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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역사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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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는 실패했고, 서양사는 성공했다!

 

이것이 이 책의 주제다. 너무 심한 말 아니냐는 질문이 터져 나옴직한 말이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위 주장이 전혀 터무니 없는 주장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뭐냐는 항변도 나옴직하다. 간단하게 말해서 15세기 이후부터

서양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서양식 제도와 문화가 전 지구를

덮고 있는 것을 단적으로 기준삼는다면 위 주장이 잘못된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문화적으로도 서양식 가치관과

양식이 전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 하나, 동양은 정신문화이고 서양은 물질문화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은

너무나도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동양의 물질은 15세기까지 서양을 압도했고 서양의 정신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러한 주장은

자기 위주의 변명에 불과하다.

 

저자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그 상태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역사적으로

탐구해보자고 한다. 그 다음에 이 현실에서 어떻게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지를

특히 한국의 상황에 맞추어서 해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서문과 후기에서 강조한다.

 

간단하게 (자세한 것은 책을 읽어보시길!) 설명하자면, 서양은 지리적 중심이 없어서

분열과 각개약진으로 문명의 이동이 원활하고 서로간에 자극을 주면서 발전을 해온데

비해서 동양은 문명의 지리적 중심이 확고하여 통일지향적이고 이 통일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정체될 수 밖에 없었기에 15세기 이후에 서양문명에게 문명의 주도권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문명의 차이는 정치가 모든것에 우선하는 동양과 정치가 경제에 종속적인 서양의

차이로 구체화되고 동양에서는 형법과 행정에 대한 법이 서양에서는 민법이 발달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차이도 설명이 된다.

 

정치적으로는 분열되어 있었지만 그리스도교로 통합된 중세의 시기가 지나고, 본격적인

근대의 시기를 거치면서 서양이 비로소 세계사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되는 과정을

저자는 동양의 같은 시기를 비교하면서 알기 쉽게 설명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근대 세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거쳐야 할 중요한 행정으로

이것은 시민혁명- 시민사회- 내전-의회민주주의-공화정 의 사이클이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서양은 이 과정을 수많은 피와 땀과 (물론 침략도 포함하여) 노력으로 만들어 냈지만

동양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치 않고 근대 세계로 진입한 것이 지금의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 행정의 압축과 단축은 있어도 생략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서양의 역사에서 탄생한

제도를 올바로 이식해 운용하려면, 서양이 걸어온 '정상적인 궤도'를 기본 축으로 삼고

어떻게 하면 고통과 부작용을 줄이면서 그 행정을 단축할 수 있느냐에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역사에는 지름길이 있을 뿐, 결코 비약은 없다"

 

이 책은 이러한 역사인식의 토대위에서 한국사회, 한국역사에 대하여도 핵심적인 사유를

제시한다.

 

조선의 문제, 통일의 문제, 신자유주의 문제 등에 대하여도 일관된 관점과 깊은 사유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세계의 역사에 대하여 아니 우리 인간이 어떻게 문명을 이루고 태초 이래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 또한 앞으로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대하여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충분히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데에 매우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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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제3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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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군주론] -

 

군주론을 읽기전에 먼저 이해하여야 할 내용이 있다. 근대 혹은 현대로 불리는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근대라는 개념(모더니티)은 기존 서구에서 갖는 개념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엄청난 변화를 불러 일으킨 개념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우선 이렇다.

 

1. 모더니티는 공통된 언어와 전통에 기초를 둔 단일 민족국가의 성립을 탄생시켰다.

2. 모더니티는 인간의 문제에서 이성의 권위를 가장 우위에 두었다.

3. 모더니티는 대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는 데 무엇보다도 자연 과학의 권위에 의존하였다.

4. 모더니티는 삶과 자연 현상을 탈신비화 시켰다

5. 모더니티는 모든 개인의 천부적 권리, 그 가운데서 특히 자유와 자기 결정의 표현 에 대한 권리 인정하였다.

