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격동하는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은 사랑과 혁명, 이념과 현실, 충성과 배신의 이항대립을 축으로 삼는다. 재미 작가 김주혜의 첫 장편 데뷔작『작은 땅의 야수들』(다산책방, 2022)은 1917년부터 1965년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의 소용돌이를 헤쳐나가는 다양한 군상들의 인연과 행적을 그리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권번 기생, 독립투사, 명문가 후손들과 거지 패거리들이 등장하고, 3·1 독립운동부터 해방 후 좌우 이념 분쟁,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 그리고 박정희의 등장까지 굵직한 격동의 세월을 주요 인물들이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더구나 우리말 번역이 유려해, 마치 처음부터 한국어로 쓰여진 소설처럼 다가왔다. 

소설 제목인 '작은 땅의 야수들'은 협의로는 한반도의 외세 침탈과 일제의 잔혹한 만행을 비유하지만, 광의로는 전세계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을 뜻한다. 만약 '야수들'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영물 호랑이와 호랑이를 닮은 한국인의 기상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소설 제목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처럼, 한반도라는 작은 땅에서 벌어진 식민수탈과 독립운동은 전지구적 차원의 식민수탈과 민족해방운동의 집약체라 할 수 있겠다. 

소설의 주인공은 경성 명월관 출신의 종합예술인 옥희지만, 나는 옥희보다도 독립운동가 출신의 남정호에게 오히려 감정이입을 하며 읽었다. 소설은 백두대간의 사냥꾼 이야기에서 시작해 한라산의 해녀 이야기로 마무리짓는데, '평안도 호랑이'로 불린 사냥꾼이자 대한제국군 출신인 남경수의 아들이 바로 남정호이고, 남정호의 억울한 죽음 이후 제주도로 내려간 옥희가 물질을 배우며 바다와 하나가 되는 체험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옥희 주변의 가족과 같은 친한 지인들로 기생 출신의 은실, 단이(예단), 월향, 연화가 등장한다. 참고로 옥희, 연화, 월향, 은실의 이름은 원서에서 Jade, Lotus, Luna, Silver인데, 역자 박소현이 저자 의견을 참고해 지은 이름이다. 저자는 은실과 은실의 사촌인 단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때 권번 기생들이 독립운동 자금의 소중한 모금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특히 경성 권번을 이끈 유명한 기생 단이는 3·1만세운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했다. 은실은 평양 권번에서 제일 유명한 기생으로, 큰딸 월향과 작은딸 연화가 있다. 

단이는 인물을 알아보는 선구안이 남다른데, 월향, 연화, 옥희의 성격을 각각 꽃에다 비유한 바 있다. 이를테면 옥희는 "한결 같은 사랑을 받는" 겨울 동백, 연화는 "밝고 건강하며 행복한 여름 해바라기", 그리고 월향은 "단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는 가을 코스모스"에 비유된다. 그러자 옥희는 단이를 "여왕의 품격을 갖춘 봄 장미"에 비유한다.

옥희가 '사랑'과 '현실'의 분신이라면, 남정호는 '사랑과 혁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남정호의 연적이라 할 수 있는 가난한 인력거꾼 출신의 김한철은 뼈대 있는 안동 김씨 가문의 방계 친족으로 '사랑보단 현실'을 택하는 출세지향적 인물이다. '혁명'과 '이념'의 전형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남정호의 스승인 독립운동가 이명보다. 

'이념과 현실'의 이항대립 구도로 본다면, 남성 등장인물 가운데는 노련한 사업가 김성수와 김한철이 '현실' 노선의 대표이고, 독립운동가 이명보와 남정호가 '이념' 노선의 대표라 할 수 있다. 김성수와 이명보는 모두 만석꾼 가문 출신의 동경 유학 엘리트인데, 한때 기생 단이의 애인이기도 했던 김성수와 한때 옥희의 첫사랑이던 김한철이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되는 것이 아무리 유유상종이라지만 다소 도식적이다. 더구나 둘 모두 훤칠한 미남자로 그려진다. 독립운동가가 잘 생기면 어디 덧나나. 만약 이 소설이 드라마화된다면, 제발 남정호 역을 김한철 역보다 훨씬 잘생긴 배우가 맡았으면 좋겠다.

누군가 내게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한 구절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경성의 대기를 감각적으로 묘사한 남정호의 다음 글을 꼽을 것이다. 

"경성의 대기에서는 비,식용유, 쓰레기, 소나무, 감, 향수, 고추장, 뜨겁게 데워진 금속 그리고 눈 냄새가 났는데, 계절과 시간과 동네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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