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 IVP 모던 클래식스 010
로날드 사이더 지음, 한화룡 옮김 / IVP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에 포스터의 『영적 훈련과 성장』을 읽고 나서 영성 훈련에 관한 짧은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연장선 상에서 읽으며 많은 도전을 받았다. 사이더의 관심은 그리스도인으로써 가진 부를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문제제기는 세계의 부의 80%를 누리고 있는 5%의 국가 대부분이 소위 기독교 국가인데 하루 1달러가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10억에 육박하는 현실의 모순에서 부터 나온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정의에 관심한다면 이런 모순적 상황은 넌센스라는 것이다.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주의가 만연하고 '소유'에 집착하는 현실에서 자기 소유를 나누라고 하는 것은 분명 시대역행적 발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은 분명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임이 분명한데 우리는 너무 이 주제를 폄하하고 '좌파'라는 딱지를 붙혀 재고의 가치도 없는 일로 치부해 왔다. 얼마나 치졸한 모습인지...

선지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분노가 단지 우상숭배 문제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를 돌보지 않은 죄를 물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상숭배문제만 거론하며 하나님의 분노를 용납하기 쉽게 '영적'인 문제로만 만들어 버렸다.

성서를 조금만 읽어도 분명한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회복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저자는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한다.
그는 부의 재분배에 있어 원리적으로 참고해야 할 "희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희년은 결국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으로써의 땅의 독점을 막고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산자원을 가지고 자신의 선택에 따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였다고 평가한다.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 제도가 현실 경제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현재의 가난은 부의 독점으로 인한 원천적인 생산수단을 강탈당해서 조장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개인의 나태함으로 빚어진 가난은 논외다. 그것은 분명 죄다.
우리의 관심은 사회구조를 통해 양산되는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와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 시대에 만날 수 있는 합리화를 사이더는 세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구명보트의 윤리다. 부자 나라를 구명보트에 빗대어 결국 가난한 나라를 태우다 보면 공멸할 수 밖에 없으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먹고 살 것도 없는 나라의 가공할 만한 출산률이 이들에게는 혐오스러울 수 밖에 없다.그들에게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둘째는 트릭클 다운 논리(trickle down)다. 부한 사람이 소비에 많은 돈을 지출하면 자연스럽게 가난한 사람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부해진다는 것이다. 사이더는 과연 그러한가 반문한다. 오히려 사치와 향락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돈을 구제로 돌린다면 훨씬 많은 사람이 빠른 시간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째는 부자를 전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내가 부해져야 하는 이유는 물질주의 사회에서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소유에 집착하는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건 완전 넌센스다.

개 인적으로 부의 분배를 논할 때 가장 많이 듣는 합리화가 두번째 논리가 아닐까 한다. 부한 사람들의 소비로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가난을 벗어난다는 논리. 소위 돈이 돌아야 한다는 주장 이면의 논리다. 부한 사람의 소비가 사회 약자층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있다고 믿으나 물질주의적 사회에서 신봉하는 과학적 통계를 들여다 보면 이상적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GNP는 지속적으로 상승하지만 가난은 더 골이 깊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논리가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골프를 치면 캐디가 돈을 벌게 되지 않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창출할 수 있는 일자리가 몇개나 될까? 차라리 골프치러 가기 위해 쏟는 비용을 구제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지원하면 시스템적으로 접근해서 보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이것이 사이더의 논리다.

완벽할 수는 없으나 근사치를 향해 가는 여정에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구 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세워질 필요가 있고 개인적으로도 가난의 영성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 가난해 지라는 금욕주의적 요청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난의 깊이를 경험하고 나의 소유가운데 '유용성'이 아닌 '사치'를 위한 소비를 줄여 생산수단마저 빼앗겨 '자유'를 동경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곳에 사용되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부끄럽다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머리 속에서는 이미 아프리카에 가있는데 내 지갑은 여전히 닫혀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고 기독교인이 대안적 모델을 제시할 때이다.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영과 육을 통전적으로 바라보는 건전한 인간관도 회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다
그의 책 마지막에 필라델피아의 자유의 종에 새겨진 희년적 선포에 귀를 기울이자.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레 25:10)