6. 모더니티는 자유 시장 경제 제도를 도입하고 그것에 수반되는 임금 노동과 도시화 그리고 생산 수단의 개인 소유를 적극 장려하였다.

7. 모더니티는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굳게 믿으면서 관용, 동정, 사려분별, 자선 등과 같은 기독교적 휴머니즘에 기초한 다양한 덕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위에서 1은 종교전쟁을 겪은 후 1648년의 베스트팔렌조약을 통해 유럽의 각 나라가 국민국가로 재편성하게 되면서 나온 것이고 2~5는 데까르트와 칸트등을 통해 신의 뜻에 따라 구성되고 존재하는 세상을 인간이성으로 보는 것으로 근대를 열어 젖혔으며 6의 내용은 로크의 통치론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사유재산의 중요성과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이 기존의 봉건질서를 해체시켜나갔으며 ‘개인’의 문제가 신분과 특권의 구 질서를 대체하여 나갔다.

 

따라서 근대의 개념은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신’으로부터 ‘인간’ 특히 인간 개인의 이성으로 치환시켜 나간 개념이다.

 

여기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갖는 의미는 인간사의 ‘정치’라는 영역에서 너무나 커다란 영향을 키친 신개념을 인류에게 제공하고 이후의 인간역사에서 정치의 개념을 바꾸어 나간 것이다.

 

그럼 마키아벨리 이전의 정치개념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대표적인 것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다. 이들의 생각은 정치는 훌륭한 정치인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훌륭한 정치인은 지혜로운 자이어야 하며 이는 인격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이어야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 닦아서 일정한 정치공동체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이러한 사람이 정치를 통해 나라와 인간을 다스려야 그 공동체가 잘 살게 된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로 이해되는 정치철학이다. 공자는 인(仁)의 정치를 강조했고 맹자는 왕도(王道)즉, 덕(德)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맹자의 양혜왕편에서 나온 이(利)의 정치가 아니라 덕(德)의 정치의 강조는 바로 통치자가 스스로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왕은 신하들로부터 끊임없이 경연과 학습을 통해 왕 스스로 덕을 쌓고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다.

 

이를 통해 마키아벨리 이전의 정치는 ‘권위의 정치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스리는 자가 인격적으로 완벽한 권위를 갖게 되며 그 권위를 통해 통치받는자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후의 정치 또는 동양적 사고의 정치는 이러한 믿음이 정치라는 것에 깊이있게 스며들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동양에서한비자등 제자백가의 사상중에는 마키아벨리적 사고방식을 주장한 사람도 있었지만 실제의 정치현실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은 공맹의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여기에 커다란 메스를 들이대었고 이후의 세계역사에서 정치라는 것은 모두 마키아벨리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우선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상황의 필요에 따라서 선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군주론 15장 페이지 105-106 까치, 이하 페이지만 표시)

 

즉,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나아가 마키아벨리는 몰랐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와 맹자까지도 주장한, 훌륭한 덕을 가진 정치인보다는 현실에서 존재하는 정치인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럼 현실에서 존재하는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마키아벨리는 무엇으로 이야기 하였을까. 크게 두 가지를 강조하며 이것을 갖추지 못한 군주는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그 두가지는 첫째 무력이고 둘째는 설득력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의 무력을 마키아벨리는 군대 특히 자국민으로 구성된 군대를 강조하였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경찰, 군대, 법률, 제도등이고 둘째의 설득력은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이다.

 

위 두가지 즉, 무력과 설득력이 합쳐져서 헤게모니라는 개념이 나오게 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키아벨 리가 사용한 개념인 비루투(virutus)이다. 이것은 함께 사용한 포루투나(fortuna)의 개념과 함께 사용하였지만 제일 중요한 개념이다. 예전에는 이 말을 ‘미덕’으로 표현하였지만 이제는 ‘역량’으로 표현하여야 가장 근접한 단어가 된다.

 

기존의 정치철학에서는 ‘훌륭한 덕’이 가장 중요한 정치가의 자질이었다면 마키아벨리는 ‘역량’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훌륭한 덕’과 ‘역량’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도덕’에 대한 태도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도덕은 정치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이지 않더라도 군주가 권력을 유지하고 권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만 있다면 도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한다.

