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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70년 이야기
강인숙 지음 / 열림원 / 2024년 5월
평점 :
이어령 교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이다.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사람으로서 최고의 가치 기준으로 입덕, 입언, 입공 세 가지를 언급한 바 있다. 입덕은 덕행을 세우는 것이고, 입언은 책을 저술해 주장을 세우는 것이고, 입공은 사회를 위해 공업을 세우는 것이다. 한국 현대 지성사를 수놓은 학자들을 통틀어 보더라도, 입덕, 입언, 입공 모두 이룬 분은 이어령 선생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자세히 오래 보아야 넓고 깊게 알게 된다. '이어령 세계'의 사상적 원천을 널리 조망하고 깊게 이해하려면 그의 작품을 모두 읽은 '전작주의자'면서 오랫동안 선생의 삶과 사상을 자세히 들여다본 지인이라야 가능할 것이다. 해서, 『만남: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70년 이야기』(열림원, 2024)가 이어령 세계의 사상 지도를 그리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영인문학관 관장이자 문학평론가 강인숙 교수가 남편 이어령 선생의 삶과 사상에 관해 쓴 에세이집이기 때문이다.
이어령 선생의 베스트셀러 대표작은 정말 많지만, 나는 선생이 30대에 쓴 한국문화론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이어령 세계의 원형질을 가장 잘 보여준 대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어령 사상과 예술의 뿌리가 바로 '흙'과 '바람' 두 원형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국문과 동창이자 문학평론가 도반이자 부부로 이어령 선생과 70여년을 함께해온 강인숙 관장 역시 선생의 사상적 원형을 '이어령을 기른 흙과 바람'이란 문구로 말끔히 정리하고 있다.
'원형 흙'에 해당하는 선생의 특징이 어머니상, 충남 온양의 풍토와 향반문화(유교적 교양주의, 선비정신, 예의범절, 과잉 배려, 가훈 '석복'), 전통적인 토착어들(초협하다, 잔망스럽다, 귀살스럽다, 쌈지), 아날로그, (1년 내내 한식만 고집하는) '한식 쇼비니스트' 등이라면, '원형 바람'에 해당하는 특징이 네오필리아(새 것을 좋아하는 성향), 만족을 모르는 지식욕, 권위에 대한 담대한 도전, 불같은 성격, 의욕과잉, 막내기질, 다변증, 디지털, 바로크적 심미안(장식적인 예술, 비대칭의 선)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이 70대에 쓴 『디지로그』가 바로 흙 원형 아날로그와 바람 원형 디지털의 통섭과 융합의 산물이다. 세계적인 것과 토착적인 것을 합쳐서 '글로컬'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것도 한 예다. 결국 흙과 바람의 원형질은 한중일의 지정학적 특성과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일관된 관심으로 이어졌다. 가령 40대에 쓴 『축소지향의 일본인』(1982)은 선생이 8년 동안 밤낮으로 일본과 한국의 문명적 차이를 탐색한 놀라운 결과물이다.
선생의 어머니상은 '사모곡' 차원을 넘어 신격화 수준이다. 선생은 "어머니는 내 문학의 근원이었으며 외갓집은 그 문학의 순례지였다"고 밝힌 바 있다. 프랑스 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애도 일기』를 통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슬픔을 서사적으로 극복하려고 했다면, 선생은 어머니 원경자 여사에 대한 사랑을 문학적 원형의 대모신 차원으로 격상했다. 어머니는 선생에게 "언어와 문자를 계시해주신 뮤즈였다."
"…한국 문화의 좋은 모든 것은 다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 거기에는 전통이 있고, 신화가 있으며, 샤머니즘이 있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 어머니가 주시던 한식을 먹으면서 한국 문화의 기본항이 확고하게 그의 내면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어머니의 식탁은 그에게 있어 전통문화에 대한 사랑과 이해로 이어지는 통로였다."(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