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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선물 ㅣ 풀빛 그림 아이 10
크리스 반 알스버그 글 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원제목은 <Stranger>다. 이상한 가죽 옷을 입은, 말을 할 줄 모르는 남자. 그를 진찰하자 체온계는 고장이 나고, 단춧구멍에 단추를 끼우기가 어려운 듯 보였고(그림에서 그의 구두끈은
늘 풀려 있다), 수프도 처음 먹어보는 듯했다. 토끼들은
도망치지 않고 외려 그를 반기는 데다, 일을 해도 전혀 피곤해하지 않고 땀도 흘리지 않는다. 남쪽으로 가는 기러기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듯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그리고 그가 곁에 있는 것이 좋은 베일리씨 가족.
베일리 부부의 연주에 맞춰 나그네와 캐티가 즐겁게 춤을 추고 있는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이
장면에서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해하거나 긴장한 여느 때와는 달리 편안하고 행복한 미소와 춤사위를 보인다.
나그네가 어느새 한 가족이 된 것이다.
옮긴이의 글에서 나그네의 정체를 알아차릴 것 같지 않으냐는 데, 어쩜, 난 잘 모르겠다.
그가 수프를 후후 불자 캐티는 추위를 느꼈고, 초록색 나뭇잎을 힘껏 불자 놀랍게도 붉게
물들었다. 그는 누구였을까? 계절의 변화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그중 '가을의 신'이 아니었을까? 입김을 불어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달리다(속표지
그림 속에서 들판 위를 뛰어가는 사람이 보인다) 베일리씨의 트럭에 부딪치는 사고로 기억을 잃고, 베일리씨 가족의 보살핌 속에 즐겁게 지내다
보니 그곳만 아직도 여름. 그러다 문득 자신의 할 일을 기억해내곤
다시 본연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로 상상해봤다.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늦은 여름날이면 나그네는 베일리씨 가족을 찾아왔던 모양이다. 그래서 초록빛
여름이 일주일 더 지속되었고, 아쉬운 마음에 "다음
가을에 만나요"라는 메시지를 유리창에 남기고 떠나는 나그네.
베일리씨 가족이 매년 남들보다 여름을 조금 더 누리는 '나그네의 선물'은 산타클로스의 그것보다 반갑고, 그 어떤 선물보다도 근사하다. 호박들을 더 크게 키울 수 있는 건
덤이고, 해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을 추억할 수 있고, 자신을
기억하게 하는 센스 넘치는 선물이니 말이다.
옮긴이의 제목 <나그네의 선물>은
베일리씨 가족의 관점에서 조금 더 독자의 감성을 건드려 준다.
난 이 제목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는 <주만지>로 처음 알았다. 어릴 적 몹시 흥미진진하게 보았던 영화 <주만지>의 원작이 그의 그림책이었다니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더랬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봤지만 환상적이었던 영화
<폴라 익스프레스>도 이제 보니 그의 그림책
<북극으로 가는 기차>에 기반을 뒀다. 그림을
참으로 잘 그리면서도 이야기꾼의 재주도 겸비한 작가, 한 번도 받기 힘든 칼데콧 상을 무려
세 번씩이나 놀랍기만 하다.
베일리씨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때라, 계절이 더디 갔으면
하는 그의 바람을 신이 들어주신 건 아닐까? 딱 요맘때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난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때를 좋아하는데… 그러나 요즘은 봄, 가을이 너무 짧아져서 어릴 적 뚜렷했던 우리나라의 사계절이 그립다. 그래서 우리 곁에도 나그네가 왔음 싶다. 눈부신 이 계절을 일주일이라도 더 붙잡고 싶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