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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 IVP 모던 클래식스 010
로날드 사이더 지음, 한화룡 옮김 / IVP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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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근에 포스터의 『영적 훈련과 성장』을 읽고 나서 영성 훈련에 관한 짧은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연장선 상에서 읽으며 많은 도전을 받았다. 사이더의 관심은 그리스도인으로써 가진 부를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문제제기는 세계의 부의 80%를 누리고 있는 5%의 국가 대부분이 소위 기독교 국가인데 하루 1달러가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10억에 육박하는 현실의 모순에서 부터 나온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정의에 관심한다면 이런 모순적 상황은 넌센스라는 것이다.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주의가 만연하고 '소유'에 집착하는 현실에서 자기 소유를 나누라고 하는 것은 분명 시대역행적 발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은 분명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임이 분명한데 우리는 너무 이 주제를 폄하하고 '좌파'라는 딱지를 붙혀 재고의 가치도 없는 일로 치부해 왔다. 얼마나 치졸한 모습인지...

선지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분노가 단지 우상숭배 문제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를 돌보지 않은 죄를 물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상숭배문제만 거론하며 하나님의 분노를 용납하기 쉽게 '영적'인 문제로만 만들어 버렸다.

성서를 조금만 읽어도 분명한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회복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저자는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한다.
그는 부의 재분배에 있어 원리적으로 참고해야 할 "희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희년은 결국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으로써의 땅의 독점을 막고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산자원을 가지고 자신의 선택에 따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였다고 평가한다.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 제도가 현실 경제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현재의 가난은 부의 독점으로 인한 원천적인 생산수단을 강탈당해서 조장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개인의 나태함으로 빚어진 가난은 논외다. 그것은 분명 죄다.
우리의 관심은 사회구조를 통해 양산되는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와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 시대에 만날 수 있는 합리화를 사이더는 세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구명보트의 윤리다. 부자 나라를 구명보트에 빗대어 결국 가난한 나라를 태우다 보면 공멸할 수 밖에 없으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먹고 살 것도 없는 나라의 가공할 만한 출산률이 이들에게는 혐오스러울 수 밖에 없다.그들에게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둘째는 트릭클 다운 논리(trickle down)다. 부한 사람이 소비에 많은 돈을 지출하면 자연스럽게 가난한 사람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부해진다는 것이다. 사이더는 과연 그러한가 반문한다. 오히려 사치와 향락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돈을 구제로 돌린다면 훨씬 많은 사람이 빠른 시간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째는 부자를 전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내가 부해져야 하는 이유는 물질주의 사회에서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소유에 집착하는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건 완전 넌센스다.

개 인적으로 부의 분배를 논할 때 가장 많이 듣는 합리화가 두번째 논리가 아닐까 한다. 부한 사람들의 소비로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가난을 벗어난다는 논리. 소위 돈이 돌아야 한다는 주장 이면의 논리다. 부한 사람의 소비가 사회 약자층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있다고 믿으나 물질주의적 사회에서 신봉하는 과학적 통계를 들여다 보면 이상적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GNP는 지속적으로 상승하지만 가난은 더 골이 깊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논리가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골프를 치면 캐디가 돈을 벌게 되지 않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창출할 수 있는 일자리가 몇개나 될까? 차라리 골프치러 가기 위해 쏟는 비용을 구제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지원하면 시스템적으로 접근해서 보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이것이 사이더의 논리다.

완벽할 수는 없으나 근사치를 향해 가는 여정에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구 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세워질 필요가 있고 개인적으로도 가난의 영성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 가난해 지라는 금욕주의적 요청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난의 깊이를 경험하고 나의 소유가운데 '유용성'이 아닌 '사치'를 위한 소비를 줄여 생산수단마저 빼앗겨 '자유'를 동경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곳에 사용되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부끄럽다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머리 속에서는 이미 아프리카에 가있는데 내 지갑은 여전히 닫혀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고 기독교인이 대안적 모델을 제시할 때이다.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영과 육을 통전적으로 바라보는 건전한 인간관도 회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다
그의 책 마지막에 필라델피아의 자유의 종에 새겨진 희년적 선포에 귀를 기울이자.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레 25:10)



