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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리는 고요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평점 :
작가의 글쓰기를 추동하는 힘은 무엇인가. 베스트셀러작가를 넘어 '영원한 청년작가'라 불리우는 박범신은 '고향, 문학, 사랑, 세상' 네 가지 키워드를 끄집어낸다. 한 줄의 문장으로 말하지 않고 한 권의 책으로 말이다. 고향, 문학, 사랑, 세상이 작가의 글쓰기를 추동하는 엔진이다.
고향은 문학적 자궁이다. 고향은 작가의 정체성을 맛볼 수 있는 '문학의 우물'이 되어준다. 역마살이 심한 작가일수록, 고향은 상상의 세계, 미지의 세계의 꾸준한 롤모델이기도 하다. 작가 박범신에게 논산과 금강, 옥녀봉(강경산)의 명월, 용인의 한터산방, 와초재 등이 그러한 영감의 장소였다.
와초재는 고향 논산에 있는 집필실의 이름이다. 와초(臥草)는 작가의 호이며, 소설 『풀잎처럼 눕다』에 착안해 친구였던 소설가 김성동이 부르던 별명이었으나 아호가 되었다. 와초재에는 “홀로 가득 차고 따뜻이 비어있는 집”이라 쓰인 현판석이 붙어있다. 홀로 가득 차지 않고서는 작가로서 글을 쓸 수 없고, 따뜻이 비어있지 않으면 사람으로서 원만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깊은 뜻이 담겼다. 작가적 정체성을 새긴 셈이다.
문학은 피난처다. 우울하고 방황하던 시절, 학교 수업 대신에 밖의 밀실과 안의 골방에서 읽었던 세계문학서와 철학서들이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덕분에 문학에 대한 '순정주의'를 붉은 단심처럼 품을 수 있었다. 작가에게 문학은 '죽어도 좋을 나무', 죽을 때까지 현역작가로 살고 싶었던 치열한 갈망의 근원이다. 문학의 힘은 지난 기억의 편린을 치유하고, 상처와 울분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힘이다. 작가는 소설의 힘은 "개연성을 전제로 한 상상력을 통해 기억과 사실을 체계화해 부조리한 현실을 가차 없이 드러내어, 그로써 독자로 하여금 더 나은 미래를 꿈꾸게 만들 때 최고조로 발현된다"고 했다.
"문학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명령하지도 않는다. 그게 문학의 힘이다. 효용성이 주는 반인간, 반문화에 대해서도 효용성이 없으므로 그 결백으로 문학은 그걸 지적할 수 있으며, 그것은 현대문학의 의미 깊은 특권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의 참된 만남, 참된 소통도 그럴 것이다."(71쪽)
또한 모든 계파에서 자유로운 인간중심주의가 글쓰기의 바탕이다. 저자는 자본에게 점령당한 현대사회의 불평등구조와 부조리를 통렬히 비판한다.
철학자 루카치는 "현대문학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작가의 문학은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다. 그 관심은 멀고도 가까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작가는 밀실과 광장, 구심력과 원심력, 간결체와 만연체,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사실과 기억 너머를 바라보는 힘을 사용한다.
"작가로서 사물을 볼 때 나는 동시에 세 개의 눈을 사용한다. 하나는 ‘사실’을 보는 눈이고 둘은 ‘기억’을 보는 눈이며 셋은 ‘상상’의 눈이다. 내가 보는 현상으로서의 사실과 현상 너머의 기억 사이를 긴밀하게 잇는 작업은 상상력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상상력은 사실-기억 사이를 잇는 개연성을 찾아내 그것을 합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98쪽)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말한 '사인칭 서술자'라는 표현도 분명 작가가 말한 '세 개의 눈'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