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의 추위가 물러가고 겨울 속의 봄날이다.

 조종사의 솜씨인지 날씨 덕분인지 저가항공 비행기가 아주 날렵하게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맨 뒷좌석이라 크게 흔들릴 거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이륙 순간 멀미와 함께 왈칵 눈이 뜨겁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덤덤했다. 이럴 것 같으면 굳이 여행길에 오르지 말까싶은 정도였다. 눈물이라니...혼자 여행하기. 더 늙기 전에 해보고 싶었지만 채 늙기도 전에 마음을 접었던 일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한라산

 

 여행을 떠나기 전 가장 고민한 일 중 한가지는 무슨 책을 가져가는 가였다. 책장이 있는 방을 오가며 읽지 않은 책을 가져갈 것인가, 읽은 책 중에 고를 것인가를 먼저 결정하기로 했다. 딱 한 권이면 된다. 읽지 않은 책 두 세 권을 뒤적거렸으나 확 내키지가 않았다. 식탁에 앉아 읽은 책 중에서 다시 읽고 싶은 책을 머릿 속으로 검색했다. 뭐 대단한 다독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책을 읽어왔다. 가장 열독한 시기는 이십 대였다. 그리고 작년 한 해 동안 꽤 많은 책을 사기도 하고 읽기도 했다.

 내게는 책을 빌려 읽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기도 하고, 여백에 조각글을 써가며 읽는 버릇 때문이다. 가난한 이십 대에는 주로 문고판을 사서 읽었다. 책에 한 번 꽂히면 읽는 동안 밀교에 빠져들듯 미쳤고,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듯 책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읽은 책들은 굳이 두 번 읽을 이유가 없었다. 여태까지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영혼에 무늬로 새겼다고나 할까. 대부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만 읽다 중도에 포기한 책은 실연당한 것 마냥 두 번 다시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세 번 읽은 책으로 언뜻 떠오른 것은 알베르 까뮈의 <결혼/여름> 중 '결혼'과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였다. 릴케의 <로댕>도 떠올랐다. 다 접고 김화영의 <행복의 충격>을 흔쾌히 망설임 없이 여행 가방 옆에 챙겨놓았다. 얼마 전에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를 읽다가 책장 어디쯤에 있을 그 책을 찾았다. 1989년에 <책세상>에서 초판 1쇄 인쇄/발행된 책이다. 후루룩 넘겨보며 줄친 부분과 여백의 조각글만 찾아 읽다가 그만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아 책날개의 작가 소개 글, '저자의 말'까지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 펼쳐본 책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생소했다. 영혼에 무늬로 새겨져 있을 거라고 여겼던 내 생각에 일격을 가했다. 첫 편인 '지중해, 나의 사랑'을 읽으면서 연필을 들고 밑줄을 그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어야 할 판이다. 읽던 책을 마저 읽고 나서 날 잡아 정독하기로 하고 안방 책상 위에다 올려놨던 바로 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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