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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잉 홈
문지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지혁 작가의 『고잉 홈』은 비행기 한 번 타본 적 없던 나를 덩그러이 미국 한 가운데에 놓아두고는 홀연히 끝이 난다. 『초급 한국어』와 『중국 한국어』로 부터 이어지는 '헤이코리안 플롯'(「해설-슬픔의 생애」)은 한국을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이들에게도, 즉 자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귀착의 장소를 찾아 떠나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쉽게 공감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고잉 홈』은 급성 패혈증으로 쓰러진 장인어른 호철을 보러가기 위해 한국행 비행기 오른 사위 브래드의 여정을 담은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 뉴욕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상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가난한 배우지망생 「고잉홈」, 결혼기념일을 맞이해 방문한 호텐 '돈 세사르'에서 벌어지는 판타지적이고 어쩌면 음울한 현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핑크 펠리스」, 다시 한번 혼자가 되어보기 위해 디즈니월드로 떠난 에밀리의 그의 삼촌 「크리스마스 캐러셀」, 김치찌개가 묻은 바지로부터 시작된 두 가지 인연 「골드 브라스 세탁소」, 맹선생님에 대한 추모와 애도 그리고 만남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 「뷰잉」, 새해 저녁에 일어난 부상이 만들어낸 다사다난한 신년 맞이 「나이트호크스」, 목회자로서 현실과의 괴리를 느끼는 늘봄의 「뜰 안의 볕」, 지적장애인인 아버지를 찾는 여성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파이널 컷」이 담겨 있다.
본래 문지혁 작가가 『고잉 홈』의 표제작으로 염두에 두었던 작품은 「뜰 안의 볕」이었으나 편집자의 권유로 「고잉 홈」을 표제작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고잉 홈(going home)'은 '집으로 가다'라는 의미와 함께 또다르게 이야기 하자면 '집으로 돌아가다'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귀환의 플롯'과 '도피의 플롯'(「해설-슬픔의 생애」)에서 의미의 뜻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뉴욕으로 돌아갈 돈 조차 없어 수상한 아르바이트에 임하게 된 '나'는 AI자동차에게 살아있는 '소스'로 활용된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는 전부 거짓말로 지어낸 이야기였다. 손 안에 쥐고 있던 종이 유니콘을 두고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뉴욕에 내려 더 이상은 유니콘을 되찾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배우로서 성공한 삶을 꿈 꾸며 도착한 미국이었지만 궁핍한 생활에 불확실한 미래. 불안정한 모든 것에 불안해 하며 속에 품어두었던 희망적인 꿈이 결국 자신의 헛된 상상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는 진짜 유니콘을 봤다."(p.46)을 통해 모든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호한 상태에서도 그가 꿈꿔왔던 미국의 삶이 아니더라도 그의 선택 자체에는 의미가 있음을 암시한다. 뉴욕을 향하는 AI자동차는 그가 상상했던 미래지향적인 삶이 아닌 자신이 돌아갈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는 귀착점을 향한 여정이었던 것이다. 그가 도착한 장소가 뉴욕이든 한국이든 그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종이 유니콘은 진짜 유니콘이 되어 그는 결국 자신의 선택에 의해 어떠한 삶을 살아낼 것이라는 결심이 되었기에. 어쩌면 귀환과 도피는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
「뜰 안의 볕」은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간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도전 자체 보다도 도전 이후의 안정된 삶이 선택지가 되어 나의 손에 들어왔을 때라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에 대한 내용이다. 늘봄은 목회자로서의 삶에 망설임이 생긴다. 보수적인 교회의 분위기와 퀴어로서의 정체성이 자신이 꿈 꿔왔던 '보통'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보였고, 망설임 자체가 배부른 소리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도 늘봄은 여전히 고민한다. 그러나 이웃주민들과 둥글레차를 나눠마시는 늘봄의 모습에서 이미 미국이라는 낯선 장소에서 본인도 낯선 이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었음을 깨닫고 이제는 모두와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를 살아갈 것이라는 긍정적인 암시와 함께 소설은 끝이 난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지 않는 늘봄에게 결혼은 안하냐고 묻던 전전도사와 유대인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건넸던 늘봄. 하지만 늘봄은 더 이상 유대인 이웃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를 건네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비주류에 해당하는 유학생, 사회에서 비주류에 해당하는 퀴어, 미국의 종교에서는 비주류에 해당하는 유대인까지. 그러나 이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그들의 만남은 인연이 되어 삶을 살아가는 데에 강력한 뒷받침이 되어줄 것이다.
가끔은 익숙한 장소에서 내가 마치 낯선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건 비단 소설 속 인물들만에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네모 반듯한 길 뿐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마저도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낯선 공간에서 무작정 헤매기만 하다 어딘가로 나아간다는 감각조차 없이 그저 계속 한 방향으로 걷고 또 걷는다. 온갖 복잡한 문제가 뒤엉켜 있는 현대 사회에는 이정표가 없다. 그렇기에 결국 길이란 내가 밟고 걸어가는 곳이 길이 된다. 누군가가 닦아놓은 반듯한 길만이 길은 아니다. 새로이 길을 개척해나가겠다는 소설 속 인물들의 삶에 박수를 보내며, 이제는 우리가 직접 선택하고 길을 찾아야 함을 문득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