 

다시 한번 마키아벨리의 말을 보자.

 

“악덕 없이는 권력을 보존하기가 어려운 때에는 그 악덕으로 인해서 악명을 떨치는 것도 개의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일견 미덕으로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는 반면, 일견 악덕으로 보이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고 번영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페이지 107)

 

아마도 이 구절 때문에 마키아벨리가 악을 강조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정치와 도덕을 분리하는 마키아벨리의 사고에는 정치체제가 외세에 의해 침략을 당하거나 체제 내부가 불안하게 흔들려서 체제 내의 사람들의 삶이 곤궁하고 피폐해지는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도덕의 강조보다는 어떻게 체제를 안정시키며 그 안의 사람들이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느냐를 강조하게 되면 정치는 정치 그 나름의 논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도덕과 정치의 분리를 마치 부도덕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마키아벨 리가 말하는 도덕과 정치의 분리는 정치를 부도덕적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도덕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며 부도덕과도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마키아벨리를 혹자가 독재자를 옹호하는 논리라고 비판하는 측면도 받을 수 있겠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철저하게 군주가 위와 같은 정치를 통하여 공동체의 안녕과 공동체구성원의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였지 독재자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군주는 미움을 받더라도 경멸을 받으면 안되며 “ 미움을 받은 일은 타인에게 떠넘기고 인기를 얻는 일은 자신이 친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페이지 128)한 것을 보면 억압과 폭력을 통한 통치보다는 국민들이 믿고 따르는 설득력을 더욱 강조한 것이 독재정치와는 분명히 다른 면을 보여준다. 이 설득력이 바로 역량이며 비루투이다.

 

물론 이러한 면면들이 현대에 와서 재해석하다보니 현대의 정치가들의 모습에서 실망되는 모습의 원조가 마키아벨리라고 오인할 수 있는 내용이 책의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책이 16세기 초에 나온 점을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정치에서 나타나는 도덕을 빙자한 부도덕과 정치를 빙자한 폭력의 난무함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사람이 사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한 마키아벨리의 고민이 엿보인다.

 

역설적으로 마키아벨리를 비판하면서 마키라벨리를 따르고 있는 현대 정치, 다시말하면 지금의 현대정치는 마키아벨리의 영향력하에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마키아벨리는 “권위의 정치학”의 시대, 즉,고전적 덕의 세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덕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현실세계에서의 냉혹한 ‘권력의 정치학’의 토대를 깔아놓았던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의 역량으로 무력과 설득력을 겸비한 자가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정치공동체의 안녕과 국민들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라는 것을 우리 인류사에 처음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과학의 발전, 종교개혁, 국민국가의 탄생, 자본주의의 발전등과 더불어 정치에서 근대를 열어젖힌 마키아벨리, 군주론이 갖는 근대적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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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충격 - 테크놀로지와 함께 진화하는 우리의 미래
케빈 켈리 지음, 이한음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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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팔 원숭이가 있다. 나무 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반 원숭이의 팔로는 나무와 나무사이를 원활하게

건너다니기가 어렵고 먹이를 취하기가 어려워서 팔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진화'의 결과로

이야기 한다. 이외에도 많은 동물과 식물등 지구상의 생명체는 자기 존재의 유지와 번식을 위해

그 존재의 색을 바꾸거나 존재의 일부를 변형하여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떠한가.

저기 멀리 있는 물건을 잡기 위해서 팔을 늘릴것인가?

냄새를 잘 맡기 위해서 코끼리처럼 코를 길게 할 것인가?

나무를 잘 자르기 위해 손을 도끼처럼 연마할 것인가?



인간은 그렇게 진화하지 않았다. 인간은 신체의 일부분을 변형하지 않았다.

인간은 대신 도구를 사용하여 멀리 있는 물건을 잡거나 나무를 자르기 위해서 도끼를 만들었다.



