 여전히 거기 그 모습 그대로 나의 돌아봄을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훈훈한 감동과 전율이 온몸에 전해진다. 일본 작가 온다 리쿠는 바로 그런 기묘한 신통력이 있는 재담꾼이다. 그래서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라고 불린다. 재담꾼에게 노스탤지어의 매개체는 실로 다양하다. 소설, 영화, 음악, 상표, 요리, 냄새, 풍경, 신문기사, 소문, 도시 전설, 움직임 등 모든 소소한 것들이 노스탤지어의 매개체가 된다. 그리고 저주 받은 작품도 그러하다.

《밤이 끝나는 곳》이란 소설은 영화계와 방송계에서 '저주 받은 작품'이라 불린다. 영화든 드라마든 제작 때마다 불미한 사태로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영화 제작 때는 세트장 화재로 여섯 명이 죽었다. 배우 네 명에 스태프 두 명이다. 두 번째 영화 제작 때는 남녀 배우 두 명이 죽었다. 게다가 영화 제작을 앞두고 각본가가 자살했다. 노트에 '필연성'이란 포스트잇만을 남긴 채 말이다.

한편, 원작 소설의 저자는 '베일에 싸인 이단의 작가' 메시아이 아즈사다. 사생활이 베일에 싸인 인물로 행방이 묘연하다. 종적이 끈긴 지 7년이 지났기에 공식적으론 사망한 것으로 간주된다. 바닷가 산책 중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실종됐다는 풍문도 돌고, 자택에서 화재를 당해 죽었다는 소문도 있다. 작가의 정체나 성정체성에 대한 추측이 난무한다. 작가가 두 명이라든가, 실은 여장남자라든가 하는.

원작 소설은 세 명의 엄마를 둔 아이의 이야기다. 그 세 명은 엄마이면서 엄마가 아니다. 낳아준 엄마 가즈에는 정신이 온전치 않아 의사소통이 불가하다. 키워준 엄마 사야코는 어딘가 비뚤어져 있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호적상의 엄마 후미코는 체면치레를 하기 위한 행동 밖에 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들과 '나'의 생활권은 홍등가, '추월장'이라는 유곽이다.

변호사 마사하루와 소설가 후키야 고즈에는 재혼 부부다. 마사하루는 상처했고 고즈에는 딴 살림을 차린 남편과 이혼했다. 마사하루의 전처가 바로 각본을 쓰고 자살한 사사쿠라 이즈미다. 부부는 마치 미스테리를 푸는 탐정이나 수사관처럼 2주간의 크루즈 여행을 이용해 《밤이 끝나는 곳》에 얽힌 저주를 밝히려고 한다. 유람선의 중앙홀이 연극 무대라면, 암회색의 어둑어둑한 바다는 무대 배경이다. 배의 승객들은 무대에 오른 연기자가 된다. 마사하루는 '여행이란 조금 죽는 것이다' 라는 프랑스 속담을 꺼낸다. 크루즈 여행의 검은 바다를 상징하는 둔색(鈍色)이 바로 그런 죽음의 색이다.

고즈에는 작가 메시아이 아즈사의 삶과 작품을 둘러싼 저주의 진실을 뒤쫓는다. 크루즈 여행에는 소설과 관계된 영화감독 쓰노가에, 영화 프로듀서 신도, 편집자 시마자키, 콤비 만화가 마나베 자매, 평론가 다케이 등이 초대된다. 고즈에는 이들을 인터뷰하면서 저주 받은 소설에 얽힌 새로운 이야기들을 수집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독자 눈 앞에 펼쳐진 《둔색환시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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