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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워크 - 가정과 자유 시간을 위한 투쟁의 역사
헬렌 헤스터.닉 서르닉 지음, 박다솜 옮김 / 소소의책 / 2024년 2월
평점 :
자본주의의 특징은 노동력의 상품화, 노동 시간의 상품화다. 노동 시간의 상품화는 계급, 성별, 학력에 따라 차별화되고 위계화된다. 똑같은 노동 시간을 투입해도 임금 수준에 커다란 격차를 보이게 된다. 한때 새로운 기술이 이런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시킬 것으로 내다본 순진한 이들이 있었다. 특히 매케한 굴뚝 자본주의와 경합을 벌이던 시절에, 사회주의 진영은 기술이 노동력을 증대하고 노동 시간을 단축시킬 것으로 내다봤다. 시쳇말로 '저녁이 있는 삶'이나 주4일 근무제 같은 비전이 그러하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가령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진공청소기 같은 기술은 가사노동의 편의를 증대시켰지만, 가사노동 시간을 줄이는 데는 실패했다. 이를 역사학자 루스 슈워츠 코완의 이름을 따서, '코완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어째서 노동을 절감시켜 주는 모든 장치에도 불구하고 가정 내에서 노동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편리한 가전제품들은 오히려 요리, 청소, 돌봄의 개인화를 조장했고(즉 가정주부 혼자서 한 집안의 가사 노동 전체를 떠맡았고), 갈수록 가사노동의 기준을 상향 조정시켰으며, 무보수 가사노동의 시간은 냉동시킨 채 가사노동의 저임금 외주화를 불러왔다. AI와 로봇은 과연 코완의 역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영국 사회학자 헬렌 헤스터와 경제학자 닉 스르니첵은 탈노동사회의 꿈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탐구한다. 노동이 일터의 임금노동과 가정의 사회 재생산 노동으로 나뉘는 것처럼, 탈노동의 현실화는 일터와 가정 이 두 영역의 재구성과 변혁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일터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동안 요리, 청소, 육아, 돌봄 등과 같은 무보수 가사노동이 만연했던 가족 구조의 재편과 주거 공간의 변화다. 특히 남성 생계 부양자와 가정주부,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로 이루어진 핵가족 형태의 재조정이 필수적이다. 물론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은 이미 종언을 맞이했고, 상대적으로 맞벌이 가정이나 반맞벌이 가정이 늘어나고 있지만, 탈노동과 자유시간의 확보를 위해선 기존 가족구조의 형태변화가 필수적이다.
탈노동, 탈자본의 핵심은 '시간'이다. 특히 진정한 자유시간의 확보가 필수적인데, 자유시간이란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위한 시간'이다. 저자들은 자유시간을 잡아먹는 사회재생산 노동을 개선해나가기 위해선 다음 네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기술의 발전, 사회적 기준 강화, 가족 형태의 변화, 주거 공간의 실험이다. 탈노동 프로젝트의 목표는 "필수 노동을 가능한 한 줄이는 동시에 자유를 가능한 한 확장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자기 주도적인 삶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다만 한국인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고도 압축 성장에 길들여진 편이라서, '탈노동'이란 말이 그리 매력적으로 들리진 않는다. 아무튼 저자들은 탈노동 사회를 위한 세 가지 핵심 원칙으로 공동 돌봄, 공공 호사, 그리고 시간 주권을 제시한다.
공동 돌봄은 두 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는 돌봄 관계를 핵가족이라는 하나의 틀 안으로 한정하려는 법ㆍ문화ㆍ경제 차원의 장려책을 페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 가족 단위에 할당된 책무를 더 잘 이행할 수 있는 대안적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공동 호사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것", 훌륭한 도심 공원이나 도구의 공동 소유처럼 공동의 웰빙을 위한 제도적 조치와 삶의 양호한 조건을 말한다. 시간 주권이란 단순하게 우리가 개인적으로 원하는 무엇이든 시간을 쓸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규범과 의무를 우리가 살아가는 집단 내에서 스스로 결정한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