이렇게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고고학적 사실로 미루어보면

인간이 진화를 거듭하여 약 5만년전에 지금의 신체형상을 갖추고 난 후 '언어'가 만들어지면서

비로서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문명'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은 진화를 몸이 아니라 외부를 인간에 맞게 변형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옷은 인간의 확장된 피부, 바퀴는 확장된 발, 카메라와 망원경은 확장된 눈이라

할 수있다. 요리는 보조 위장역할을 한다. 아니 요리는 이빨과 턱 근육이 더 작아질 수 있게 하고

더 많은 종류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 주는 '인공 기관'이다.



이러한 인간의 발명품과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모든 기술과 기술적 지식전체를

저자는 '테크늄'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그 이유는 이 테크늄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의 의지와

선택과는 별도로 자기 스스로 변화하고 진화한다는 것이다.



전화나 전기, 미적분학이나 자동차와 비행기등 인간이 만든 모든 발견과 발명품들은 어느 한 사람의

독창적인 것이 전혀 없이 또는 서로 연관되거나 상호 도움도 없이 각각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사람이 독자적으로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사례가 너무도 흔한 예를 들면서 기술의 발전 ,

즉 테크늄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말한다.



"철도와 전기 모터를 생각할 때, 전차가 등장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 아닐까? ....

동등한 발명이 동시에 독자적으로 발견되는 사례가 흔하다는 것은 기술의 진화가 생물학적 진화와

같은 방식으로 수렴됨을 시사한다."



저자는 이에 대한 입증을 위해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테크늄을 시원세균, 세균, 원생생물, 곰팡이, 식물, 동물 등

여섯 가지 생물계에 이은 일곱 번째 생물계라고 규정한다. 이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의 의지와

선택으로만 제어되지 않고 그 자체의 발전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테크늄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방법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원자력의 힘을 발견한 이후 인간은 인간을 파멸시키는 원자폭탄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원자력 발전사이에서 계속 긴장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이러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특히 현대 컴퓨터 기술의

발전은 권력자가 국민 모두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고 관리할 수 있는 단계까지 진행되어 '빅 브러더'의

출현이 소설속의 이야기가 아닌 실제의 가능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기술 자체가 오히려 인간에게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면 저자가 말하는 테크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저자는 "오늘날 우리 삶은 기술이 많을수록 좋다는 관점과 굳이 쓸 필요가 없다는 관점, 두 가치관 사이의

심각하고도 끊임없는 긴장에 사로잡혀 있다'며 전자의 관점을 대표하는 두 사례를 든다.



하나는 일체의 현대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자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미시파의 생활방식과

또 하나는 기술자들에게 소포폭탄공격을 통해 현대 기술세계를 끝내자는 주장을 한 '유너버머'의 입장을 자세히 설명한다.

저자는 이들이 잘못된 관점을 가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기술에 대하여 갖는 이들의 관점은

그 자체로 타당하며 일리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자동차사고로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하여 자동차를 없앨 수는 없듯이

기술의 발전은 그 자체로 이미 되돌릴수 없는 불가피성이 있다고 한다.



저자의 말은 이렇다.

"역사 대부분의 순간에 대다수의 사람은 풍요로운 문명에서 축적되고 있는 가능성의 더미가 사람들을

더 낫게 만든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문명, 기술을 만드는 이유이다.'



따라서 인간은 기술의 아니 테크늄의 자기진화를 인간의 삶에 더욱 풍요롭고 행복함을 더하는 방향으로

기술을 선택하고 조율하고 테크늄과 함께 더불어서 살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이는 인간 역사가

끝이 보이지 않는 진보의 길을 가는 증거라고 한다.



이 책은 진화에 관한 다양한 입장과 사례를 통해 테크늄의 진화를 대비하여 설명하면서 인간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는 기술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을 마지막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일면 타당하고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다.

