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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수놓다 - 제9회 가와이 하야오 이야기상 수상
데라치 하루나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4년 5월
평점 :
데라치 하루나의 소설 《물을 수놓다》를 두 번 읽었다. 다 읽고 나서 내 머리에 떠오른 커다란 글자 하나가 있다. 바로 '벽'이다. 나는 이 소설이 '두 개의 벽'을 이야기한다고 본다. 취미로서의 벽(癖)과 장애물로서의 벽(壁)이다.
먼저 취미로서의 벽을 말해보자. 수집벽, 방랑벽, 정리벽, 전원벽 할 때의 벽이다. 벽은 평범하지 않고 매우 오래되고 아주 지독한 습관과 같다. 벽은 오늘날의 덕후 기질이나 오타쿠 근성과 통한다. 취미가 없는 인간은 좀비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사축'이란 말이 있다. '회사가축'의 준말인데, 취미가 없는 일벌레 직장인이 사축이라면, 취미가 없는 공부벌레 학생은 '교축'이 아닐까 싶다. '학교가축' 말이다.
소설엔 바느질을 좋아하는 소년 기요스미와 돌을 좋아하는 소녀 구루미가 나온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기요스미는 자수를 할 때가 가장 즐겁다. 바느질 취미 때문에 간혹 '여자 같은 남자'로 오해받기도 하고, 학교에서 왕따는 아니지만 은근히 겉돌게 되었다. 그런데 기요스미는 자신의 자수벽을 굳이 감추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요리나 재봉 기술을 굳이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과 연결짓는 황당한 선입견을 질타한다. 그리고 결혼을 앞둔 누나를 위해 웨딩드레스를 직접 지어주겠다고 나선다.
한편, 구루미는 주말마다 강가나 산으로 돌멩이를 주으러 다닌다. 주운 돌은 매끈매끈 반짝반짝해질 때까지 줄로 다듬는다. 물론 모든 돌을 다듬는 건 아니다. 돌마다의 개성과 뜻을 존중하기에, 다듬어지는 게 싫은 돌은 그 울퉁불퉁 거친 돌의 아름다움을 지켜준다. 방과 후 시간은 전부 돌을 연구하는 데 쓰고 있는 별난 석치가 바로 구루미다. 벽이 있는 두 고등학생이 무척 어른스럽게 그려져 있다. 기요스미도 나이답지 않게 열린 성품을 보이지만, 그런 기요스미조차 구루미를 보면 "사극에 나오는 수수께끼의 노인" 같이 멋지다고 했을 정도로 구루미는 정말 어른스럽다.
다음은 장애물로서의 벽이다. 벽은 뭔가 넘어서거나 부수거나 허물어야 할 것들이다. 예컨대 '평범함'과 '정상성'에 대한 상식이나 고정관념, 선입견일 수도 있고, 무지와 몰이해에 기반한 증오와 차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릴 때 겪은 부정적인 경험이나 학대로 인한 마음의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먼저 '정상 가족'에 대한 벽이 서 있다. 기요스기의 부모인 젠과 사쓰코는 기요스기가 한 살 무렵 이혼을 했다. 현실적인 생활력을 중시한 사쓰코가 평생 디자이너 꿈만 꾸고 있는 생활력 제로인 남편 젠을 일방적으로 내보낸 셈이다. 젠은 처가살이를 했고 금전감각이 매우 부족하다. 이혼하고 나서 젠은 전문대 시절 동급생인 구로다가 운영하는 회사에 다니게 된다. 구로다는 친구를 대신해 해마다 기요스기에게 생활비를 배달해주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캐릭터다.
누나 미오는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로 보습학원에서 사무직을 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치한에게 추행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치마가 커터 칼에 찢기고 말았고 뻔뻔한 추행범은 '귀엽네'라는 말을 남기고 달아났다. 그 때부터 미오는 치마를 입지 않았고 '여성스러운 것'을 거북해하고, 일부러 화려하거나 귀여운 것들을 멀리했다. 예비신랑인 곤노는 그런 미오의 성정을 잘 이해하고 수용해준다. 덕분에 미오는 "평범하게 취직해서 평범하게 결혼하고 평범한 가정을 이룬다"는, 결코 만만치 않은 루트를 걸어가는 중이다.
기요스미와는 달리, 미오는 헤어진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지냈다. 아버지의 든든한 보호가 매우 절실했던 그 때, 아버지가 곁에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손수 만든 결혼 드레스를 입게 되고, 구로다 씨로부터 아버지가 자녀 이름을 미오와 기요스미로 지어준 연유, 이른바 '이름의 유래'를 알게 되고서는 어릴 때부터 쌓아온 벽들을 허물게 된다. 남동생 기요스미에게 자수가 기실 사랑과 축원의 행위인 것처럼, 미오 역시 아버지가 만들어준 드레스에서 아버지의 진심어린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