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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지음, 이승환 옮김 / 김영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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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놓은지가 어언 1년이 넘는 책을 이제서야 읽는다. 대부분의 나의 북리뷰는 구입하고 한참을 지나서야 올라가는 특징이 있는 듯하다. 경제학 관련 서적이니 한계효용이 한계비용보다 크니까 뭐 나쁠 건 없지만...^^
이 책은 숫자 울렁증이 있어 무관심했던 경제, 특히 실물경제에 대해서 뭔가 이해할 수 있는 안내서 쯤으로 여기고 구매를 했다. 사실 TV나 인터넷 뉴스 가운데 경제 관련 소식을 접하면 참 안타까운 심정으로 한글을 읽은 적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가진 경제에 관한 기본 개념이란 것이 그 옛날 중고등학교 시절 사회, 문화에서 접한 수요곡선, 공급곡선이 끝이 아니던가. 그게 누구의 이론인지도 모른 채 이렇게 당연한 소리를 왜 할까만 물었던 기억이 있다.

본서를 읽고 난 느낌은 경제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단순히 숫자 놀음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재화의 흐름에 대한 철학이라는 것이다. 경제학이 윤리학으로부터 분리된 역사가 겨우 200여년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국부론의 창시자인 애덤 스미스로부터 시작해서 합리적 기대이론학파를 아우르는 200여년의 경제학사를 통해서 저자는 경제학자들이 받고 있는 비난의 이유를 설명하는데 결국 경제학은 고정된 실체에 대한 연구가 아니기에, 지금 이순간에도 유동적인 실체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에 그들의 예측이 과학적 예측만큼 정확할 수 없는데서 따르는 당연한 결과라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들이 사라질 수 없는 것은 유동적인 실체에 접근하며 경제의 발달을 도모할 수 할 수 있는 지표는 과거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근거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고 지적한다.

나름대로 이 책을 읽고 난 경제학사의 결론은 정부와 경제 간의 긴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경제 발전의 하나의 관건이라는 것이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경제정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최소한의 피해를 감수하면서 최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정책이 현재로서는 가장 이상적이라고 하는데 난 왜 이리 씁쓸한지...

또한 경제 뿐 아니라 정치와의 관련성 속에서 접근한 공공선택학파의 이론은 정치가들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확인해 주는 것이어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기업가들은 이윤창출이라는 목적이 있고 정치가들은 이윤창출이 뇌물을 통해서만 가능하므로 대체 목적으로서 권력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권력 지향은 결국 정치가들의 세불리기를 통해서 이루어 지며 세불리기의 과정에서 기업과 결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생리가 이러할 진대 정치가들에게 국민을 위한 정치, 도덕적 가치에 기반한 빅토리아시대의 이상을 펼치는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거다. 이해가 된다. 개 중에는 정치의 본연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겠으나 대부분은 권력이라는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결국 문제는 자기 소명에 대한 철학의 문제라는 생각이다.

시대가 복잡해 질 수록 경제 변수가 많아지고 그 변수를 모두 고려해서 경제정책을 수립한다는 것이 결국 시대착오적인 정책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인 것 같은데 그래서 그는 다음세대에게 '확실성을 추구할 것을 가르치는 것보다 불확실성에 대한 대처법을 가르치는 것'이 현명하다고 지적한다. 일면 맞는 말인 것 같다. 불확실성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가르친다?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결국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불변하는 확실한 것을 가르치라는 말로 새기면 안될까? 혹은 불확실성 자체가 세상의 본성이므로 이를 인정하고 막 살라고 가르치라는 말인가?^^

예수 하버드에 오다, C S Louis vs Freud 모두 하버드대학 교양 과목을 책으로 묶어낸 것이고 두 책 모두 내용이 알찰 뿐 아니라 재미가 있었다. 이 책 역시 하버드 경제학 입문 수업의 내용이라 하는데 이런 수업만 듣고 있는 그 녀석들이 부럽기만 하다.

이렇게 책으로라도 접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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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 가장 나답게 사는 길은 무엇일까?
파커 J. 파머 지음, 홍윤주 옮김 / 한문화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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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장 나답게 사는 길은 무엇일까?

이것이 정말 나의 길인가?

이 책이 던지는 화두다. 나답게 사는 길...
다소 딱딱한 개념을 빌면 소명을 확인하고 이에 따라 사는 삶을 표방하는 팔머의 나지막한 외침이다.