후기: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과 구제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경제질서 전반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을 양산하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해법과 기독교적 대안들을 고민하는 것이 절실하다. 그래서 사이더도 어서 빨리 기독교 정치학자, 경제학자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맞다고 하지 않는 겸손을 가졌고 얼마든지 대화를 통해서 수정되어야 함을 인정하는 개방적 태도는 참 닮고 싶은 모습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 1
N.T.라이트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0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톰라이트(N.T. Wright)의 단행본으로 워밍업을 하다가 그의 연구의 총체적 시리즈라 할 기독교의 기원과 신에 관한 문제 시리즈 제 1권을 열었다. 5권이 될지 6권이 될지 장담하지 못한 그의 연구서의 처음 책인 본서는 신약성서의 연구 방법론에 대한 그의 입장과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한 전제들을 소개한다. 그 소개를 위해 700여 페이지가 필요하다니 읽는 사람을 조금만 고려해 줬으면 하는 바램이 살짝 들었다.-_-;;

개인적으로 신약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본서는 소위 비평 방법에 대한 상식을 수포로 돌리는 전복적 요소가 있다고 본다. 물론 긍정적인 전복이고 성경을 보다 큰 틀에서 또 통전적으로 읽는데 도움을 주는 방식의 전복이다.
그가 성서를 읽는 방법은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이다. 무려 100여페이지를 이 해석학적 툴을 설명하는데 할애하고 있으나 해석학 역사를 100여페이지에 요약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의 시도가 다소 무모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치우침없이 비판적 실재론의 본질적 메커니즘을 보여주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쓴다. 그의 방법론은 현상학적 방법론(최근 성서 비평의 근저에 깔린 논리)이 아니라 실재론적 관점에 서 있다. 실재론이라 함은 간략히 말해서 성서가 보여주는 세계가 실재했다고 믿는 것을 말하는 데 역사가의 정체성을 가진 라이트가 실재론을 붙잡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범부가 생각하는 성서 세계의 모든 것이 실재라고 생각하는 선상에서의 실재론은 아니다. 분명 그는 텍스트에서 실제의 역사를 분별하며 읽어야 할 필요성을 아는 역사가다. 따라서 텍스트가 드러내는 현실에 비판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론적 전제는 그가 왜 그토록 이스라엘의 이야기에 집착하는지와 역사에 집착하는지 그리고 그 역사 속에 펼쳐진 신의 사역에 관심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 는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접근 가능한 자료에 대해서 '포괄성'과 '단순성'의 원리를 적용해야 함을 역설한다. 역사적 전제 혹은 가설을 수립하기 위해서 하나의 자료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접근 가능한 모든 자료를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 '포괄성'의 원리이며 포괄된 자료들의 연구를 통해 나온 결과는 '단순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가능한 단순한 진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의 신약성서 연구가 보여준 과거 200여년의 역사는 단순성을 추구하며 버린 자료가 너무 많고 포괄성을 추구하다 너무 다양한 결론으로 치달았던 웃지 못할 일의 실제를 보여준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런 전제들을 가지고 우리는 텍스트 자체가 보여주는 문학 세계와 텍스트가 지칭하는 역사적 현실, 그 현실에 대한 이면으로써의 신학을 포괄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는 이러한 모든 전제들을 포용하며 연구하는 처음을 세계관에 대한 담론으로 시작한다. 세계관은 곧 이야기로 형성되고 그 이야기는 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시키며 공동체에 상징을 부여하고 그 상징을 통한 실천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실증주의적 역사연구가 실천에 머물렀기 때문에 폐단을 초래한 것이고 우리는 그 실천을 만들어 낸 상징과 상징이 지칭하는 이야기의 세계에 관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이스라엘의 큰 이야기 배경 속에서 펼쳐진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전의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지 않고 신약성서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 된다.

그는 신약성서를 읽기 위한 이전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특별히 1세기 유대교의 실상을 역사가의 입장에서 진술한다. 유대교가 아닌 "유대교들"로 존재했던 격동의 시기에 태동한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한 당연한 연구이며 이들이 가졌던 이야기, 상징, 실천. 그리고 그들의 신앙과 역사와 분리될 수 없는 소망들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서술한다. 이렇게 지리한 배경사를 그가 서술한 이유에 대한 의문은 제 4부 기독교의 제1세기를 읽으면서 해소된다. 기독교의 이야기와 상징, 실천들이 유대교의 그것과 얼마나 닮아있고 어떻게 그것을 전복시키고 있는지...

복 음서의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이 바울의 서신 조차도 상식처럼 헬라적 요소가 반영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근저에 유대적 음조를 가진다고 말하는 그다. 소위 선교를 위해서 유대적 그림을 헬라화 시켰다고 알고 있는 우리의 이해에 의의를 제기하며 선교의 추동은 '동화'가 아니라 신앙 자체-"이스라엘이 이제 구속되었고 이방인들을 위한 때가 도래(p.736)-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선교지에 가서 비쳐진 기독교는 여전히 신앙적 요구사항과 도덕적 기준이 이교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만일 선교적 목적으로 동화되어 헬라화시켰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역사가 보여주는 기독교의 인상을 설명해야 한다. 비판적 실재론의 예를 살짝 맛보는 대목이다.