지금 우리에게 아미시파처럼 전기없는 생활, 자동차 없는 생활을 하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쇄술의 발전을 부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문제는 저자의 주장처럼 진화하는 기술자체가 아니고 그 기술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조직체 즉, 정치체제가 문제이다. 원자력에 대한 결정권을 지닌 권력자 내지

원자력을 이용하여 이윤을 얻고자 하는 자본의 문제가 아닐까?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본은

생명과학을 통하여 유전자조작식품을 만들고 의학과 의약품의 개발에 돈이 되지 않으면 전혀 개발하지 않는

것을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지구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현재의 지구인구를 충분히 먹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0억이 넘는 인구가 굶주림에

고통받고 죽어가는 현실은 식량생산기술의 발전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분배하는 정치경제적 구조가

문제라는 것을 저자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다.



말라리아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서는 말라리아 예방약과 모기장에 몇백억원이면 충분한데도

이것이 기술이 부족해서 일까.



결국 기술 아니 저자가 말하는 테크늄의 발전은 그것을 잘 관리하고 선택하고 '살살 구슬려서'-저자의 표현-

함께 인간이 테크늄과 더불어서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 노력하자는 결론으로는 너무 빈약하게 보인다.



문제는 이 테크늄이 어떻게 정치경제적 관계를 통해 인간의 삶이 규정되고

특히 자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시대에 테크늄과 자본의 관계를 풀어 헤치는 것이

더욱 저자가 말하는 제7계인 테크늄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잘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인간의 삶에 아무리 유용해도 이윤이 보장되지 않으면 개발되지 않는 기술, 또는 그러한 기술이 있어도

이윤이 보장되지 않으면 보급되지 않거나 설사 보급되더라도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보급되는 기술은

기술자체의 불합리가 아니라 인간의 사회구조에 문제의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타당하지 않을까.



유나바머가 주장한 현대문명으로 인한 인간의 예속적 삶을 비판한 것을 옳았다고 하면서 그래도

기술을 잘 관리하자고 하는 주장은 너무 평이하다.



다만 기술이 갖는 자체발전에 대한 관점이나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독특하게 해석한 것은 기술에 대한

시야를 넓히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다만 거기까지.



기술의 충격/케빈 켈리/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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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성생활 지침서 (양장)
자미에 왁스먼 & 에밀리 모스 지음, 김광우 옮김, 벤저민 바헨예 그림 / 시그마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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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욕망의 진화사'라는 책에 보면 남자와 여자는 그 자체의 유지보다는 종족의 번식에

더 큰 존재의 의의를 찾는다고 한다. 인간 종의 번식을 위해서는 남녀의 섹스밖에

그 방법이 없다. 또한 종족번식에는 남녀의 진화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는 더 좋은 유전자를 받으려고 여자의 성(性)을 일종의 무기로 삼아

남자를 고르게 되고 남자는 어떻게든 많은 유전자를 뿌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의 바람기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유전자적 존재라고 하며 여자는

피동적인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물주가 인간을 꼭 그렇게 종족번식의 의무만의 지웠을 경우에는

아마도 인간의 남녀가 그런 행위를 아마도 거부하였을 거라 생각된다.

 

즉, 성적인 결합에서 오는 쾌락과 기쁨없이 섹스를 종족번식의 도구로만

인간이 이해한다면 아마도 인간 종은 벌써 그 번식을 유지하지 못해

멸종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섹스가 원초적으로는 종족번식의 의무가 있지만 그 의무를

다하는 과정에서 반대급부로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섹스자체에서 오는 쾌락과 기쁨 또는 사랑의 완성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남녀의 섹스를 종족번식의 도구로만 , 또는 일종의 의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자체가 갖는 즐거움을 느껴보라는 충고이다.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거나 느끼더라도 약간의 죄의식을 갖는다거나 아니면

그 자체를 거부한다거나 하는 섹스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해 나가라는 방법론이다.

 

이 책은 처음 만나서 섹스를 하기 전의 상대방의 몸에 대한 터치부터 다양한 애무와

섹스의 체위를 어떻게 하면 더욱 즐거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일단 외설적인 느낌이 들지 않도록 사진보다는 그림으로 보여줌으로써

지침서의 내용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부부나 연인사이에 다양한 사랑행위의 시도변화로

사랑하는 감정을 더욱 다질 수 있게 만든다.