파커파머(Parker J. Pamer)를 처음 접한 것은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소통 가운데서 영성을 논하는 다소 엉뚱한 시도여서도 눈에 띄는 책이었지만 마치 나우웬의 글을 통해 접하는 소위 마음 따스한 이야기 때문에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 책도 책꽂이의 다른 책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한 일년은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_-;;

이 책은 처음 접한 '한문화'라는 출판사에서 번역되고 출판되었다. 책의 껍데기는 꽤나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이는데 파머의 이야기의 근저에 깔린 기독교적 사상에 대한 두루뭉수리한 뭉개버림 때문에 다소 인상찌푸리는 번역들이 눈에 띈다.

'하나님' 대신 나름 가치중립적이라고 '신'이라는 번역어를 썼겠지만 수차례 파머가 밝히는 대로 퀘이커교도라고 한다면 오히려 '하나님'이 더 의미전달에 도움이 됬으리라 보여지며 그에 따른 수식어의 번역도 더욱 실감나게 됬으리라 생각한다.

좋은 책이니 그런 고려없이 번역되어 누군가에게 읽히더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베짱과 충정으로 출판한 것인가!!

그렇다고 번역한 홍윤주씨가 번역을 잘못했다는 말은 아님을 밝혀두어야 겠다. 다만 추측가능한 것은 홍윤주씨가 기독교인은 아닐꺼라는 사실정도다. 기독교계 번역가가 번역을 했으면 더 좋았을 법한 책이다.

내용을 보자면, 팔머는 소명은 외적으로 부과된 그 무엇이 아니라 내적 여정 속에서 드러나는 내면의 소리라 정의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것이 정말 나의 길인가를 의심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은 내 본성에 맞지 않는 다른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되어야만 하는 것과 내가 되고 싶은 것 간의 괴리에 대한 지적이다.
내 본성이 원하는 것을 하다가 소위 쪽박 차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사람에 대해서 그는 단호하다.

"한번 그 본성대로 살아보라."

기본적으로 그가 이야기하는 본성은 우리가 선악을 분별하는 이분법의 범주를 가지는 에고(ego)너머의 세계다.
그의 용어는 참자아다. 파머는 참자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하며 이 목소리에 순명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하게 한다는 것이다(이부분은 분명 검증이 필요하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처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융도 참자아가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기를 거부한 것을 보면...).

논리와 합리의 세계가 아니라 자연이 보여주는 역설의 신비를 그대로 인정하고 이에 따른 삶이 우리에게 더욱 좋은 열매와 의미를 건넨다고 말한다.

참자아의 목소리를 듣는 소명의 삶이 쉬운 길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적 여정을 포기하고 외적 과시에 열을 올린다. 외적 성과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고 조급해 하며 두려워하다,  죽음 앞에서 발악하며 스러져 간다.

읽어가며 느낀 것은 내적 여정을 운운하는 그의 논조가 참으로 융(Jung)을 닮았다.

몇번을 읽어야 행간의 의미가 충분히 삶으로 녹아내릴 것 같다.

감동의 몇구절을 적어본다.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징후는 소위 탈진이라는 상태이다. 대게는 너무 많은 것을 주려는 데서 나오는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내 경험상 탈진은 내가 갖지 않은 것을 주려고 할 때 나오는 결과이다."(p.75)

바클라프 하벨(Vaclav Havel) 체코 공화국 대통령의 미의회 양원 합동회의 연설의 전문(p. 112)에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의 인간적 고통, 심각한 경제 침체, 인간적 굴욕감을 안고 살던 시절을 회상하며 "의식이 존재에 우선한다"는 말을 통해 마르크스 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깊이 공감하며 마르크스주의의 모순 지적에 우쭐해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던지는 파머의 말이 더욱 날카롭다.

 "물질이 의식 보다 더 강력하며, 경제가 정신보다 더 중요하고, 현금의 흐름이 비전과 아이디어의 흐름보다 더 많은 현실을 창조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자뿐만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자들 역시 이것을 신봉한다....우리는 "의식의 힘이 우리를 이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이야기이나 가혹한 현실은..."하 는 식의 얘기를 얼마나 많이 들어왔고 말해왔는가? 측량하고 셀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중요한 변화로 여기지 않는 체제에서 일해 본 적이 얼마나 많은가?...이것은 어느 하나의 이념을 신봉하는 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인류적인 문제이다. 우리의 정신적인 전통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회의 희생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공모자이다."(p. 114)
얼마나 구구절절 맞는 말인가!
작금의 대선구도를 보면서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천박한 논리에 젖어 있는 나를 본다.
배고픈 자가 없는데도 배고프다고 주장하며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늘 부족한 국민...
이것이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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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 보고서, 개정판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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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시험을 모두 마치고 밀린 책읽기에 재미 들린 요즘, 실망시키지 않는 책읽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한 책이다.