불트만을 소위 신약학계의 수퍼스타로 부상시킨 양식비평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읽고 있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날이 섰다. 양식비평은 예수가 아니라 초기교회의 신앙과 삶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 때문에 실제 기독교를 태동시켰던 예수의 삶과 역사는 주변적 사건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은 양식비평이 분명 유용한 툴이지만 포커스의 조정이 필요하며 양식비평이 얼마나 상상 속의 가설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폭로한다.
이 어 등장한 편집비평 역시 역사와 무관한 텍스트의 전승층을 구별하고 이를 지지하기 위한 상상력의 나래를 너무 활짝 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대표적인 예로 재림 지연이 텍스트 형성에 미친 영향에 대한 편집 비평적 연구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가설 위에 세워졌는지를 보여준다.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서 실망해서 교회를 떠났다거나 하는 역사적 자료는 3세기가 될 때까지도 등장하지 않는데 유독 복음서의 형성기에 재림 지연이 문제가 되어서 편집적 요소가 개재되었다는 것이 넌센스라는 거다.
그 렇다면 우리는 더욱 역사를 한 손에 잡고 우리의 텍스트인 신약성서를 읽어야 할 필요를 절감한다. 유대의 역사는 신약성서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고 신약성서의 이야기를 통해 구약은 성취의 역사로 읽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철저한 유대교적 배경 속에 있던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분기된 지점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다. 예수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유대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근본적 차이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예수에 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고 2권의 내용이다.

700 여페이지의 빼곡한 학문적 연구를 요약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고 내게는 이정도의 큰 그림만 갖게 된 것도 보람이고 행운이다. 얼개를 보니 교회에서 당연하게 가르치는 큰 골격과 다르지 않지만 이 골격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변증이 필요한지...
양 식비평, 편집비평, 전승사 비평, 현대의 포스트모던 비평까지 툴로서는 손색이 없지만 포커스가 제대로 맞추어져 있지 않으면 얼마나 해악이 되는지에 대한 그의 지적은 조금이나마 신약학을 맛본 나에게는 일종의 경종이된다. 이 한권을 읽으면서 '감동'이라는 말 밖에는...또 이런 분과 함께 공부해 보면 좋겠다는 바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esus 코드 - 역사적 예수의 도전
N. T. Wright 지음, 이진섭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도발적으로 독자를 향해 쳐다보고 있는 표지의 저 사람은 머리에 가시관을 쓴 예수시다. 늘 온화한 상상 속의 예수의 그림만을 보다가 이런 사진을 보니 당혹스럽기는 한데 원제가 The Challenge of Jesus라고 하니 이해할만하다.

『다 빈치코드』때문에 시류에 맞게 제목을 뽑느라 '코드'를 제목에 넣은 것 같은데 '예수의 도전'이 더 낫지 않았을까? 출판사야 한 권이라도 더 팔아야 하니 유행에 민감한 독자들을 위해 '코드'를 삽입했겠지만 그림하고 영~맞지 않는다.

최근 톰 라이트를 깊이 파볼 요량으로 워밍업이 될만한 얇은 책들을 선별해서 읽고 있는데 이 책은 그의 학술 총서가운데 하나인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의 요약 안내서라 한다. 요약이라고 하는 것은 이 책이 1000페이지의 책을 압축한 것이기에 논리를 따라갈 때 난해한 부분이 있음을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이고 안내서라 함은 1000페이지의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를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일터다.

원제를 기준으로 이 책은 예수의 삶이 이 세상에 도전이 되는 이유를 1세기 유대적 관점, 유대적 유산을 최대한 역사적으로 복원하여 제시하려 한다. 그러나 읽으면서 내내 오히려 도전이 되었던 것은 예수를 이해하는 그의 방식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에 주는 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유대적 유산과 배경을 이해하면서 신약성서를 읽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지적 앞에 내가 알고 있던 바는 참으로 미천하고 종교개혁 이후의 교리적 이해 수준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까지 그의 논지에 동의하면서 일세기 유대인들의 세계관과 문화적 유산들을 그의 안내에 따라가면서 "출애굽"이라는 안경으로 바라본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궁극성까지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 예수가 지금 나에게 혹은 현재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는 어마어마한 갭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라이트는 유대적 관점에서 역사적 예수를 접근하고 메시아에 대한 이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신 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18세기 이후의 신 이해에 근거한 신성을 전제하는 개념도 아니고 오로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 속에서 '의미'를 얻는 예수의 메시아성을 말하고 있다. 잠깐 잠깐의 논리적 불연속이 있으면서 여기까지는 참 잘 이해를 했는데 유대적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성취한 예수가 21세기 한국에 살아가는 '나'에게 구원의 주로 선포될 수 있는 논리적 연결이 발견되지 않는 것 같아 끝까지 개운치가 않다.

