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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이름 붙이기 -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할 때
캐럴 계숙 윤 지음, 정지인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평점 :
인지과학의 범주학과 생물학의 분류학은 가까운 사촌지간이다. 범주학이 인간의 정보처리 과정에 기반해 세상을 분류하고 인식하는 방식에 주안점을 둔다면, 분류학은 생물의 다양성과 진화에 기반해 생물의 계통과 종속을 특정 기준에 따라 나누어 정리하는 것에 주안점이 있다. 아마도 그 교접점은 민속 분류학이 될 것이다. 세상을 분류하고 인식하는 방식에 이른바 '프레임'과 '스크립트'가 영향을 준다면, 생물을 분류하고 인식하는 방식에서는 이른바 '움벨트'가 영향을 준다. 움벨트(umwelt)는 독일어로 ‘환경’, ‘주변 세계’, '세계관' 등을 뜻하는데, 우리가 공통적으로 지각하는 세계를 말한다. 생물학자들에게 움벨트란 지각된 세계, 즉 "한 동물이 감각으로 인지한 세계"를 의미한다. 프레임과 스크립트가 인지 편향적인 생각 도구라면, 움벨트는 다소 감각적인 혹은 현상학적인 인식 도구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생물에게 각자의 움벨트가 있다. 그리고 인간의 움벨트는 "생명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인간 특유의 시각"을 구성한다. 다시 말해서, 생물학의 분류학은 움벨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분류학은 크게 두 분야다. 하드한 분류학과 소프트한 분류학이다. 하드한 분류학은 일반적으로 생물들을 구분할 때 계, 문, 강, 목, 과, 속, 종 등의 깔끔하고 견고한 분류 단위를 사용한다. 반면에 소프트한 분류학, 예컨대 민속 분류학은 생물들을 유사한 특징을 가진 그룹으로 분류할 때 좀더 감각적이고 주관적인 방식에 의존하는데, 이런 분류에 노골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바로 움벨트다. 진화생물학자 출신의 과학 전문 저널리스트 캐럴 계숙 윤은 천진난만한 어린이든, 진화생물학 전공 박사든 자기 주변 생물들의 이름을 짓고 체계화하고 개념화하는 방식에 움벨트가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움벨트는 단순히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할 맥락이며, 이는 언제나 그래왔다. 움벨트는 우리에게 자연의 한 질서를 보여줌으로써 사실상 뭐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 선포한다. 또한 현실 자체의 경계선을 정하며, 그 세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포함해 생명의 세계 안 존재들의 위치를 결정한다."(40쪽)
범주학과 분류학의 엄밀한 과학적 방법 외에도, 움벨트에 기반한 민속 지식이 엄연히 존재한다. 저자는 진화론과 유전자에 기반한 너무 하드한 과학이 자연과의 접점을 차단하고 생명애에 대한 홀시를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는다고 우려한다. 그래서 움벨트에 기반한 민속 분류학의 장점을 내세우면서 생명의 세계와의 접점을 다시 회복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