부제가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이고 보니 과연 이 책이 소위 과학적 지식을 가진 자가 썼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낳지만, 스캇펙 박사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정신분석학자이다. 그러니까 이 시대가과 열광하는 과학적 지식은 말할 것도 없고 악에 관한 소고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력을 가진 분이기에 그 제목의 매력은 배가 된다.

사람의 기본적 성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짓"(오 해의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완벽한 존재는 아니라는 측면에서 혹은 깨어진 상처들을 안고 사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예외없이 자기방어 기제로 '거짓'을 사용한다는 의미다)은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불완전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이다. 스캇펙 박사는 자신의 임상경험을 토대로 얼마나 사람들이 '거짓'을 만들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보여주며 그 가운데서 치료에 실패한 사례, 거짓의 벽이 너무나 두터워서 오랜 치료기간에도 불구하고 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던 사례들을 통해 조심스럽게 '악'의 실체를 거론한다.
과학적 접근의 첨단이라할 정신분석학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데 있어 '악'을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주장일까 생각해 보면 거꾸로 스캇펙 박사의 확신이 얼마나 컸겠는가 짐작하고도 남는다.

왜 사람들은 자기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자신의 온전함을 증명하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고 비판 일색의 삶을 살면서 자신을 고립시키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렇게 살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누군가와 거래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에리히 프롬의 연구를 많이 참고하면서 악이 하나의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며 악은 처음부터 인간 내면에 병적 증세를 잃으키고 거짓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조금씩 우리의 거래에 따라 거짓을 키워가고 결국 병적 증세로까지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적절한 지적이다.
우 리가 마치 천사와 마귀가 싸우다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할 때 마치 나의 책임성은 쏙 빼놓고 마귀에게만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바로 앞서 말한 문제제기 가운데 "나는 정상적이다"라는 주장을 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우리의 삶 아주 구석구석마다 악이 게재할 소지가 많다는 말이다. 거래의 개념은 나의 책임성을 절대 묵인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의 악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면, 악이란 나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데 사용하는 정치적인 힘이 다. 얼마나 공감하는 말인지 모른다. 이 정의에 따르면 도무지 악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만큼 우리는 깨어진 존재로 살아가기에 늘 자기성찰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는 거다.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자기성찰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게으름'이라 한 바 있다. 일리가 있지 않은가? 태만 때문에 우리는 자기성찰에 단 1분도 할해하지 않는다!(못하는 것이 아니라 않하는 것이다)

악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실 제로 그의 사례 뿐 아니라 인접 의사들의 사례를 통해서도 치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무엇인가를 늘 감지하지만 그것을 규정할 수 없어 치료에 손을 놓고 있는 사례가 있다 한다. 스캇펙은 그 부분이 바로 악으로 규명해야 할 부분이며 규명을 해야 치료에 대한 연구가 시작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학계에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려움이라는 거다. 악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보면 그 반응은 자연스럽다. 악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사람이 있는가? 우리의 첫째 반응은 혐오감이다. 가야할 길이 아직 멀다...

개인적으로 관심갖고 읽어나간 부분은 축귀에 대한 언급이다.
그가 소개한 축귀의 경험이 많은 부분 내가 경험한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종교적 범위 내에서의 축귀에 대한 설명 외에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궁금한 터였기 때문이다.
그 의 말에 따르면 축귀 사역의 95%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가능하다고 한다. 나머지 5%, 그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영역, 신비의 영역이라는 고백한다. 이 고백이 나는 진실하다 믿는다. 축귀 사역에 있어 마치 신비스런 무언가가 있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100% 신비로 치부하는 종교서적이 얼마나 많은가! 개인적으로 계몽주의적 교육을 받아서 그런가 100%라는 말은 못미덥고 100%과학적이라는 말도 못미더운 마당에 5%의 신비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가 말이다.

