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노동 -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이수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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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크게 두 유형이다. 보수를 받는 유급 노동과 보수를 전혀 받지 않는 무급 노동. 보수를 받지 않는 무급 노동을 가리켜 이른바 '그림자 노동'이라고 한다. 내가 무척 존경하는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예리한 안목 덕분에 우리는 보수 없이 행하는 이런저런 비생산노동을 그림자 노동이라 지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성희롱'이란 표현이 있기 이전에는 가부장제 마초 문화의 '일상적 농'인 성희롱을 대놓고 비판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한편, 유급 노동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바로 진짜 노동과 가짜 노동이다. 대다수 현대인은 보수를 받는 일은 모두 진짜 노동으로 간주하는 편인데, 유급 노동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가짜 노동은 하는 일 없이 바쁘고 무의미하게 시간만 낭비하는 일을 말하는데, 우리말의 '삽질'이 바로 가짜 노동의 동의어라 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림자 노동의 실체가 '셀프 서비스'라면, 가짜 노동의 실체는 '삽질'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림자 노동이든 가짜 노동이든 모두 '과잉 노동'에 해당하고, 번아웃의 주요 원인이라는 사실이다. 군복무중에 행한 수많은 삽질들을 떠올려본다면, 회사와 일터에서 행한 가짜 노동의 실체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덴마크 인류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와 철학자 아네르스 포그 옌센의 날카로운 통찰 덕분에, 우리는 노동의 본질과 참노동의 가치는 물론 가짜 노동의 숱한 부작용에 대해서 논할 수 있게 되었다. 노동은 단순한 돈벌이와 생존 수단이 아닌 인간의 삶의 근본과 연결되어 있다. 가짜 노동의 유해성은 지속적으로 개인의 자존감에 타격을 주고 번아웃 증후군에 빠지게 만든다는 데 있다. 

앞서 언급한 그림자 노동이 주로 저임금 서비스직과 가정에서 자주 벌어진다면, 가짜 노동은 주로 양복을 걸친 관리직이나 공무원 조직, 그리고 고임금 사무직에서 빈번하게 연출된다. 그림자 노동이 잉여가치를 낳는 얄팍한 자율성이라면, 가짜 노동은 잉여노동을 낳는 그럴싸한 기획성 업무다. 이를테면 성과와 상관없는 일, 보여주기 식의 일,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위한 일, 단지 바빠 보이기 위한 무의미한 일들이 그러하다. 

"가짜 노동은 자신의 직업과 팀을 보호하기 위한, 혹은 기관이나 회사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개인이 고의로 하는 행동인가? 아니면 합리성의 과잉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겪는 소외 현상인가?"(225, 226쪽)

조직의 목표를 합리적으로 설정하고 문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한다는 거창한 취지 하에, '컨설팅, 코칭, 브랜딩, 홍보'라는 듣기에 달콤한 수식어 하에 착착 진행되는, 쓸데없이 업무량과 업무시간을 늘리는 일들이 가짜 노동이다. 유행에 따라 바뀌는 시스템, 쓸데없이 행해지는 잡무, 시간을 잡아먹을 뿐인 회의, 산더미 같은 참조 이메일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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