결국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를 읽어야 하는 건가?

유대적인 세계관 속에서 새 창조의 첫 날을 여신 예수...

그러나 그 예수가 우리에게 어떻게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갑작스럽게 그는 논리적으로 비약해서 덮어 놓고 그가 길게 설명한 유대적 세계관에서 나와 구원의 주로 선포하고 있으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심 리적이고 극히 개인적 차원의 속죄 신학이 '종교개혁'의 산물이지 1세기 예수에게 까지 소급되는 것은 아니라던 그가 결국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그의 사랑을 경험한 자들이 그 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집을 세우는 것이 사명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더욱 미궁으로 빠져든다. 어쩌라는 것인지...

일천한 지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높은 지식을 전하고 있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겸손을 가지고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을 읽어야겠다.

그 래도 톰 라이트가 조금씩 좋아지는 것은 그가 복음주의자이면서 역사적 연구에 비중을 두고 있으며 이해가능한 예수를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학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는 자신의 실존이 덮어 놓고 믿으라고 강요하는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유사 자유주의자라 욕먹고 역사적 연구의 첨단을 달리는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근본주의자라 무시당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소명의 자리가 그 자리라고 고백하고 그 자리에서 '사랑'의 해석학을 통해 예수를 학문적인 책을 통해 매주의 설교를 통해 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참 훌륭한 사람이다. 배우고 싶고 도전받고 싶고...

나의 실존이 그렇지 않은가? 70년대 80년대의 근본주의적 교회 교육을 받고 90년대 종교학이라는 '계몽주의'의 최고봉을 맛보았고 역사적 연구를 통한 성서 이해를 본격적으로 배우길 5년...그래서 더욱 그의 입장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것 같다.

어쨌든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올 여름엔 그가 전하는 예수와 하나님 나라에 빠져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톰 라이트와 함께하는 기독교 여행
톰 라이트 지음, 김재영 옮김 / IVP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접한 것은 2007년인가 2008년 봄에 미국의 칼빈신학교에서 있었던 톰 라이트 강연 mp3를 접하고 나서이다. 알듯말듯 쏟아내는 그의 강연을 듣고 눈으로 확인하자고 찾아 읽은 책이다. 원제는 Simply Christian.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쉽게 풀어쓴 기독교 변증서이면서 기존 신자에게는 교정서이기도 하다.
책에서 읽었는지 강연에서 들었는지 가물가물 한데 1950년대 변증서로 널리 읽힌 C. S. Lewis의 Mere Christianity(순전한 기독교)의 21세기 판이라는 별명이 따른다.

변증서라고는 하지만 사실 기독교에 문외한인 경우는 읽기가 어렵다. 처음 몇장은 나름대로 비신자를 고려하면서 글을 쓴 흔적이 드러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노골적으로 신자용 서적으로 바뀐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랴!

루이스가 제기한 공통의 관심사는 "도덕" 혹은 "윤리"였다. 윤리의 기준은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는 식의 논증을 시도했고 그것이 주효했다.
톰 라이트가 파악한 관심사는 "정의" "영성" "미학"이다. 이 단어들만 보아도 21세기적이다. 이 가치들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거론한다. 여기까지의 논증은 루이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나 성서학자다운 그의 면모는 성서를 이해하는 세계관을 바로잡으려는 그의 노력에서 발견된다.

그는 세상을 이해하는 세계관을 크게 범신론, 이원론, 유대적 세계관으로 구분하며 유대적 세계관의 독특성을 놓치면 기독교의 정수에 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유대적 세계관은 무엇인가? 유대적 세계관은 하늘과 땅이 분명 객체로 존재하면서 분리되지 않고 현재에 섞여 있다고 믿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현존은 저 멀리 있는 '하늘'에서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지금 여기서 누리를 수 있는 현존이다.
예수 역시 이런 세계관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는 거다. 비록 완성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구현되고 있는 중이라는 거다. 현재도 미래도 과거도 유대 세계관에서는 같은 비중으로 중요하다. 지금 이땅이 버릴 곳이 아니라 악하기만 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통해 변화시킬 땅이기에 예수는 이 땅을 버리고 저기 가나안을 보며 나아가자고 권면한 것도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오도록 우리를 세우셨다는 거다 . 하나님이 이 땅에서 원하시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아신 분이 예수이시며 그 분의 부활을 통해서 새롭게 변화될 이 땅에 대한 소망을 붙잡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 2000년이 넘도록 기독교인들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그렇게 새로운 창조를 위한 소망을 확인하는 자리이며 끊임없이 하나님의 비전으로 갱신되는 자리여야 한다.

