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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살리고 싶은 소녀
클라우스 하게루프 지음, 리사 아이사토 그림, 손화수 옮김 / 알라딘북스 / 2023년 11월
평점 :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대출증에 일일이 기입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럴 때, 책벌레는 순수한 백지처럼 이름도 날짜도 없이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책들을 우연히 만나곤 한다. 따끈따끈한 신간 도서이거나 이름 없는 외국작가의 책이거나, 누군가 한 번쯤 뒤적여보았을 그런 두툼한 벽돌책이거나, 좀이 피기 직전의 상태 불량의 책들, 아니면 좀 있으면 단두대에 오를 그런 비운의 책들이거나다. 신간을 품에 넣으면 마냥 설레는 느낌과 미지의 호기심을 품게 되지만, 색이 바랜 낡은 책일 경우는 설레임과 동시에 까니리 액젖을 콜라로 알고 마시는 듯한 덜떠름함도 뒤섞인다.
장서에는 재능과 재력 두 가지가 필요하다. 나는 오래토록 국공립 도서관 뺨치는 개인 장서가로 살고 싶었지만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지만 소장 도서의 수를 제한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책을 처리하는 방식은 크게 기부, 증여, 그리고 분리수거다. 나는 먼저 기부와 증여를 열심히 실천했다. 나의 오랜 지적 여정과 동반한 도서관을 너무 사랑해서, 도서관에다 어릴 때부터 아끼던 책을 만 권 이상 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정작 노골적으로 버려지거나 정기적으로 폐기되는 책들도 어마무시하게 많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현타가 왔다. 범생이에게 등교 지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대다수 책벌레는 도서관에서 버려지는 책들이 종종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뒤늦게 알게 된다. 그때부터 나 역시 양심의 가책을 덜어가며 분리수거날을 기다릴 때도 없지 않았다.
주인공 안나는 책을 너무나 좋아하는 책벌레다. 그리고 순진하게도 도서관에서 버려지는 책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노련한 도서관 사서 선생님의 조언에 힘입어, 안나는 아무도 빌려 가지 않는 책들을 살릴 방도를 마련하게 된다.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 한도의 도서를 대출하기 시작했다. 무려 50권이나 되는 책을 말이다. 안나는 책수레에 담아 온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신기하게도 우연히 빌린 한 권의 소설이 인생소설이 되곤 하는데, 안나 역시 그런 작은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그 인생소설은 다름아닌 『마법에 걸린 숲』이라는 책이다. 책의 주인공 발데마르는 작가와 동명의 인물인데, 정작 무명의 작가는 오래토록 베일에 싸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