 

이 책을 보면서 대화와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일방적인 섹스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신비적이고 황홀경에 이르는 느낌을 이끌어내준다면

성이 주는 행복은 서로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섹스가 단순한 종족번식의 수단만이 아닌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는 일, 그것조차 없다면

인가의 섹스는 단지 동물적 교미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섹스는 남녀간의 사랑을 더욱 깊고 오래가게 만들것이며 각자의 삶이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가를 몸으로 느끼게 해줄 것이다.

 

 

설혹 사랑의 행위를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이 책을 통해 섹스가 얼마나

멋진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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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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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나이 60이 되었을 때 불치병이 걸리자 한 살 많 더 많은 남편은 아내를

보살피고자 직장을 그만 두고 아내를 간병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24년을 보살피다 2007년 9월 22일 그는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하였다.

당시 아내의 나이는 83세, 그는 84세였다.

 

아내의 이름은 도린(그래서 D에게 보낸 편지라 하였다), 남자는 앙드레 고르.

 

아내를 보살피던 막바지에 그는 아내에게 편지를 하나 쓴다. 그 편지는 장장 80페이지에

달한다.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이유는 이렇다.

 

"내 생각에는 어릴 때 좋은 아버지를 두었던 사람이 나중에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아버지가 되기 어렵다.......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도린이 아이에게 쏟는 사랑을 질투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

 

이 편지는 둘이 어떻게 처음 만났고 어떻게 서로 사랑했으며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를

자세하게 쓰면서 아내에 대한 사랑을 절절히 말하고 있다.

 

남자의 벌이가 그리 대단치 않았음에도 여자는 남자를 믿고 글쓰는 것을 격려하였으며

생활전선에서 가정경제를 이끌었다. 여기까지면 대기만성형 남편을 여자가

거두어주었으리라 생각된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남자는 여자의 격려를 먹고

자란다고 하지 않는가. 그걸 기다리지 못하는 여자도 많지만....

 

남자는 여자의 격려에 힘입고 여자의 사랑에 안정을 찾아 사르트르로부터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경제 전문기자이자 탐사취재의  대가로

6~70년대 프랑스와 유럽, 미국을 아우르는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대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는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만큼 자신은 그 만큼 아내를 대하지

못했다고 고백하며 자신을 자신이게끔 만들어주는데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

바로 아내라고 토로한다.

 

그래서 이 편지는,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로 시작하고,

 

마지막은,

 

"당신은 내게 당신의 삶 전부와 당신의 전부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동안

나도 당신에게 내 전부를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면서,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로 끝을 맺는다.

 

흔히 하는 말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이곳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통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이 편지의 시작과 끝의 내용은 절절한 사랑의 표현이지만 그 중간의

내용은 남자가 여자에게 받은 구체적인 격려와 사랑의 내용, 여자의 사랑을

잘 몰라보았던 자신에 대한 반성등이 있기에 조금 지루한 점도 있다.

 

남자는 나이가 들어서 철든다고 하는데 바로 이 부부를 말하는 거 같기도 한 것이

위 편지내용의 중간부분을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것이 남자의 자서전인데 그 자서전에

아내에 대한 내용이 거의 없고 몇줄로 간단하게 집어넣은 그 몇줄도

다시 부정하는듯한 표현을 하였기에 그렇다.

 

이 편지를 통해 그것을 반성하면서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아내의 공이라는 것을

죽음앞에서 편지로 쓰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사랑앞에서 여자는 위대하고 남자들은 철부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럼에도 그것을 깨닫고 아내를 24년간이나 간병하면서 60세 이후의 삶을

온전히 아내에게 바친 남자는 그래도 여자가 사랑할 만한  가치는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시대에 도린이 사랑할 앙드레 고르같은 남자가 얼마나 있을까.

 

그러니 여자들이여 혼자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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