끝으로 그의 악에 대한 저항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소위 집단적 악에 관한 고찰까지 아우른다. 사실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대부분의 고통은 개인적인 악에 기인한 것도 있지만 집단적 악에 기인한 바가 크다. 집단적 악이 더 파괴적인 이유는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집단적 악이 판치는 곳에서 그 악에 누가 책임이 있겠는가? 몇일 전 영어문제 아티클에서 cooperative crime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조직에서 개인적 업무는 악하지 않으나 조직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악한데 누가 그 악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 하면서 이런 류의 범죄를 cooperative crime이라 하고 연구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이다. 그는 이런 형국의 악이 가능한 이유가운데 하나가 현대사회의 전문화를 꼽는다. 전문화되면 될수록 직접적인 책임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고 얼마든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는 거다. 전문화가 바보를 만든다는 말도 하더라만 결국 전문화는 도덕불감증을 만들어내는 악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그의 대안은 단순화다. 효율을 따져 전문화의 당위를 역설하지만 전문화는 인간을 말살시키며 악한 행동을 불러올 수 있는 가능성이 크므로 다소 불편하더라도 단순화를 지향하는 것이 악을 지양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는 거다.

개 인이 악에 대해 민감하면 자연스럽게 조직이 악을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조직 역시 유기체적 존재이므로 당연하다고 그는 역설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개인이 악에 대해 철저하게 거부할 수 있으려면 조직이 갖고 있는 악의 구조의 와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직이 악의 구조를 가졌는데 개인이 악을 거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가! 이 과제는 마치 닭과 달걀의 우선성에 관한 문제만큼 논쟁의 여지가 있다.

여하튼, 거짓의 사람들은 가장 드러내기 싫은 인간실존의 냄새나는 부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내가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도 가끔은 가식적, 혹은 현학적 글쓰기로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 역시 자기 보호를 위한 거짓이라는 생각에 까지 미치니까 글쓰기가 두려워진다. 몇번씩 읽어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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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7 18: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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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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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의 인연은 다소 쌩뚱맞은 데가 있다.
바야흐로 때는 2007년 8월의 마지막 주. 과분한 가족 여행으로 제주도를 4박 5일 쏘다니다가 몸 실은 비행기의 옆 좌석에 앉은 묘령의 지적으로 보이는 여인이 잡고 있는 책을 흘깃흘깃 훔쳐보다가 제목의 도발성으로 인해 외워놓았더랬다. 그러다가 4개월이 지난 지금, 무의식 속에 파뭍혀 있다가 의식으로 올라온 이책을 잡아 들었다.

지나서 얘기지만 지적으로 보이는 그 여인은 다름 아니라 KBS 아나운서였던 황현정씨였다. 싸인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아들 찬빈이가 있어 아빠로서의 체통도 지켜야 겠기에 황현정씨에게 안겨 유쾌한 비행시간을 보낸 찬빈이를 쬐끔 부러워하면서...OTZ

이 책의 후기를 쓰면서 이렇게 분위기 파악 못하는 글로 서두를 연 것은 그 책이 가지는 파괴성무자비성때문이기도 하다. 일종의 해학의 미학이랄까?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를 난 몰랐는데 엄청 유명한 작가이며 옥스포드 교수란다.
친구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면서 난 "무신론의 전도자"라는 별칭으로 소개했다.

앞에서 이 책의 성격을 파괴적이고 무자비적이라고 했다.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파괴적이라는 말, 혹은 전투적이라는 말에 대해 도킨스는 종교가 우리 사회에서 누려온 특권적 지위 때문에 별로 전투적이지 않더라도 전투적으로 보인다고 주장하더라만 내게는 그걸 감안해도 전투적이다.
싸움을 건다고 보는 편이 낫겠다.

도 킨스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없음'을 논증한다. 그는 글에서 피토하며 신의 부재를 논증하려는 자신의 시도가 종교라는 환각 증세 아래서 신음하는 대다수의 인류를 해방(?)시키고자 함이라고 침튀기지만 그 말은 마치 메아리없이 허공을 울리며 흩어지는 소리처럼 힘이 없다. 인류에 대한 일말의 애정이라곤 적어도 내게는 느껴지질 않는다. 차라리 나의 철저한 논증을 깨보라는 도전적이고 도발적 뉘앙스가 느껴질 뿐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도킨스의 치밀함과 철저함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사상, 어떤 종교의 신학자라 한들 이렇게 자신의 신앙의 토대를 위해 변증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만치 그의 논증, 논거는 철저하다 못해 지치게 하는 면도 없잖아 있다.
그리고 고백할 것은 이미 신학적 언어로 고착화 된 내 대뇌구조 안에서 소화할 수 없는 과학 언어가 이다지 많다는 사실에 사뭇 놀라면서 이 책의 70%는 소화했을까 하는 자괴감도 인다.

