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신 - 신이 없다면 우린 행복할까?
앤서니 T. 크론먼 지음, 이재학 옮김 / 돌밭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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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 그냥 끌리고 말았다. '제3의 신'이란 제목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두 명의 이름이 떠올랐다. 존 힉과 스피노자. 존 힉은 종교 다원주의의 대부격인 종교 철학자이자 신학자다. 내가 '신정론' 화두에 빠져들게 되면서 매우 좋아하게 된 '월클' 사상가다. 이단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기성 종교의 신관과는 다른 차원의 영성의 확장을 보여주었는데, '제3의 신'이란 문구를 만약 철학도가 썼다면 십중팔구 '스피노자의 신'을 의미했을 정도다. 아니나 다를까, 철학자 앤서니 T. 크론먼의 '제3의 신'도 기본적으로 '스피노자의 신'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잘 알다시피, 서구 문화의 양대 기둥은 의문에 기반한 헬레니즘과 믿음에 기반한 헤브라이즘이다. 헬레니즘의 성소가 아테네라면, 헤브라이즘의 성소는 예루살렘이다. 아테네가 의문과 지성의 도시라면, 예루살렘은 믿음과 영성의 도시다. 유대교, 천주교, 기독교 같은 아브라함의 종교들이 태동한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나는 어릴 적에 천주교 신자였던 터라 예루살렘을 포함한 성지순례가 커다란 인생숙제처럼 남아 있다. 내가 오랫동안 '냉담자' 신세로 살게 된 여러 이유 가운데 니체, 카뮈,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들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그렇다, 나도 한때 저자의 어머니처럼 카뮈와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을 신봉했다. 저자 어머니가 96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그 무신론적 인본주의 노선을 꿋꿋하게 지켜나갔던 것에 반해(이것 역시 대단한 믿음의 경지 아닐까 싶다), 반백의 문턱을 넘은 나는 한번 더 전향했다. 무신론이 아닌 유신론 노선으로 말이다. 다만 내가 믿는 신은 아브라함 종교의 신이 아니라 '제3의 신', '스피노자의 신'이다. 나는 여전히 기성 종교에 대한 반감이 크다. 예루살렘의 신들과 광신도들은 너무나 반인본주의적이다.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 전쟁을 보라.

인본주의는 크게 철학적 인본주의와 종교적 인본주의로 나뉜다. 철학적 인본주의자는 기본적으로 무신론자다. 한편, 종교적 인본주의자는 기본적으로 유신론자다. 저자의 어머니가 애독한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 역자의 말을 빌면, 내가 젊은 시절 신봉한 카뮈의 인생관은 다음과 같다.

"비록 의미와 목적이 없다 해도 인생은 인간의 손에 쥐어진 전부이고, 그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실제다. 인간이 이를 인지하고 환상을 떨쳐버린다면 그는 인생에 즐기고 기뻐할 대목이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카뮈는 삶과 죽음의 온전하고 끔찍한 짐을 모두 인간에게 지웠다. 그는 신의 도움과 영생이라는 희망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카뮈는 인간 각자의 삶과 행위가 자기 자신과 동료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라고 했다. 암울하고 거의 압도적으로 무거운 짐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충분히 감당할 능력이 있다고 카뮈는 말했다."(153쪽)

무신론자와 실존주의자는 '탄생에서 죽음까지'를 논하지, 탄생 이전이나 죽음 이후를 논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고, 일련의 자유로운 선택이 만든 삶의 의미와 결을 중시한다. 하지만 일부 과학으로 무장한 호전적인 무신론자는 나가도 너무 나갔다. 영원성의 화두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따끔한 지적대로, 영원성의 양대 요소가 초시간성과 무한성인데, 무신론자는 그저 영원성을 천국, 종교, 신과만 연계시킨다. 영원성에의 갈망을 인간 조건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인본주의와 양립가능한 신이 있을 수 있다. 그게 바로 '제3의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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