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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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주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하게 만든 책이었다. 아니다. <장자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이 먼저였는지도 모른다. 암튼 이 책은 철학의 문학적 접근에 끌려 읽었다.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말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진짜 집과 암호에 대한 생각을 잊게 되었습니다. 철학자 아도르노의 이야기를 음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저 <부정변증법>에 등장하는 구절이었을 겁니다.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물쇠들을 여는 것과 같고, 그 열림은 하나의 개별적인 열쇠나 번호가 아니라 어떤 번호들의 배열에 의해 이루어진다."라는 취지의 생각이었지요."

 "막상 살아가다 보면 어떤 문도 열지 못하는 나약한 상태라는 것을 종종 깨닫게 됩니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암호를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알려주는 암호로는 우리가 들어가고 싶은 문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먼저 암호를 다양하게 배열해서 문을 열려고 했던 작가들의 분투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습니다."

 

 바로 지금이 그런 때 중의 한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는 이즘이.

 

 책은 '이성복과 라캉'에서 시작하여 '허연과 까뮈'까지 열 네 개로 이루어져 있다. '프롤로그'에서 라흐마니노프 연주회에 갔었던 일화를 들려준다.

 

 "...집중은 자신을 떠나서 관심을 가진 무엇인가로 건너가는 상태니까 말입니다. 영어로 관심이나 흥미를 뜻하는 'interest'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사실 이 단어는 '사이'를 뜻하는 라틴어 '인테르inter'와 '존재함'을 뜻하는 '에쎄esse'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이에 존재함'으로써 'interest'는 나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집중은 바로 내가 나와 어떤 타자 사이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집중의 상태는 완전히 나로 머물러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타자로 건너가서도 안 됩니다."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고유명사'의 학문입니다.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들은 자기만의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노래하거나 논증합니다. 그들의 시와 철학에는 유사성은 있지만 공통점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김수영의 시와 신동엽의 시, 그리고 바흐친의 철학과 바르트의 철학이 유사하지만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시인과 철학자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데 성공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들의 궁극의 유사성은 바로 그들이 자기만의 제스처와 스타일을 완성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블로그로부터 시작해서 여기 서재까지 오면서 생각했던 일도 그렇다. 수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글들, 과연 나는 어떤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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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그라피아 - 위대한 작가들의 창조적 열병
앨리스 플래허티 지음, 박영원 옮김 / 휘슬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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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쩌면 나와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 심지어 내 머릿속과 꿈속 일들까지도 깔끔하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앞 여백에 쓰여 있는 내 조각글이다.

 김정운의 책을 읽고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생각나서 책을 펼쳐보니 온통 책갈피 표시 띠지가 빽빽하게 붙여져 있다.

 

책 시작 전에

"창조적인 작가란 다름 아닌 글쓰기에 문제를 겪는 사람이다. -롤랑바르트르"

라는 한줄 글이 쓰여 있다. 그리고 서문 '창작과 정신병, 그 치명적 만남에 대하여"에서 작가는 쓰고 있다.

"글쓰기는 인간이 이룩한 가장 뛰어난 업적이다."

"글은 우리로 하여금 특이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나는 지치도록 글을 쓰는 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위로가 되었다. 서문의 꼭지글 '한밤중에 걸리는 신성한 질병, 하이퍼그라피아'에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사하도록 만드는 힘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두뇌이기도 하다. 다빈치의 정교한 손동작에서부터 아름다운 대상을 바라보는 인지능력에 이르기까지 두뇌의 많은 부분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 중에서도 미적 표현에 대한 심리적 욕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위가 있다.

 그 첫 번째가 귀 뒤쪽에 위치한 한 쌍의 측두엽이다...창조적인 글쓰기와 놀랄 정도로 큰 연관성을 가진 두 번째 뇌 부위는 변연계이다...측두엽과 면연계는 문학이 아닌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미적 욕구의 밑바탕이 된다...

 글쓰기에 대한 나의 정열과 함께 이 책에는 의사라는 내 직업적 특성도 반영되어 있다. 나 자신이 하이퍼그라피아를 직접 겪었고 그 경험은 내 환자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하이퍼그라피아는 질병인 동시에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경험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이라고 밝히고 있다.

 글쓰기를 멈출 수 없거나 나처럼 지칠줄 모르고 글을 쓰는 이들에게 탐독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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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바다 위를 유영하던 비행기가 제주 공항 위에 떠서 착륙 준비를 할 때였다. 비행기 창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다가 그만 활주로가 있는 허허벌판에 반해버렸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망망대해와도 같은 벌판을 내가 한때 꿈꾸던 몽골의 초원과 다르지 않았다. 까무스러한 작은 점이 비행기와 가까와지자 활주로를 안내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원양어선의 항해사를 꿈꾸듯 활주로 안내인으로라도 활주로를 누비고 싶었다. '아, 활주로는 텅 빈 벌판이다.'

