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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거대한 서점, 진보초
박순주 지음 / 정은문고 / 2024년 3월
평점 :
간서치의 안식처는 서점이다. 서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아지고 새로 나온 신간을 볼 때마다 설레임이 살포시 깃든다. 외국 북튜버의 영상을 보면, 개인의 서재 구경과 더불어 동네서점의 정경을 보여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국내에서 사기 어려운 양장본 세계문학전집이 탐이 난다. 80년대엔 동네 문방구에서 문고본이나 무협지를 사던 때도 있었고, 90년대만 해도 홍대와 청계천이 서울의 고서점 거리로 꽤 유명했지만, 지금은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책마을도 없고, 교보문고나 예스 24, 알라딘 같은 대형서점 온라인 서비스가 워낙 좋아 애써 발품을 팔아 서점 거리를 순례하는 간서치도 매우 드물다. 그런데 이웃나라 일본은 출판강국답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책마을이 존재한다. 바로 진보초다. 진보초 고서점 거리에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서점이 수두룩하단다. 진보초 공식 사이트인 '북타운 진보'에 따르면, 고서점과 신간 서점을 합쳐 130개 이상이다. 이외에도 240여 개의 출판사, 그리고 잡지사와 인쇄소 등이 있다.
연극기획자이자 번역가인 박순주가 진보초에 위치한 고서점과 신간서점 등 18곳을 찾아가 서점의 개성과 매력을 전달한다. 책을 좋아하는 간서치라면 책방 주인이나 도서관 관장의 꿈을 한 번쯤 품어보았을 것이다. 그래서그런지 스즈란 거리에 있는 '셰어형 서점'인 '파사주 바이 올 리뷰스'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다. 서점, 출판사, 개인 등 서로 다른 주인이 책장을 빌려 마음대로 자신의 책방을 꾸밀 수가 있다니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문학 연구자이자 작가인 가시마 시게루 교수가 기획한 서점인데, 일반인은 물론 저명한 작가와 출판사 등이 선반주로 참여한다.
진보초는 메이지 시절 때부터 지식유통의 중심지였다. 진보초가 낯선 국내독자들은 이 책의 부록과 해설부터 읽어두면 좋다. 무가지 『오산보 진보초』의 편집장 이시가와 게이코는 부록글 '진보초 레트로 건축 산책'에서 도쿄대학 발상지에 세워진 학사회관, 공립강당, 일본 종이 전문점 야마가타야카미점 뒤편의 벽돌창고, 장어집 이마쇼, 진보초 제일의 고서점 잇세이도서점 등 메이지 초부터 현재까지 진보초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명 건축물들을 소개한다. 한편, 출판계 출신의 작가 이시바시 다케후미는 해설글 '큰 진보초, 작은 진보초'에서 진보초의 공적인 매력과 사적인 추억을 풀어놓는다. 작가의 미국인 지인이 진보초를 가리켜 동네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서점 같다는 말이 가슴에 크게 와닿았다.
"서점 한 곳 한 곳은 거대한 서가, 골목길은 서가에서 서가로 이동하는 통로, 책구경하다 지치면 커피 한 잔 마실 가게, 음식과 술이 맛있는 가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마을이지. 미국에도 세계 어디에도 없어." (353쪽)
부럽다. 어쩌면 홍대 거리가 진보초 같은 간서치가 그리는 꿈의 마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그럴러면 유서 깊은 고서점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한류로 유명한 연예인이 참여한 셰어형 서점의 방식도 매력적일 것이다. 아, 진보초엔 출판사 쿠온이 2015년에 문을 연 한국책 전문 북카페 '책거리'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