이런 정황 속에서 비평아닌 비평을 해야하니 두려움도 있지만 비평이란 것이 결국 책 읽은 독자의 몫이니 내 맘대로 지껄이면 그만이지 않은가!

이제 이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가급적 삼가고 읽으면서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어 몇자 적어놓은 메모를 옮겨 보자.

그는 본서의 목적을 신이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인류에게 신이 없음을 보란듯이 증명해서 자유하게 하자는 거다.
그럼, 논의는 당연히 신이 없음을 위한 증명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도킨스의 증명이란 것이 결국은 이미 진부해질 대로 진부해진 신학계의 신논증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한다. 그 이후에 뭐라도 나올까? 기대는 기대일 뿐이다. 신논증의 허술한 논리를 깨면 신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생각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고 치면 신이 있다는 세계의 모든 논증에 반론을 해야 그가 좋아하는 확률적으로 승산이 있다.

그리고 반증을 함에 있어 이미 아퀴나스 시절에 제기한 신논증을 현대 과학적 잣대로 반증을 하다니 언어가 사용된 시간적 범주 자체를 무시하는 공시적 접근이다.

아 울러 종교의 존재론적 차원의 논의나 논증보다는 경험적 차원의 결과물로 전체를 평가해 버리는 호전성을 보인다. 그가 사실 학자라고 하면 그가 선택한 실례의 극단성을 비판적으로 거론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가 학자적 객관성을 가지고 이 책을 저술한 것이 아니라 종교 VS 무신론의 구도에 사로잡혀 링에 오른 파이터의 모습으로 밖에 비치지 않는다. 나의 이런 비판에 그가 할 법한 이야기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신이 사라지는 공백을 어찌 메울지 몰라 그 신의 가랑이를 더욱 움켜쥐는 형국'쯤 일 것이다. 아무렴, 어떠랴?

실 례의 극단성은 성서관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성서에 나타난 야훼의 변덕스러움, 호전성, 무자비성을 극대화하고 66권의 나머지는 함께 쓰레기 취급을 한다. 결국 66권을 읽고 소위 '변화' '회심'한 사람은 말 그대로 한심한 유아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최고의 혐오는 바로 그 자신을 근본주의자와 비교하는 것을 거부하며 자신은 열정적이고 근본주의자들은 교조적이라는 도식을 만들고 자신은 자신의 입장이 새로운 증거앞에 변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을 갖췄기에 근본주의자들과는 다르다고 한다. 이게 소위 도킨스빠들한테는 역시 도킨스님이셔 할지 모르지만, 가변성을 인정하는 미덕을 갖춘 도킨스가 피튀기며 이야기하는 논증때문에 종교를 버리고 살던 사람들이 이후에 도킨스 스스로가 변화된 증거 앞에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을 때 경험할 당황스러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고 느껴진다. 이게 인류의 해방을 주창하는 무신론 전도자 도킨스의 인류애인가?

그가 이 책을 통해 하고자 한 이야기는 결국 프로이트나 포이에르바하의 재탕에 또 재탕이며 재방송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까봐 적당히 과학적 언어를 버무린 은근 슬쩍 재방송에 다름 아니다.

그럼,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인가?
그렇지 않다. 개인적으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이 책은 내가 얼마나 편향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일깨웠고 우리의 시대가 익숙한 언어에 얼마나 낯설어하는지 알게 해 주었다.
창 조론이냐 진화론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론적 증거들에 대한 좀 더 세심한 관찰과 수용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과학자로서 도킨스가 보여주는 신학적 섬세함을 역으로 신학도인 내가 과학적 섬세함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또 좌절했다.

과학적 근거야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니 도킨스의 이야기를 100%수용한다고 하면 이 책은 충분히 파괴적이다. 비평의 끈을 놓고 읽으면 분명 무자비한 도킨스의 칼에 상처나기 십상이다.

최근 안티기독교세력과의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의 발전적인 움직임들이 교계에 일고 있어 고무적이지만 아직 갈길이 멀다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도킨스의 철저함이 경이롭다.

