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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비극 - 차라리 공감하지 마라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3년 3월
평점 :
과유불급은 만고의 진리다. 다다익선보다도 한 수 위의 진리가 과유불급이랄까. 정치인이 툭하면 사용하는, 진선미와 버금가는 아름다운 말들이 있다. 공감, 연대, 소통, 대화, 정의, 공정 등이 그러한 아름다운 말들이다. 그런데 혹시 그거 아는가, 공감이 과하면 오히려 차별과 혐오, 증오에 불을 붙인다는 것을. 공감이 과하면 소통과 대화를 단절시킨다는 것을. 공감이 과하면 정의와 공정을 빌미로 광기어린 마녀사냥을 잔혹하게 벌인다는 것을.
미국 심리학자 폴 블룸, 독일의 인지과학자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 국내 진화생물학자 장대익 모두 공감의 이면과 그림자를 힘써 지적한 바 있다. 가령 자아상실, 흑백사고, 편 가르기, 증오와 혐오의 집단적 갈등이 바로 공감의 '배신'이자 '이면'이다. 나는 이들 덕분에 맹목적인 공감 예찬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혐오는 공감의 이면이다. 공감의 그림자, 공감의 두얼굴이 바로 혐오와 배제다.
지금 한국 정치판에선 증오와 혐오의 집단적 갈등이 유달리 심각하다. 한국사회의 병폐를 지적하는 데 그 누구보다 열심인 비판적 지식인 강준만은 누차 한국 정치판의 그런 한계와 폐해를 지적한 바 있다. 이번에도 신작 『공감의 비극』(인물가사상사, 2023)에서 편 가르기와 국민적 차원의 집단 패사움이 '선택적 과잉 공감'에서 기인한다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공감은 근력처럼 한계가 있다. 자기가 속한 내집단에 공감을 과하게 쓰면 다른 집단에 쓸 공감이 턱없이 부족해진다. 그래서 공감은 선택적 과잉 공감으로 빠지기 쉽다. 선택적 과잉 공감은 자기 성찰의 계기를 차단하면서 내로남불을 일삼게 하고, 맹목적인 흑백논리로 사상 무장을 한 뒤 적대 세력을 악마나 사탄의 무리로 몰아간다. 쉽게 말해서, 마녀사냥의 원동력이 바로 내집단에 대한 선택적 과잉공감과 외집단에 대한 선택적 과잉 혐오인 것이다.
나는 일부 유명 정치인들의 언행을 지켜보면서 이들의 노골적인 과잉공감의 제스처가 실은 사이비 광신도나 범죄자들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부족정치 혹은 팬덤 정치에 유능한 정치인들은 선택적 과잉 공감을 연출하여 적대적인 타자를 향한 증오와 혐오의 파이를 크게 키운다. 흔히 '빠'로 지칭되는 팬덤이 시원하게 사이다를 들이킬 수 있도록 말이다. 일부 학자들은 선택적 과잉 공감에 브레이크를 거는 수단으로 공감의 질적 변화를 요구한다. 가령 장대익은 학자다운 순수한 열정을 품고서 정서적 공감을 넘어 역지사지와 같은 인지적 공감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땅의 정치인이 모두 인지행동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는 이상,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