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나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마음을 비우기 위해 달린다. 건강이나 '러너스 하이'를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말그대로 무념무상의 상태를 지속하고 싶어서 달린다. 한때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한밤중에 언덕길을 달린 적이 있다. 그때 마주친 들개떼들이 얼마나 무섭던지 혼비백산까지는 아니지만 가슴이 철렁한 적이 있다. 아무튼, 달리면 기분이 좋아지고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느낌이 든다. 중압감을 덜어내는 데 달리기만한 게 없다. 특히 장거리 달리기는 상실의 슬픔과 패배의 고통을 이기는 특효약이다.
철학자 마크 롤랜즈는 달리기의 도구적 가치(가령 건강, 장수, 활력, 젊음)보다 본질적 가치에 더욱 주목한다. 나는 달리면서 만트라를 외우던가 아무 잡념없이 그냥 달리는데, 저자는 늑대개 브레닌을 비롯한 여러 견공들과 함께 내달리고 또한 달리면서 자유, 노화, 놀이 등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연관된 철학적 테마를 사색한다. 더욱 놀라운 점은, 본인의 장거리 달리기 체험을 특정 철학자의 시간대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스피노자기, 데카르트기, 흄기, 사르트르기가 그러하다. 무척 튀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달릴 때 우리가 겪게 되는 내면 풍경의 변화, 가령 육체와 정신의 연장선에서 '정신'으로, 그다음은 '사유'로 축소되고 결국 무(無)로 텅 비워지는 단계를 가리킨다.
저자의 여러 철학적 논의들 가운데, 나는 달리기의 본질을 '놀이'로 본 것이 유독 가슴에 와닿았다. 달리기가 놀이가 될 때, 그저 순수하게 달리기 위해 달릴 때 가장 가치 있다는 데 공감한다. 캐나다 철학자 버나드 슈츠는 놀이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덜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했다. 어떤 행동이 놀이가 되는 것은 순전히 그 자체를 위해 그 행동을 할 때다. 비록 놀이의 기능이 이후 삶에서 필요한 어떤 기능을 연마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냥 좋아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놀이다. 독일 철학자 모리츠 슐리크는 놀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을 놀이로 바꾸는 것은 순수한 창조의 기쁨, 활동에 대한 열정 그리고 움직임에 대한 몰두이다. 거의 언제나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위대한 마법이 있으니, 바로 리듬이다. 분명 이러한 리듬은 외부적, 의도적으로 그 활동에 유도되거나 인위적으로 수반하지 않고 그 행동의 특성과 자연적인 형태로부터 자발적으로 도출될 때 완벽하게 작용한다."(162쪽)
확실히 달리기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안락한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이다." 법정 스님의 이 말씀을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데, 비록 달리기 마니아는 아니지만, 달리기가 충만한 삶을 위한 효과적인 디딤돌이라고 믿는다. 미국의 마라토너 이언 톰슨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행복하기 때문에 달리고, 달리기 때문에 행복하다. 이 과정을 통해 가장 순수한 나를 만난다. 달리기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