이 책과 아울러 읽어줄 도킨스 반론서 '도킨스의 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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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의 신 - 리처드 도킨스 뒤집기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김태완 옮김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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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친 김에 읽어버렸다. 실오라기 걸치지 않고 대짜로 누워 자다가 난데 없이 찾아든 도둑한테 공격이나 당한 듯한 느낌, 혹은 지적 얼얼함을 갖게 한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고  뭔가 틈이 있는데 그게 뭔지를 몰라 안타까워 하던 차에 읽은 책이라 더 만족스럽다.

저자 소개를 잠깐 할까 치면 복음주의진영에서 J. I. Packer이 래 최대 지성으로 꼽히는 학자이다. 그의 독특한 이력은 옥스포드에서 분자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신학으로 전향(?)했으면서도 신학적 사유와 저작 활동이 순수(?) 신학자들보다 왕성하다는 데 있다. 작년에 학교에 와서 미래교회에 대한 전망에 관한 세미나를 이끌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맥그라스의 반론을 들여다 보면서 분명치 않았던 도킨스의 맹점을 분명하게 볼 수 있어 좋았고 두서없이 적은 만들어진 신에 대한 비평이 맥그라스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어서 흐뭇했다.^^;;

내 가 도킨스를 만난 것은 2007년 여름이지만 맥그라스는 그의 과거 이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같은 분야의 연구자로서 이미 1970년대부터 시작한다. 그 때부터 맥그라스는 과학의 대중화에 나선 도킨스의 출판물들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고 고백한다.
그 에 따르면 도킨스는 초기 철저한 과학주의적 입장에 근거하여 과학의 대중화를 도모했지만 점점 과학에 대한 그의 믿음에 근거하여 종교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 파이터가 되었다고 한다. 만들어진 신을 읽고 난 나의 느낌과 다르지 않다. 또한 만들어진 신이 그의 저작의 종합이라는 것도 맥그라스가 요목조목 따져 비판하는 그의 이전 저작들의 뉘앙스를 보며 눈치챘다.

본질적으로 맥그라스의 반론의 시작은 다윈의 다윈주의와 도킨스의 다윈주의를 구별하 는 데서 시작한다. 이 구별은 짐짓 지적인 유희, 폄하스런 말로 하자면 말장난으로 보이지만 도킨스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도킨스의 다윈주의는 다윈주의 자체로서 양산할 수 없는 결론으로 치달으며 그의 주장이 "신념"에 기초했음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놀란 것은 맥그라스의 다윈주의에 대한 해박한 이해였다. 과연 현대 신학자 가운데 이렇게 정밀한 이해는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경이로움과 아울러 부러운 마음도 일었다.

다윈주의는 결론은 결코 무신론이 아니라는 것이 맥그라스의 요지다. 오히려 끝까지 과학적 방법론을 견지한다면 다윈주의를 세계관으로 확대했을 때 '불가지론'이 오히려 더 과학적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도킨스는 모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다윈주의를 통해 세계가 설명이 될 수 있으니 '신'은 없다가 맞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맥그라스는 도킨스가 가진 '신앙'에 대한 정의가 어디에서 왔는지 묻는다. 도대체 '신앙'을 도킨스 식으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눈먼 신뢰'라 고 정의하는 근거가 어디인가 묻는다. 도킨스가 과학에 대해서, 과학적 방법론에 대해서 절대 신뢰를 한다면 그의 주장은 과학적 방법에 근거해야 하는데 그의 이같은 주장을 도대체 어디에 정초시킬 수 있는가를 묻는다. 물론 도킨스는 이 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마치 '이기적 유전자'가 태고적 부터 가지고 있던 이 같은 정의를 2000년대에 유전자의 확장형인 도킨스의 뇌에 표현될 수 있도록 한 것 마냥 당연시 한다는 것이다. 이게 과학적 방법인가? 그가 혐오하는 신앙의 모습이 지금 자신에게 해당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맥그라스는 유전자의 유비로 도킨스가 고안한 문화 유전자의 단위, 밈(meme)을 같은 이유로 논박한다. 이 유비가 정당하다는 근거 없이 밈을 상정하고 세계를 설명하려 시도한다는 말이다. 도킨스의 논증이라는 것이 여기까지다.