공 감한 그의 비유는 강과 나무의 비유이다. 그는 기독교가 강과 나무라고 한다. 강이 많은 지류들이 모여 강으로 흘러들고 바다로 가듯이 여러 다양한 형태의 신앙을 보여주면서 결국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의 소망으로 수렴되어지면 동시에 나무와 같이 뿌리는 같지만 여러 가지들이 나오고 그 가지들에서 그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런 수렴과 분리의 변증 속에서 기독교는 성장했고 자랐다고 말한다. 얼마나 멋진 이야기인가.
큰 그림 속에서 기독교가 그렇다고 하면 작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역시 강과 나무의 양면적 모습이 발견되어야 하는데 지금 내가 경험하는 기독교는 다양성은 말살되고 오히려 단일성만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개 인적으로 재미있는 것은 그의 이러한 통찰과 교회에 대한 강조가 무색하게 영국 교회의 교세나 기독교 인구의 수가 급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이렇게 훌륭한 신학자들이 포진한 영국인데 교회에 나와서 실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경축하는 사람들을 극히 적다니...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두려운 생각도 든다.
교회와 신학의 분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융의 심리학과 기독교 영성
에르나 반 드 빙겔 지음, 김성민 옮김 / 다산글방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미국에 있을 때 잠깐 융의 이론에 나오는 기초 개념들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이 사람 참 난 사람이다'라는 유쾌한 존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스캇 펙의 책을 읽으면서 자주 융의 인용을 하는 것을 보고 후속작을 읽기 전에 전이해도 얻을 겸해서 읽었다.


스캇 펙의 400여 페이지, 하드커버의 양장본도 아닌데 200여 페이지 남짓 한 이책을 읽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분명 스캇 펙이 이야기한 정신분석의 영성적 측면은
이미 융의 머리 속에서 윤곽이 드러났다는 인상이 깊게 든다.물론 1차 자료가 아니라 2차 자료이기 때문에 융의 육성을 가감없이 듣고 느낀 바는 아니지만...OTL


이 책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융의 입문서로 손색이 없을 듯 하다.


"무의식"의 발견이 프로이트의 공헌이었다면
개인적 차원의 무의식을 인간이라는 종(種)이 가지는 집단무의식으로 확대한 것은 융(Jung)의 공헌이다.
집단 무의식을 통해 인류가 공통으로 지향하는 바를 모든 인간은 공유하고 있으나
다만 각성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다.


그는 각자 의식의 세계 안에 있는 자아(self)가 집단무의식의 핵이라할 자기(Self)와 통합되는 것, 즉 개성화(individuation)가 인간에게는 공통적으로 주어진 심리적 과제라 한다.


융의 이러한 주장이 영성적 차원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대로 지어진 인격적 존재이다.
모든 인류가 공유한 하나님의 형상...
융에게 있어서 그것은 바로 집단무의식 속에 숨겨진 "자기"였다.


이 "자기"와 통합하는 과정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융이 자신의 개성화를 그리스도교의 영성과 연관시킨 것은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그의 연구를 심리학의 울타리 안에서 발전시키고 진행했다 한다.


그는 정신분석에서 "개성화"의 요청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언급하기 이전에 모든 인간에게 요청되는 심리적 작업이다.


물론 융도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자신의 정신분석 작업이 그 꼴에 있어 유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도 종교는 정신분석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다만, 정신분석이 종교의 초월적인 관심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말은 조심스럽게 한다.




융의 심리학이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에서 보면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그들이 알고는 있으나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융은 심리학의 언어로 담아낸 것이다.
신앙공동체의 유산과 언어없이 누구나 알기 쉽게 말이다...
즉, 폐쇄적인 신앙으로의 초대의 문을 개방적으로 열어 재쳤다고나 할까...




결국 문제는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다.
Know myself...
나는 앎으로 너를 안다.
심오하다...그에게로 가는 길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unbi00 2009-11-08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님의 형상 회복,
의식/집단무의식의 자아 통합
깨달음
성리학의 天心과 도심 자각
인간 신성의 회복.
참자아(팔머)
-탐색의 과정이나 길은 다르지만 인간이 결국 육신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빵만으로 만족하지 않으며 대뇌피질의 이성작용만으로 살거나 감정뇌의 작용만으로 사는게 아니라 보다 훨씬 고귀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 같다.

글 감사합니다. 읽어봐야겠슴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