후기: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과 구제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경제질서 전반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을 양산하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해법과 기독교적 대안들을 고민하는 것이 절실하다. 그래서 사이더도 어서 빨리 기독교 정치학자, 경제학자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맞다고 하지 않는 겸손을 가졌고 얼마든지 대화를 통해서 수정되어야 함을 인정하는 개방적 태도는 참 닮고 싶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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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사교육에 속고 있다 - 대치동 입시전문가, 대한민국 사교육 신화를 뒤집다
박재원.정수현 지음 / 스쿨라움(김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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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랜만에 신학 외 서적을 읽은 듯 하다. 본 서는 지갑을 열어 구입했거나 혹은 도서관에서 눈에 띄어 읽은 책도 아니고 우연히 블로그를 타고 다니다가 부모2.0 이라는 포털을 방문하여 얻은 책이다. 대한민국에서 부모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공유하고 나누는 장인데 회원가입하면 본 서를 선물로 증정한다기에 얼른 하고 받았다.
'회원가입'이라는 일년의 귀찮은 노력을 쏟아서 그런지 완전공짜가 주는 가벼움으로 책을 던져 버리지 않고 읽어 갔다.

저 자는 대치동에서 신화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던 소위 잘나가는 강사였는데 학원 일선에서 만나는 아이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참교육'에 대해서 고민하며 이 책을 썼다고 털어놓는다. '돈'을 포기하고 '가치'를 선택한다는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조금씩 알아가는 요즘, 책의 내용을 떠나서 저자의 결단에 일단 박수를 보낸다.

사교육에 속고 있는 실태를 꼬집으면서 저자는 내내 하는 이야기가 이성이 아닌 감성에 관심을 가져주라고 부모님께 부탁한다. 공부의 주체가 부모가 되어버린 지금, 그 틈바구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아이들이 스트레스가 아닌 즐거움으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자는 거다. 돈과 부모의 학벌이 자녀의 학력을 결정한다고 하는 '환경론'의 허구를 여러가지 자료들과 개인적 상담자료를 들어가며 설득은 하는데 설득이 여간 엉성하지가 않다. 그래도 취지가 가상하니 눈감아 주며 읽어줬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공부의 핵심은 '공부하라'고 요구하는 잔소리가 아니라 그저 자녀들과 하는 수다로 시작되는 정서적 기반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정서적 기반 혹은 아이들의 정서를 함양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예가 너무 빈하다. 정작 저자의 이야기를 들을 사람들이 부모들이라면 정서를 위해서 무엇을 구체적으로 부모님들이 신경쓰고 챙겨야 하는지를 더 개진해 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는 몇가지 원칙적 차원에서 정서 함양의 방법들을 말하고 있다.
1. 격려한다
2. 평가하지 않는다
3. 보람을 느끼게 한다
4. 흥미를 느끼도록 한다
5.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게 한다

이 얼마나 원칙적인 말들인가? 부모가 궁금한 것은 도대체 어디까지 격려하고 어떻게 보람을 느끼게 하며 공부에 흥미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이다.
' 흔히 공부하는 놈들 가운데 있으면 공부하겠지'하고 대치동에 보내는 부모님들은 아이가 대치동에서 공부에 흥미를 갖을 것을 기대하며 보내고 대치동을 통해 오르는 성적으로 보람을 느끼기를 바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부모님도 알고 있는 원칙보다는 실제적 각론을 짚어 주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특별히 관심 있는 부모님들 가운데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 것인지 갈팡질팡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한번 가볍게 읽어보아도 좋을 책이다. 점수를 짜게 준 것은 페이지와 내용 구성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데 있다. 참교육을 기치로 책을 쓰는 것이라면 가격은 합리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수준에서 결정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책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물론 회원가입을 했다고 '공짜'로 받긴 했지만 구입해야 하는 분들에게는 다소 미안한 책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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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 1
N.T.라이트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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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라이트(N.T. Wright)의 단행본으로 워밍업을 하다가 그의 연구의 총체적 시리즈라 할 기독교의 기원과 신에 관한 문제 시리즈 제 1권을 열었다. 5권이 될지 6권이 될지 장담하지 못한 그의 연구서의 처음 책인 본서는 신약성서의 연구 방법론에 대한 그의 입장과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한 전제들을 소개한다. 그 소개를 위해 700여 페이지가 필요하다니 읽는 사람을 조금만 고려해 줬으면 하는 바램이 살짝 들었다.-_-;;