 

 제주 풍경의 결

 

 "사물(事物)을 보는 나의 눈은 나의 밖에 있는 사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동시에 본다."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언덕 또한 어마무지하게 좋아한다는 것을. 어쩌면 언덕을 좋아해서 이렇게 오름을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이 대단한 사실을 종달초등학교 가는 언덕길에서 알아낸 것이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다시 살아난 듯 들떴다. 양팔을 벌리고 활주로를 날아오르는 비행기가 되어 골목길을 달음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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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달초등학교 가는 길에서 만난 언덕

 

 

 "우리들이 모든 소유로부터 참으로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지막 소유, 즉 우리의 마지막 비밀은 간직되지 못한다. 그러나 참으로 떠나는 것은 두렵다. 몸이 떠난다고 해서, 늘 풍경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낯선 공간으로 이동하는 공포, 몸에 익은 공간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자의 공포이다. 이 공포는, 말은 쉬우나 쉬 극복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공포는 아마도 정신적 공포가 아니라 몸의 공포일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두뇌가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공간이 사실은 우리들의 살 속에 새겨져 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세계, 살이 담도 있는 공간을 우리는 떠나면서도 끌고 가기 쉽다."

 

 마을 중심도록 옆의 나무 뒤로 비스듬히 놓인 검은 안내석이 보였다. "옛날 종달리(終達理)는 유명한 소금 생산지로 알려졌다."로 시작해서 선조 때 육지에서 제염술을 익혀와 소금을 생산하고 90년대까지는 논농사를 짓다가 폐작되었다는 내용이다. 논이었던 곳은 누런 갈대가 수북하게 자라나 지나가는 겨울바람에 서걱거렸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달팽이 같은 데를 가지고 있다. 떠나면서도 항상 '저의 집'에 살고 있는 그 완만한 동작의 달팽이를 가만히 지켜본 일이 있는가? ...달팽이에게는 집이 따로 없다. 그의 일부가 그의 영원한 집이다. 그러나 우리들 몸이 기억하는 풍경은 저기 어느 곳에 따로 있고 그 풍경이 떠나 있는 우리들을 그곳으로 끌어당긴다...그러나 달팽이는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저의 집' 속에 살고 있고 어디를 가나 저의 고향, 저의 조국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집은 주소가 없다. 그래서 달팽이는 쉬 떠나지 못하는 붙박이, 겁 많은 여행자보다 유랑하는 유목민이나 집시나 남사당 같은 이들에게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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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에서의 둘째 날, 늦은 점심을 먹고 - 혼자 지내는 4박 5일 동안 주인집 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는 호강을 누렸다 - 민박집 골목을 나섰다. 최근에 명소가 된 집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새마을 운동 때 지은 집들처럼 빨강 파랑 지붕의 단층집들 사이사이에 다소 엉뚱하게 자리 잡은 도예품 가게, 카페, 게스트하우스, 술집, 서점...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먼저 도예품 가게에 들러 여행기간 동안 쓸 커피 잔과 소주잔을 눈으로 점찍어 놓고 가게를 나섰다.

 아직 영업전인 술집은 전날 밤 창 너머로 봤기에 사진으로 담았다. 발걸음을 옮겨 카페로 갔다. 밖에 세워진 메뉴판을 읽어보다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다른 곳'은 공간에 있어서의 미래이다. '다른 곳'과 '내일' 속에 담겨있는 특정할 길 없는 잠재력은 모든 젊은 가슴들을 뛰게 한다.

  떠난다, 문을 연다, 깨어 일어난다, 라는 동사(動詞)들 속에는 청춘이 지피는 불이 담겨있다."

 

 김화영은 알고 있었던 그 동사의 의미, 쉰 넷의 나 역시 청춘인걸까. 위의 동사들을 눈으로 읽는 순간 목구명이 꽉 막혔다. 비행기가 공중을 사광斜光처럼 날아오를 때, 내 눈시울이 뜨거웠던 것도 그래서였구나하고 깨닫는다.

 

민박집 1월 풍경

 

 "우리들이 참으로 '떠난다'는 일은 쉽지 않다.... '미지(未知)의 것', '다른 것', '다른 곳'이 감추고 있는 '새로윰'은 참으로 우리들의 모든 유익하였던 경험들을 무용(無用)하게 하는데 그것의 힘이 있다. 행복을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새로운 낙원을 향하여 떠나는 자는 사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 그 공포를 지불하는 순간에 진동시키는 놀라움을 향하여 떠나는 것이다."

 

구불구불한 제주 특유의 구멍 숭숭 돌담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올라섰다. 지붕 선을 따라 눈길이 죽 가다가 멈춘 곳은 한라산이다. 십여 년 전 겨울에 왔을 때, 어디에서라고 제주 한가운데로 눈을 들면 정수리에 흰 눈을 쓴 한라산이 인심 좋은 할아버지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이 곳 종달리에서는 흐릿하게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덕을 내려와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골목길에서 양팔을 벌렸다. 소리치며 달리고 싶었지만 우적우적 웃음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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