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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속으로 - 영국 UCL 정신 건강 연구소 소장 앤서니 데이비드의 임상 사례 연구 노트
앤서니 데이비드 지음, 서지희 옮김 / 타인의사유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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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노년기를 맞이하려면 마음건강이 중요하다. 혹시 '중광 할머니'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10년간 고려대 중앙광장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하던 할머니 노숙자를 가리킨 이름이다. TV 방송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할머니 사연이 공개되자마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한국판 '뷰티풀 마인드'라면서 말이다. 모교에서 노숙하고 연구하며 지내는 중광 할머니는 65학번인데, 보물단지처럼 들고 다니는 연구 노트엔 알아보기 힘든 물리학과 수학 공식 등으로 빼곡했다.
20대 때의 중광 할머니는 엘리트 수재였다. 전교 수석 졸업생으로 총장상까지 받아 신문 지면에도 소개된 바 있고, 미국 유학으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은 정말 촉망 받던 엘리트 학자였다. 그런데 귀국 후 소명이라 생각한 학자의 길을 걷다 이게 어긋나자 조현병 증상이 시작됐다. 사람을 의심하는 병, 남들이 미행한다는 편집증이 심해졌다. 미국 노인병학회에 따르면, 건강한 노년을 보내려면 이동성(Mobility), 마음건강(Mentation), 건강과 질병(Medical issues), 나에게 중요한 것(What Matters) 네 가지 축이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중광 할머니는 삶의 네 가지 축 가운데 이동성 하나만을 빼놓고 나머지 세 축이 허물어지고 만 게 아닌가 싶다.
그동안 조현병의 원인으로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과잉이 지목되곤 했다. 이를테면 도파민 과잉이면 조현병, 도파민 결핍이면 파킨슨병 증상이라는 논리가 대세였다. 따라서 신경과학 원리상 조현병과 파킨스병은 양립할 수 없다. 그런데 영국의 정신 건강 의학과 전문의인 앤서니 데이비드는 조현병과 파킨슨병 증상이 동시에 나타난 제니퍼의 사연을 들려준다. 제니퍼는 얼핏 보기에 조현병 약 때문에 부작용으로 파킨슨병 증세를 일으킨 경우 같지만, 실은 조현병 치료제가 파킨슨 증상의 발병 시기를 보다 앞당긴 경우였다. 조현병과 파킨슨 증상이 동시에 진행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정신 건강이 무너지는 일을 '심연'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에 비유한다. 앞서 제니퍼의 사례 외에도, 자동차사고로 이인증(자신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짐)과 비현실감 장애(세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짐)를 갖게 된 패트릭, 심각한 우울증에 걸린 독실한 기독교 신자 토머스, 양극성 기분 장애라 불리는 조울증 진단을 받은 뮤지션 주니어, 비정형성 섭식장애에 시달리는 중년의 케이틀린, 모든 건강 징후나 수치가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수년째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 있는 에마, 극심한 스트레스로 전환 장애 환자가 된 크리스토퍼, 뇌종양 진단을 받은 에이미 등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내가 난생 처음 들어본 희귀한 질환이 나오는데, 바로 에마의 '전반적 거부 증후군'이다. 이 증후군은 남아보다 여아에게 더 많은 편이고, 스트레스나 신체 질환이 원인이 되어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수차례의 전기 경련 요법으로 잠시 호전을 보이는가 싶더니 결국 원상태로 돌아가고 말아 안타깝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야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