개인적으로 신약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본서는 소위 비평 방법에 대한 상식을 수포로 돌리는 전복적 요소가 있다고 본다. 물론 긍정적인 전복이고 성경을 보다 큰 틀에서 또 통전적으로 읽는데 도움을 주는 방식의 전복이다.
그가 성서를 읽는 방법은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이다. 무려 100여페이지를 이 해석학적 툴을 설명하는데 할애하고 있으나 해석학 역사를 100여페이지에 요약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의 시도가 다소 무모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치우침없이 비판적 실재론의 본질적 메커니즘을 보여주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쓴다. 그의 방법론은 현상학적 방법론(최근 성서 비평의 근저에 깔린 논리)이 아니라 실재론적 관점에 서 있다. 실재론이라 함은 간략히 말해서 성서가 보여주는 세계가 실재했다고 믿는 것을 말하는 데 역사가의 정체성을 가진 라이트가 실재론을 붙잡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범부가 생각하는 성서 세계의 모든 것이 실재라고 생각하는 선상에서의 실재론은 아니다. 분명 그는 텍스트에서 실제의 역사를 분별하며 읽어야 할 필요성을 아는 역사가다. 따라서 텍스트가 드러내는 현실에 비판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론적 전제는 그가 왜 그토록 이스라엘의 이야기에 집착하는지와 역사에 집착하는지 그리고 그 역사 속에 펼쳐진 신의 사역에 관심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 는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접근 가능한 자료에 대해서 '포괄성'과 '단순성'의 원리를 적용해야 함을 역설한다. 역사적 전제 혹은 가설을 수립하기 위해서 하나의 자료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접근 가능한 모든 자료를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 '포괄성'의 원리이며 포괄된 자료들의 연구를 통해 나온 결과는 '단순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가능한 단순한 진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의 신약성서 연구가 보여준 과거 200여년의 역사는 단순성을 추구하며 버린 자료가 너무 많고 포괄성을 추구하다 너무 다양한 결론으로 치달았던 웃지 못할 일의 실제를 보여준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런 전제들을 가지고 우리는 텍스트 자체가 보여주는 문학 세계와 텍스트가 지칭하는 역사적 현실, 그 현실에 대한 이면으로써의 신학을 포괄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는 이러한 모든 전제들을 포용하며 연구하는 처음을 세계관에 대한 담론으로 시작한다. 세계관은 곧 이야기로 형성되고 그 이야기는 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시키며 공동체에 상징을 부여하고 그 상징을 통한 실천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실증주의적 역사연구가 실천에 머물렀기 때문에 폐단을 초래한 것이고 우리는 그 실천을 만들어 낸 상징과 상징이 지칭하는 이야기의 세계에 관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이스라엘의 큰 이야기 배경 속에서 펼쳐진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전의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지 않고 신약성서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 된다.

그는 신약성서를 읽기 위한 이전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특별히 1세기 유대교의 실상을 역사가의 입장에서 진술한다. 유대교가 아닌 "유대교들"로 존재했던 격동의 시기에 태동한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한 당연한 연구이며 이들이 가졌던 이야기, 상징, 실천. 그리고 그들의 신앙과 역사와 분리될 수 없는 소망들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서술한다. 이렇게 지리한 배경사를 그가 서술한 이유에 대한 의문은 제 4부 기독교의 제1세기를 읽으면서 해소된다. 기독교의 이야기와 상징, 실천들이 유대교의 그것과 얼마나 닮아있고 어떻게 그것을 전복시키고 있는지...

복 음서의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이 바울의 서신 조차도 상식처럼 헬라적 요소가 반영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근저에 유대적 음조를 가진다고 말하는 그다. 소위 선교를 위해서 유대적 그림을 헬라화 시켰다고 알고 있는 우리의 이해에 의의를 제기하며 선교의 추동은 '동화'가 아니라 신앙 자체-"이스라엘이 이제 구속되었고 이방인들을 위한 때가 도래(p.736)-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선교지에 가서 비쳐진 기독교는 여전히 신앙적 요구사항과 도덕적 기준이 이교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만일 선교적 목적으로 동화되어 헬라화시켰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역사가 보여주는 기독교의 인상을 설명해야 한다. 비판적 실재론의 예를 살짝 맛보는 대목이다.

불트만을 소위 신약학계의 수퍼스타로 부상시킨 양식비평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읽고 있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날이 섰다. 양식비평은 예수가 아니라 초기교회의 신앙과 삶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 때문에 실제 기독교를 태동시켰던 예수의 삶과 역사는 주변적 사건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은 양식비평이 분명 유용한 툴이지만 포커스의 조정이 필요하며 양식비평이 얼마나 상상 속의 가설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폭로한다.
이 어 등장한 편집비평 역시 역사와 무관한 텍스트의 전승층을 구별하고 이를 지지하기 위한 상상력의 나래를 너무 활짝 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대표적인 예로 재림 지연이 텍스트 형성에 미친 영향에 대한 편집 비평적 연구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가설 위에 세워졌는지를 보여준다.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서 실망해서 교회를 떠났다거나 하는 역사적 자료는 3세기가 될 때까지도 등장하지 않는데 유독 복음서의 형성기에 재림 지연이 문제가 되어서 편집적 요소가 개재되었다는 것이 넌센스라는 거다.
그 렇다면 우리는 더욱 역사를 한 손에 잡고 우리의 텍스트인 신약성서를 읽어야 할 필요를 절감한다. 유대의 역사는 신약성서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고 신약성서의 이야기를 통해 구약은 성취의 역사로 읽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철저한 유대교적 배경 속에 있던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분기된 지점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다. 예수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유대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근본적 차이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예수에 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고 2권의 내용이다.

