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뷰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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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소설을 영화로 찍는다면 첫 장면은 무조건 장례식이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실버뷰'라는 저택의 실질적인 여주인 데버라 에이번. 유가족으로 남편 에드워드와 딸 릴리 그리고 두 살배기 외손자 샘이 있다. 서양의 귀족과 동양의 선비들은 자신의 저택에다 고상한 이름을 붙였다. '실버뷰'라는 이름은 독일 철학자 니체의 저택명에서 따온 것이다. 예전에 데버라의 부친이 살아있을 때에는 메이플스라고 불렸다. 데버라는 용감무쌍한 영국 첩보국 스파이다. 첩보국의 일류 중동 분석가로 명성이 높고, 지역 도서관의 비상임이사를 엮임하기도 했다. 실버뷰의 가족들은 학습된 훈련 덕분에 모두 그럴듯한 '위장 시나리오'에 익숙하다. 아, 릴리의 연인인 신출내기 서적상 줄리언 론즐리도 빼먹을 순 없다. 본래 "런던에서 아주 잘나가는 증권 중개인"이었는데, 작은 해변 마을에 책방을 열게 된다. 

줄리언 제러미 론즐리는 이 소설에서 사건 전개를 위한 '전령사' 역할이다. 줄리언의 선친인 헨리 케네스 론즐리는 성공회 목사 출신인데 여성 문제로 스캔들을 자주 일으켰다. 선친과 에드워드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사이로, 토론이 없는 토론클럽인 '귀족 클럽'의 같은 회원었다. 헨리가 회장, 에드워드가 부회장이었다고. 당시 무정부주의, 볼셰비키, 트로츠키 등 이념서들과 교의들을 닥치는대로 섭렵했는데, 젊은 시절 헨리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활동가로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종교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이내 다시 발길을 돌려 탕아가 되었다. 그럼, 젊은 시절의 에드워드는 어땠을까. 모범생이거나 머리만 굴리는 사색인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노신사가 된 에드워드는 줄리언에게 서점 운영에 대한 팁과 아이디어를 건네면서 왕래가 잦아지게 되고, 실버뷰에서 에드워드의 가족들과 안면을 트게 된다. 에드워드는 줄리언에게 비어 있는 서점 지하실을 '문학 공화국'으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저 위대한 소설가들이 아니라, 철학자, 자유사상가, 위대한 운동의 창시자들 얘기요. 우리와 맞지 않는 위인들까지 포함하면 더 좋겠구려. 저 흔해 빠진 문화관료들이 아니라 론즐리의 베터북스가 직접 선정하는 거요."(37쪽)

줄리언은 점차적으로 에드워드를 의지하면서 에드워드의 첩보전에 가까운 은밀한 심부름도 수행하게 된다. 에드워드와 줄리언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책이 있는데, 바로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다. 이 책은 비밀 접선을 위한 신분확인 용도로 활용된다.

첩보물의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비밀이나 은밀한 구석을 갖곤 한다. 그래도 그중에서도 가장 미스터리한, 정체를 종잡기 어려운 회색인이 있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폴란드 출신의 에드워드 에이번이 바로 그런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교수라는 얘기도 있고 구호단원이라 전세계를 돌아다닌다는 얘기도 있고", 아무튼 에드워드도 첩보국의 스파이다. 

부부 스파이들의 실제 삶은 어떠할까. 데보라와 에드워드의 경우, 부부 스파이로서의 활약상은 그리 숨가쁘지도 않고 종종 암시적이다. 오히려 첩보국에서 일하는 스파이 부부의 역할과 아이러니한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건 종양학자 스튜어트 프록터와 아내 엘렌의 경우다. 이들 부부도 스파이고, 이들과 동료의 입을 통해서 에드워드의 화려한 과거사에 대해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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