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정신현상학 - 자유의지, 절대정신에 이르는 길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이병창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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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헤겔을 물구나무 세웠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넓게 보면 유심론을 뒤집어 유물론으로, 정치적 보수성을 뒤집어 정치적 급진성으로, 관념적 사변론을 뒤집어 구체적 실천론으로, 존재론을 뒤집어 해방론으로 변모시켰다는 얘기다. 좁게 보면, 마르크스가 강조한 경제적 토대가 바로 헤겔의 절대정신 개념을 물구나무 세운 경우라는 말이다. 이는 철학 애호가라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한 가지 매우 기초적인 사실이 빠져있다. 바로 마르크스가 헤겔의 난해함을 쉬움으로 뒤집었다는 점이다. 헤겔이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나처럼 마르크스를 징검다리로 활용하거나, 아님 니체나 칼 포퍼를 이용해 살펴보는 것도 한 방편이라 하겠다. 세 분 모두 내가 무척 좋아하는 철학자다.

나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청년기 저작을 전성기 작품보다 더 선호한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정형화된 틀에 담기지 않는 애매모호한 사유의 폭과 가지를 쳐나가는 잠재된 확장력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미로 퍼즐을 풀듯, 혼돈의 와중에 발견되는 질서의 오묘한 맛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은 헤겔의 청년기 작품인데, 헤겔에 입문하는 필수코스라 할 수 있다. 

헤겔 전문가 이병창은 『정신현상학』이 '자유의지의 철학'이라고 단언한다. 『정신현상학』은 이론적 인식과 실천적 의지를 모두 다루고 있는데, 인식과 가치의 문제보다도 의지와 자유의 문제가 핵심이고, 특히 자유의지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저자는 곧바로 세 가지 유형의 자유의지를 구별한다. 형식적 자유의지와 도덕적 자유의지, 그리고 공동체적 자유의지다. 형식적 자유의지와 도덕적 자유의지가 모두 개체 차원의 자유의지라면, 공동체적 자유의지는 공동체의 집단의지다. 일반적으로 헤겔이 논하는 공동체의 세 유형은 가족, 시민사회, 국가인데, 공동체적 자유의지는 절대정신으로 승격된 이상적인 국가 차원에서 주로 논의된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헤겔 정치철학의 보수성이 드러난다. 공동체적 자유의지가 개인이 자발적으로 공동체에 복종하는 자유의지라면 이는 곧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의 표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헤겔에게 국가란 절대정신의 구체적 실현으로, 군주와 의회, 관료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형식적 자유의지가 실질적인 도덕적 자유의지를 거쳐 절대정신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구상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정신이 절대정신을 향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역사적 성장 구조가 핵심이다. 종교와 절대지는 절대정신의 두 가지 모습이다. 헤겔에게 자유는 당대 유럽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래서 역사를 자유의 진보 역사로, 국가를 자유의지의 발전 산물로 보았다. 

형식적 자유의지는 노예의 도덕을 통해 출현하는 자기결정권이고, 도덕적 자유의지는 객관적 정의인 도덕적 규범을 따르는 실질적인 자유의지다. 쉽게 말해서, 형식적 자유의지는 나의 결정이라는 단순한 차원에 머물지만, 실질적 자유의지는 정의로운 선택과 같은 사회 정의의 문제와 직결된다. 헤겔의 표현을 빌면, 도덕적 자유의지는 정신적 본질과 개인적 확신의 결합으로서 '자기를 확신하는 정신'이다. 헤겔은 도덕적 자유의지를 논하면서 칸트의 의무론과 낭만주의의 양심 개념을 극복하고자 했다. 

"헤겔은 칸트의 자유의지 개념과 낭만주의자의 양심 개념은 형식적 자유의지를 넘어서 실질적인 자유의지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칸트와 낭만주의자에서 자유의지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자유의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헤겔은 마침내 절대정신이라는 개념에서 이런 공동체적 자유의지가 완성된다고 보았다."(32쪽) 

저자의 표현을 빌면, 형식적 자유의지는 "운명적 필연성에서 자의적 선택으로서 자유의지"이고, 실질적 자유의지는 "도덕적 목적을 추구하는 합리적 자유의지"다. 형식적 자유의지가 무엇이나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즉 욕망에 따른 선택을 하는 '법적 인격'이라면, 실질적인 자유의지는 사회정의와 도덕규범을 따르는 보다 진보한 자유의지다. 

저자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 말미에 해석이나 이해의 이정표가 될만한 여섯 권의 책을 소개한다. 『정신현상학』의 가이드용 텍스트랄까. 가령 대문호 괴테의 정신적 성장을 반영한 교양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가 '첫 번째 이정표'로 소개된다. 인간 정신의 형성 과정을 다루면서 낭만주의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괴테의 이 소설은 『정신현상학』의 철학적 맥락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이 소설은 괴테가 낭만주의에서 고전주의로 넘어간 족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낭만적 정신이 자연과 감정, 자유를 지향하면서 이성과 권위, 억압의 체계에 저항했다면, 고전주의 정신은 그리스의 예술을 본받아 이성과 감정, 자아와 자연, 질서와 자유를 통일하려 했다. 저자는 또한 『정신현상학』의 자매편으로, 이와 구조적 연관성을 지닌 『법철학』을 강조한다. '네 번째 이정표'로 소개되는 『법철학』에서 헤겔은 법의 근거로 자유의지를 꼽는데, 여기서 자유의지는 소유권과 도덕의 상호관계에 주목한다. 『정신현상학』에서 이성과 정신이 결합해 절대정신이 되듯이, 『법철학』에선 소유권과 도덕의 결합으로 국가가 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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