700 여페이지의 빼곡한 학문적 연구를 요약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고 내게는 이정도의 큰 그림만 갖게 된 것도 보람이고 행운이다. 얼개를 보니 교회에서 당연하게 가르치는 큰 골격과 다르지 않지만 이 골격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변증이 필요한지...
양 식비평, 편집비평, 전승사 비평, 현대의 포스트모던 비평까지 툴로서는 손색이 없지만 포커스가 제대로 맞추어져 있지 않으면 얼마나 해악이 되는지에 대한 그의 지적은 조금이나마 신약학을 맛본 나에게는 일종의 경종이된다. 이 한권을 읽으면서 '감동'이라는 말 밖에는...또 이런 분과 함께 공부해 보면 좋겠다는 바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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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칠 수 있는 용기 - 출간 10주년 증보판
파커 J. 파머 지음, 이종인 옮김 / 한문화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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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초에 파커 파머의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을 읽으며 헤매던 기억이 생생해서 다소 주저함으로 읽은 책인데 미리부터 겁을 먹어 그런지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던 책이다. 전작보다 10여년 후에 쓴 책이라서 쉬워진 건지...
전체 내용은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에서 드러낸 교육 원리들을 구체적으로 해설한 듯한 느낌이 든다.

왜 가르침에 있어 "용기"가 필요할까?
가 르침과 배움의 현장은 온갖 공포로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을까 싶고 학과 지식이 없다는 비판을 받을까 싶고 지루하다는 비판을 받을까 싶고...이것은 학생 입장에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포장된 권위를 가지고 아이들을 억압하는 선생님에 대하여 공포를 갖기 때문에 그들은 '침묵'으로 선생님의 가르침에 응답한다. 이 정도의 공포는 현장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파머는 그 공포에 대한 두려움이 진정한 교육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공포는 가르치는 자의 내적 분열을 조장하고 내적 진실과는 관계없는 연기자로 강단에 서게 한다는 것이다. 내적 진실과 외부적 표현의 간격이 넓어질 수록 우리는 지칠 수 밖에 없고 처음의 열정이 식어 냉소주의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파머는 과감하게 자신의 공포를 인정하라고 도전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공포를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정체성과 성실성이 강화되고 학생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객관론적 교육의 허상을 부수고 관계적인 교육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관계적 지식(relational knowing)은 이제 가장 객관적인 학문이라고 하는 순수과학에서조차도 주창하는 인식론이다. 가르침과 배움의 공간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참여"로 상호의존성 및 상호연결성을 바탕으로 한 진리의 커뮤니티여야 한다. 교사의 열정은 학생에게 향하는 것도 아니고 교육 자체에도 아니고 그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야기의 주제에 맞추어져야 한다. 주제를 그 공간에 한 가운데 둠으로써 교사를 포함한 학생들은 주제 중심의 커뮤니티로 연결되고 상호간의 소통을 통해 교육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제에 대하여 객관적인 지식을 가능한한 많이 습득하여 이것을 단순히 전달하려 하는 객관주의적 교육 방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교사로서의 공포, 두려움을 인정하고 "함께" 공간을 창출하는 관계적 모델의 예가 된다. 이 모델의 실제적인 예를 파머는 교회라 한다. 하나님이라는 영원한 주제에 교역자와 신도들이 함께 헌신하며 주제에 대한 논의와 투신을 함으로써 공동체가 형성되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델이 학교 현장에서도 가능하고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파머의 주장이다.
이런 교육의 시작이 바로 가르치는 자의 내면을 살피는 것이고 자기정체성과 성실성을 회복하는 일이며 이를 도울 수 있는 것이 교사 커뮤니티 안에서의 소통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상황은 교사 커뮤니티 조차도 경쟁관계로 엮여 있어 가장 관계적 소통이 활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기'가 요구되는 웃지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테크닉의 전수가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서 대처방안이 아니라 두려움을 가진 내가 수용되고 용납되는 교사 커뮤니티가 나의정체성과 성실성을 강화시키며 강화된 정체성을 통해서 내적 진실과 외부 현실의 간극을 좁혀보려는 시도가 생기고 이 시도가 교육개혁의 작은 움직임이 된다고 말한다.
제도 개선을 통한 교육 개혁이 얼마나 쓸 데 없는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소위 전수받은 테크닉이 내가 처한 상황에서 그다지 소용없는 일임을 깨닫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교사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연기'가 아닌 참여적 공간으로써 가르침과 배움의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 참 교육 개혁의 실천이고 진보이다.