그럼 왜 도킨스의 책을 읽으며 소위 무신론 신자들은 열광하는가?
내가 만들어진 신을 읽으면서 폭력적이라고 하는 부분, 혹은 긴장하지 않고 읽으면 위험하다고 하는 부분에 무신론 신자들은 열광할 터인데 그부분을 명료화 하기가 힘들었다. 바로 이부분이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맥그라스의 지적이었다. 바로 도킨스의 레토릭이 그것이다. 그의 수사법은 철저한 과학적 진리를 과학적 방법에 근거하여 보여 준 후에 그 결과에서 추론 된 명제들을 가지고(보통 이 명제들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그 설교의 근거는 앞서 펼친 과학적 주장과는 관계 없는 이야기들 뿐이다. 그러니 독자가 긴장하지 않으면 과학적 진리를 이야기하는 부분과 그의 설교를 구분하지 못해서 하나로 보며 심한 상처를 받게 되는 거다. 무신론 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도킨스의 해박한 과학적 지식에 놀라고 그들이 평소에 악감정을 갖고 있는 종교인들의 행태를 근거로 '신'은 없다고 설교하니 '아멘'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 인정할 것을 인정하면 도킨스는 천재적 재담꾼이다.
근거없는 도약과 실험없는 결론과 가정을 가지고 '과학'인 양 꾸미는 데 듣는 사람이 구별할 수 없게 하는 마법같은 수사학을 구사하는 말꾼이다.

물론 맥그라스의 비판이 전부는 아니다.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이미 이 책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적어도 맥그라스는 신학이 "신비에 대한 합리적 수고"인 것 처럼 과학 역시 마찬가지이며 같은 일을 함께 하는 말벗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학자라면 이런 겸손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며 하나의 과제라면 과제가 생겼다.
분명 과학은 신학과 대립되거나 서로 관계 없이 양립하는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한 관계라는 입장이 대세인데 아직 교회는 과학 따로 신학 따로인 채 중세시대 속에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히 창조론 VS 진화론 구도를 아직도 고집하는 교회에서 이에 대한 창조적 대화를 시도한 학문적 성과들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 관심은 나의 관심이기도 하며 나에게 던져진 숙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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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0735 2008-01-26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간 당시부터 읽어봐야지, 하면서 미루던 책이네요. 저도 얼른 읽어봐야겠습니다. 무신론자로서.. 상당히 의미있는 책이 될 것 것 같아요.

나는나일뿐 2008-01-26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과학과 신학을 동급으로 놓는 것에 대해서 저는 반대입니다. 과학은 끝없이 검증이 되고 있지만 신학은 검증이 가능한 사고 체계가 아니지 않나요? 맥그라스의 도킨스 비판은 수긍할 부분이 많지만, 불가지론이 된다고 해서 곧바로 신학이 '검증의 사고 체계'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부정할 수도, 가설을 세울 수도, 근거를 들 수도 없으니까요.

오컴의 방식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을 과학이나 철학으로 입증하려 들지 마라.
여호와의 것은 여호와에게로, 도킨스의 것은 도킨스에게로.

과학이 신학의 세계에 무슨 수로 간섭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과학의 사고 체계로 굳이 그걸 왈가왈부하는 게 우습지요.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인간의 사고로는 '이해' 불가한 것으로 '상정'된 존재니까요.

신학 또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신학자들이 과학을 얘기할 땐, 가령 맥그라스 역시도 과학의 사고 체계로 그걸 논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과학에는 이미 '불가지론'이라는 것이 내포돼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끝없이 지의 영역을 넓혀갈 수 있다는 낙관이 과학에는 또한 깔려 있죠. 모순적이지만, 이런 창조적 모순이 과학적 긴장을 유발하는 원동력이라고 봅니다.

kibos 2008-07-01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과 신학 상생의 존재가 아닐까요??저는 무신론 자도 과학의 메카니즘에 현혹된 자도 아니지만 현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우리에게 신은 소중한 존재로 남아야하지만 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맹신의 모습을 보이는데 아니라 생각이드네요 과학도 마찮가지로 현실에서 과학으로 풀지 못하는 기현상이 많은데 너무 끼워 마추려하는 모습을 보여 씁슬 할 때가있죠 과학적 사고와 신의 믿음의 생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네요 저도 도킨스의 글을 보면 이해 불가한 글이 보이지만 도킨스의 마음도 그럴까요 신의 부정?? 전 꼭 그러하다 생각이 안드는데 제가 틀린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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