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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 삶, 사랑, 관계에 닿기 위한 자폐인 과학자의 인간 탐구기
카밀라 팡 지음, 김보은 옮김 / 푸른숲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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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인은 지구인을 어떻게 관찰할까. 그것이 알고 싶다면, '삶, 사랑, 관계에 닿기 위한 자폐인 과학자의 인간 탐구기'를 참조하면 꽤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이웃집 할머니나 유치원생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는 눈높이 방식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그러니 약간의 먹물이 요구된다. 주인공은 바로 생물화학을 전공한 카밀라 팡으로, 여덟 살에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진단받고 ADHD, 범불안장애, 강박장애, 감각처리장애와 함께 오래도록 살아온 여성 과학자다. 자폐 과학자에게 대인관계에 얽힌 인간 심리와 행동은 언제나 블랙박스나 수수께끼 미로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저자는 머신러닝, 생물화학, 열역학, 파동설, 양자물리학 등 과학 이론을 토대로 자신이 마주하는 세상과 실존적 관계를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이 책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푸른숲, 2023)은 바로 그런 인간 탐구의 결과물이자 인간 이해를 향한 과학적 분투의 결실이다.
서번트 증후군을 비롯해, 정상적인 분포 곡선을 벗어난 이들은 누구나 고향과 동떨어진 '실향'과 '이향'의 감각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기 마련인데, 낯선 이질감이 느껴지는 곳에서 살아가려면 롤모델이 절실해진다. 흥미롭게도 자폐 과학자가 꼽은 인생의 롤모델은 부처, 공자, 예수, 소크라테스 같은 사대성인이 아니라 의외로 '단백질'이다. 저자는 단백질로부터 사회생활과 대인관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화이부동'의 경지를 깨친다.
단백질을 단 한 번도 삶의 롤모델로 고려해본 적이 없는 평범한 독자라면, 일단 단백질이 정말 타인과 더 원활하게 상호작용하고 생산적으로 일하는 조직 생활의 노하우를 가르쳐줄 수 있을지 호기심과 의문이 동시에 들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단백질은 길거리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고 개성이 넘치며, 이웃집 어른보다 더 성숙하고 모범적이다. 단백질이 개성이 넘치면서도 다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단백질은 인간 성격 유형을 효율적으로 보여주는 대체물이며, 공존과 협력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관한 모델을 제공하고, 개성의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보시다시피 단백질은 팀워크와 효율적인 조직의 모범 사례다. 다양한 유형이 자신의 성격에 따라 독특한 역할을 하며, 몸이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이들 모두 필요하다. 단백질은 서로 질투하지 않으며, 다른 역할을 탐내지도 않는다. 자존심은 낮고 생산성은 높은 환경이다. 모든 직장이나 친목 단체가 이와 같다면 좋을 것이다."(71, 72쪽)
저자가 단백질을 MBTI 유형에 빗대어 성격 구분을 하고 있는 게 흥미롭다. 가령 수용체 단백질은 ENFP 유형이나 ENFJ 유형, 연결체 단백질은 ESTJ유형이나 ISTP 유형, 키나아제 단백질은 ENTP 유형이나 ESTP 유형 혹은 ENTJ 유형, 핵단백질은 INFJ 유형이나 INTJ 유형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MBTI가 정녕 생물화학만큼이나 과학적인가. 아무튼 다양한 유형의 단백질과 조화롭게 기능을 수행하는 단백질 분자의 본성은 남과 비교해서 우월을 따지거나 자존심만 내세운채 남의 성공을 시기질투하는 인간보다 훨씬 성숙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