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은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된다. 문제는 이런 상투적인 번역이 아나키즘의 이념과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불필요한 오해와 착각을 누적시킨다는 점이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중매체가 그리는 무정부주의는 폭력적이며 비현실적이고 반항적인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다. 마치 순수한 청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아나키즘의 이상에 물들게 된다는 그런 낭만적인 뉘앙스로 말이다. 하지만 법학자 출신의 '아나키스트 이야기꾼' 박홍규는 한결같이 아나키즘의 정신으로 '자유, 자치, 자연의 삼자주의'를 강조한다. 국가주의와 그 확장판인 제국주의는 인간 본연의 자유와 자치를 제한하고 자연을 훼손하고 파괴한다. 따라서 진정한 아나키스트라면 전체주의나 권위주의, 국가주의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지구별의 생명권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자연권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스스로를 "개인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이며 자연주의자입니다"라고 토로한다.
사회적 아나키즘은 개인보다 사회를 더욱 강조한다. 사회적 아나키즘의 핵심은 개인의 자율성을 한껏 발휘하되 불의의 권력에 맞서서 사회적 정의와 공정을 실현해야 하는 일이다. 국가와 자본에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사회적 아나키스트들의 연대 대상이다. 나는 여전히 사회적 아나키즘의 꿈을 지지한다. 모든 종류의 인간 차별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수주의나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에도 결연히 반대하기 때문이다. 사실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백신이 아나키즘 아닐까 싶다. 역사적으로 '아나키즘'이란 용어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이 처음 사용했다.
저자는 현실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엄격히 구별한다. 그리고 진정한 사회주의의 정수로 사회적 아나키즘을 지지한다. 저자는 마르크스가 본래는 사회적 아나키스트였을 거라고 추론한다. 마르크스가 러시아나 중국, 북한이나 쿠바식의 전체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공산주의를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열 명의 사회적 아나키스트를 적극 소개하고 있다. 사회적 아나키스트 역사가 하워드 진, 사회적 아나키즘의 아버지 윌리엄 고드윈, 상호주의의 사회적 아나키스트 피에르-조지프 프루동, 집산주의 사회적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 코뮌주의의 사회적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 자유·자치·자연의 사회적 아나키스트 윌리엄 모리스, 아나코 생디칼리즘 이론가 조르주 소렐, 사회적 아나키스트 혁명가 에리코 말라테스타, 혁명적 페미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 21세기 사회적 아나키스트 놈 촘스키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