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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도 지혜가 필요하다 - 노화와 질병 사이에서 품격을 지키는 법
헨리 마시 지음, 이현주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9월
평점 :
병원은 교도소와 흡사하다. "병원에서 결코 누릴 수 없는 것이 평온과 휴식, 고요함이며 환자가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력하고 굴욕적인 경험"이다. 굳이 인류학자가 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인데, 병원을 일터로 삼은 의사들은 이 사실을 왕왕 잊어버리고지낸다. 영국의 신경외과 의사인 헨리 마시는 70대가 되어 은퇴를 하고 팬데믹 기간 동안 전립선암 4기 판정을 받는다. 유능한 의사에서 무력한 말기암 환자로 입장과 시선이 뒤바뀌면서, 병원 시스템과 질병(종양), 죽음과 존엄사에 대해 비로소 공감어린 성찰과 이해를 하게 된다.
"교과서에는 불치병 진단을 받아들이는 데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나온다. 불신의 단계, 공포와 부정을 반복하는 단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단계, 협상, 분노, 절망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현실을 받아들인다. 아마도 실제 사람들의 반응은 이처럼 단순하지 않겠지만 나는 너무 늦게 병원을 찾은 나 자신을 탓하는 혹독한 시기를 겪었다."(118쪽)
영국의 사회의료보장제도 NHS(National Health Service)의 단점과 불편(가령 느림과 불친절, 환자를 배려하지 않는 병원 환경)에 대해선 전부터 대략 알고는 있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NHS에 몸담고 있었던 유명 의사의 솔직한 내부고발은 충격적이었고, 반대 급부로 'K-의료'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이 치솟곤 했다. 평소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의사로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고해성사급 실수담도 공개하고 있어, 저자의 진솔한 성품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나는 의사가 존경받을 이유가 그들의 성공이 아니라 뼈 아픈 실패에 있다고 생각한다. 실패를 겪었음에도 다음 수술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의사가 수술에 성공하는 것은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다. 성공 사례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완전히 실패했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179, 180쪽)
비록 말기암 환자이지만, 저자는 생명연장의 꿈을 지지하는 트랜스휴머니스트들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다. 지금보다 더 많은 노인이 사는 세상은 끔찍할 거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조력존엄사의 합법화는 찬성한다. 조력존엄사는 환자의 자율성과 선택에 달린 행위로, '조력자살'이라고도 불린다.
"조력존엄사를 금지하는 것이 냉담한 사회와 잔인한 범죄를 저지할 보호막이라는 개념은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조력존엄사를 허용함으로써 따라오는 안전장치가 노인학대를 식별하고 예방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다."(211, 2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