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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 그 높고 깊고 아득한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평점 :
살다보면 방랑자의 지팡이가 간절해지는 순간이 온다. 떠나야 할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절망이나 희망 때문에, 일이나 휴양 때문에, 그리고 초월과 순수, 신성에 대한 열망 때문에. 박범신 작가는 방랑 중독자다. 사막과 고원을 좋아해 걸핏하면 짐을 쌌다. 인생은 정처없는 순례와 다를 바 없다. 등산에 비유하면, 인생과 순례는 '등정주의'가 아니라 '등로주의'다. 등정주의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일이라면, 등로주의는 땅을 물삼아 길이 흐르는 대로 나를 맡겨두는 일이다. 작가는 그렇게 히말라야와 우주의 배꼽 카일라스, 스페인 산티아고 등을 돌아다녔다.
작가의 민감한 영혼은 히말라야 지역에 젖어들었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크게 카트만두에서 '검은 바위산' 칼라파타르로 가는 길(카트만두, 두글라나 남체바자르, 탕보체, 팡보체, 딩보체, 로부체, 칼라파타르)과 '풍요의 산' 안나푸르나 라운드 순례길(카트만두, 포카라, 좀솜, 카그베니, 묵티나트; 마르파, 툭체, 라르중, 가사, 타토파니, 고레파니, 푼힐)로 갈린다. 작가만의 트레킹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혼자 걷고 함께 걷는다"이다. 혼자 걷지만 함께 가고 함께 걷지만 혼자 가는 게 우리 인생이요 순례길이다.
작가가 히말라야에서 본 것은 무엇일까.
"내가 본 것은 속도를 다투지 않는 수많은 길과, 본성을 잃지 않은 사람과, 문명의 비겟덩어리를 가볍게 뚫고 들어와 내장까지 밝혀주는 투명한 햇빛과 자유롭기 한정 없는 바람, 만년 빙하를 이고 있어도 결코 허공을 이기지 못하는 거대한 설산들을 보았습니다.또 감히 고백하자면, 행복하고 충만되기 위해서 내가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행복해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찾을 수 있었습니다."(86, 87쪽)
길에서 순례자들은 서로 축복의 인사를 나눈다. 네팔에선 '나마스테', 티베트에선 '타시델레', 스페인에선 '부엔카미노'다. 인사를 나누다보면 "사람과 사람, 사람과 풍경이 경계 없이 한통속이 되는 느낌"에 젖어든다. 부엔카미노는 '좋은 길'이란 말이다. 작가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폐렴을 얻었고 돌아와 폐암 판정을 받았다.
구도의 순례길에 명상이 빠질 수 없다. 《티베트의 지혜》를 쓴 소걀 린포체가 강추하는 명상법은 '숨결 지켜보기', '대상 활용하기', '만트라 암송하기'다. 작가가 소개하는 만트라는 파드마 삼바바의 진언인 '옴 아 훔 벤자 구루 뻬마 싯디 훔'과 티베트인들이 인사말처럼 사용하는 육자 진언 '움 마니 밧메 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