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 - 갈망, 관찰, 거주의 글쓰기
레슬리 제이미슨 지음, 송섬별 옮김 / 반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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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사상가 엘렌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를 접한 이후로 한동안 글쓰기 전략에 관한 지적 탐구는 잠시 접었더랬다. 그런데 레슬리 제이미슨의 책을 읽고 나니 다시금 글쓰기 전략에 관한 지적 흥미가 샘솟는다. 나는 신변잡기나 감상적인 에세이보다는 묵직한 이슈를 다루거나 지적인 통찰력을 보이는 담박한 에세이를 더욱 좋아하는데, 내가 꼽는 그런 지적인 에세이스트의 최고봉은 수전 손택과 조앤 디디온이다. 그런데 신세대 에세이스트들 가운데 거룩한 명성을 쌓은 이 두 사람 뒤를 이을 에세이스트로 레슬리 제이미슨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나는 인텔리 지성의 전방위적 글쓰기를 보여준 책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반비, 2023)를 통해 제이미슨을 처음 접했지만, 알고보니 국내에서 이미 적지 않은 독자층을 거느린 인기작가였다. 이 책 말고도 이미 두 권의 저서가 시중에 나왔는데, 고통에의 공감을 그린 첫 산문집 『공감 연습』과 알코올중독 경험과 회복 과정을 그려낸 회고록 『리커버링』이 그러하다. 

이 책은 '갈망의 글쓰기, 관찰의 글쓰기, 거주의 글쓰기'라는 세 가지 유형의 글쓰기를 강조하고 있는데, 사실 이 세 유형의 글쓰기 모두 엘렌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가 함축하는 바와 상통한다고 본다. 남성중심적 지식과 언어와는 다른 '여성의 제스처'를 보여주는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식수는 글쓰기를 "정말로 막강한 위력을 지니며, 비용이 가장 적게 들고, 자신을 충분히 표현하는 가장 우아한 방식"이라고 했다. 페미니스트로서 엘렌 식수는 억압당한 여성성을 다룬 주제들을 강조했지만, 결국 모든 침묵당하거나 억압당하고 있는 타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는 일이야말로 해방적 글쓰기의 단골 테마가 아닐까 싶다. 

이 책 제목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도 여성적 글쓰기의 해방 효과와 맞물린다. 제목은 비평가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가 워커 에번스를 두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예술가가 하는 일은 모든 일, 모든 날, 모든 곳에서 적용되어 제 삶을 재촉하고, 해명하고, 강화하고, 확대하며 이를 유려하게 만든다. 에번스가 하는 것처럼, 비명 지르게 한다."

저자는 과학성과 재현성,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남성중심적 글쓰기라면 놓쳤을 그런 주변적 테마들을 발굴하거나 찾아나선다. 정체불명의 고래 '52 블루'와 전생의 기억, 임사체험, 초능력을 연구하는 '지각연구부서', 그리고 디지털 세계의 가상 정체성을 구현한 플랫폼 '세컨드라이프' 등이 그러한 테마들이다. 덕분에 우리는 52 블루의 존재를 최초로 식별해낸 음향기술자 조 조지, 14년간 전생을 기억한다고 주장한 아이들의 데이터베이스를 수집해온 아동정신과 전문의 짐 터커, 그리고 여러 다양한 경험을 가진 세컨드라이프 이용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덕분에 국내에도 고래덕후들이 제법 늘어난 것 같지만, 그래도 신비한 고래 52 블루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이 다수일 것이다. 대다수에게 고래는 고래일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고래는 전부를 의미한다. 그 누구도 실체를 보지 못한 고래 52 블루와 영적 동류의식을 느끼는 고독한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는 정말 흥미롭다.

"52 블루는 고독의 메타포가 되는 한 마리의 고래를 넘어 고독의 치료제로서의 메타포로 자리매김한다. 은유는 언제나 동떨어진 두 점을 잇는다. 고립 속에는 파토스가 존재하지 않음을, 타인의 역경과 무관한 역경은 존재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고독이 은유를 찾아다니는 것은 정의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명할 수 있는 동반자, 즉 비유 속에서 싹트는 동류의식이라는 약속을 위해서다."(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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