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 쓰기의 감각
김미옥 지음 / 파람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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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작가와의 우정이나 등장인물과의 사랑을 연결하는 홍실이 되곤 한다.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서평집『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파람북, 2024)를 읽어보니, 소설의 첫 문장이 첫사랑과 같다는 대목이 나온다. 격하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어린 시절에 허먼 멜빌의 『모비딕』 첫 문장을 좋아했다고 고백한다.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다오." 이 말에 심장이 뛰었다고 한다. 어, 좀 생뚱맞네 싶다가도, 다시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문고판 '백경'을 읽었다면 말이다. 한때 좋아하는 계림문고 책 표지만 들여다봐도 가슴이 설렜던 적이 있었다. 또 그런 책만 테이프로 이어붙여 나만의 거대한 벽돌책으로 만든 적이 있어서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인데,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첫 구절도 설날 세뱃돈처럼 매혹적이다.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탐정소설의 미스터리 사건처럼, 혹은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의 에피소드처럼 상큼하게 다가온다. 나에게 뭔가를 처음 알려준 이들은 세월이 꽤 많이 지났어도 문득 가슴이 출렁거렸던 기억을 다시금 선사한다. 그렇지 않은가.

때론 소설의 첫 문장이 소설 전체의 주제나 분위기를 지배하는 열쇠일 수도 있다. 이성복 시인은 어느 시론에서 "첫머리에 나온 단어들은 시가 끝나도록 남아 있다"는 말을 했는데, 소설도 그러하다. 이야기의 첫 구절이 전체 소설의 분위기나 아우라를 압축하는, 뭐랄까 수미쌍관스러운 그런 효과를 보일 경우가 있다. 가령 저자가 언급한 안톤 체호프의 소설 「롯실드의 바이올린」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골보다도 못한 도시였다. 거의 노인들만 사는데도 죽는 경우가 드물어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알고보니, 소설의 주인공 늙은 야코프는 관을 짜는 일을 했다고 한다.

흠, 도서 인플루언서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름 열독가로 자부하는 편인데, 읽어보지 않았던 책들이 꽤 많이 등장했다. 저자는 연속으로 두 번 읽는 일이 상당히 드문 편이라는데, 최연호 교수의 『기억 안아주기』는 예외였다. "나쁜 기억에 관한 치유서"라고 하는데, '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은 대인공포증, 결정 장애, 불안과 공포 등을 야기할 수 있으며, 이런 나쁜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부딪치며 맞닥뜨리고 좋은 기억들로 덮는 것"이란다. '좋은 일은 시간이 걸리지만 나쁜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다'는 말이 떠오른다. 기억도 그러하다. 독서처럼 좋은 기억은 언제나 제법 시간이 걸리고, 접촉사고 같은 나쁜 기억은 번개처럼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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