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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ㅣ 북극곰 그래픽노블 시리즈 11
엘리자 수아 뒤사팽 지음, 엘렌 베클랭 그림, 문현임 옮김 / 북극곰 / 2024년 6월
평점 :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단어를 하나 꼽자면 바로 '힐링'이다. 힐링하려면 멈춤과 휴식과 사랑이 필요하다. 아픔을 멈춰야 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푹 쉬어야 하며, 새로운 사랑의 대상이 요구된다. 특히 상실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청소년이라면 더더욱 힐링의 시간이 절실해진다. 한국어에 '새'가 붙으면 욕처럼 들리는 경우가 있다. 새끼, 시방새, 검새 등이 대표적이다. 하늘을 자유로이 노니는 조류에게 벌써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는 '자유로운 영혼'의 또다른 이름이다. 적어도 곧 열네 살이 되는 셀레스틴에게 '벌새'는 사랑하는 이가 남겨준 소중한 선물이었다.
셀레스틴이 껌딱지처럼 따르던 다섯 살 연상의 형 셀렌이 죽었다. 그 후, 셀레스틴은 바닷가의 소라 껍데기를 모으고, 간혹 하늘의 새들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곤 한다. 몇 년 뒤, 셀레스틴과 부모는 살던 바닷가를 떠나 도시로 이사를 간다. 거기서 셀레스틴은 옆집 소녀 로뜨를 만나게 된다. 로뜨는 부모와 떨어져 혼자 살고 있는데, 빵 만들기를 좋아하고 오페라 가수가 되고픈 소녀다.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셀레스틴은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로뜨에게 호감을 느낀다. 셀레스틴은 로뜨에게 셀린 형을 '하늘 탐험가'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하늘 탐험가'는 동생에게 잠이 든 벌새를 주고 간다.
“벌새는 특별한 새야. 관절이 유연해서 제자리 비행은 물론 뒤로도 날 수 있어. 날갯짓을 1초에 200번까지 할 수 있지. 심장이 아주 빠르게 뛰어서 몸이 엄청 뜨거워. 근데 일단 잠이 들면 모든 기능이 다 멈추지. 심장 박동이 느려지면서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워지거든.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위험에 처해도 알 수가 없어. 스스로를 보호할 수조차 없지.”(51쪽)
얼마 후, 잠자던 벌새가 깨어나 다시 날아간다. 힐링의 시간이 끝난 것이다. 벌새는 기실 애도의 변신물이다. 벌새가 잠을 자는 동안이 바로 깊은 애도의 기간이며, 깊은 잠을 깨고 씩씩한 날개짓을 하는 순간, 산자의 애도는 잘 마무리되고, 망자는 진정한 구원을 받게 된다.
로뜨도 나름 힐링의 시간이 필요했다. 부모의 이혼과 애착의 결여는 지우기 힘든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곧 뉴질랜드의 엄마 집으로 이사가야만 한다. 안 그러면 보호시설에 가게 되기 때문이다. 여름의 마지막 날인 9월 22일에 말이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셀레스틴의 생일이기도 하다. 로뜨는 솔직히 뉴질랜드에 가고 싶지 않다. 로뜨의 뒷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아 정말 궁금하다. 옆집 소녀 로뜨가 셀레스틴과 한가족이 되는 해피엔딩을 몰래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