얼개야 이렇다 치고 본문 구석구석마다 우리의 현장을 꼬집는 그의 통찰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얼마나 먼 길인지 알게 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파머는 말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지성이 아니라 감성이 요구되고 영성이 포기되지 않는 교육의 길이다. 주제에 대한 경이를 회복하고 교육 주체가 두려움을 인정하고 서로를 향한 의존성을 키워갈 때 진정한 교육은 이루어질 수 있다. 꼼꼼히 읽으며 곱씹어도 좋을 만큼의 내용의 깊이와 통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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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bi00 2009-11-08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회복...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첫마음을 회복하는 것..그러나 첫마음의 회복이 쉬운 것이 아니다. 다시금 천착해야 하는 깊은 영혼의 세계를 인정하고 침묵하고 살피고 내다보는 일이 나의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눌 수 있는 신뢰의 서클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Jesus 코드 - 역사적 예수의 도전
N. T. Wright 지음, 이진섭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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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으로 독자를 향해 쳐다보고 있는 표지의 저 사람은 머리에 가시관을 쓴 예수시다. 늘 온화한 상상 속의 예수의 그림만을 보다가 이런 사진을 보니 당혹스럽기는 한데 원제가 The Challenge of Jesus라고 하니 이해할만하다.

『다 빈치코드』때문에 시류에 맞게 제목을 뽑느라 '코드'를 제목에 넣은 것 같은데 '예수의 도전'이 더 낫지 않았을까? 출판사야 한 권이라도 더 팔아야 하니 유행에 민감한 독자들을 위해 '코드'를 삽입했겠지만 그림하고 영~맞지 않는다.

최근 톰 라이트를 깊이 파볼 요량으로 워밍업이 될만한 얇은 책들을 선별해서 읽고 있는데 이 책은 그의 학술 총서가운데 하나인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의 요약 안내서라 한다. 요약이라고 하는 것은 이 책이 1000페이지의 책을 압축한 것이기에 논리를 따라갈 때 난해한 부분이 있음을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이고 안내서라 함은 1000페이지의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를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일터다.

원제를 기준으로 이 책은 예수의 삶이 이 세상에 도전이 되는 이유를 1세기 유대적 관점, 유대적 유산을 최대한 역사적으로 복원하여 제시하려 한다. 그러나 읽으면서 내내 오히려 도전이 되었던 것은 예수를 이해하는 그의 방식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에 주는 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유대적 유산과 배경을 이해하면서 신약성서를 읽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지적 앞에 내가 알고 있던 바는 참으로 미천하고 종교개혁 이후의 교리적 이해 수준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까지 그의 논지에 동의하면서 일세기 유대인들의 세계관과 문화적 유산들을 그의 안내에 따라가면서 "출애굽"이라는 안경으로 바라본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궁극성까지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 예수가 지금 나에게 혹은 현재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는 어마어마한 갭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라이트는 유대적 관점에서 역사적 예수를 접근하고 메시아에 대한 이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신 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18세기 이후의 신 이해에 근거한 신성을 전제하는 개념도 아니고 오로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 속에서 '의미'를 얻는 예수의 메시아성을 말하고 있다. 잠깐 잠깐의 논리적 불연속이 있으면서 여기까지는 참 잘 이해를 했는데 유대적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성취한 예수가 21세기 한국에 살아가는 '나'에게 구원의 주로 선포될 수 있는 논리적 연결이 발견되지 않는 것 같아 끝까지 개운치가 않다.

결국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를 읽어야 하는 건가?

유대적인 세계관 속에서 새 창조의 첫 날을 여신 예수...

그러나 그 예수가 우리에게 어떻게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갑작스럽게 그는 논리적으로 비약해서 덮어 놓고 그가 길게 설명한 유대적 세계관에서 나와 구원의 주로 선포하고 있으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심 리적이고 극히 개인적 차원의 속죄 신학이 '종교개혁'의 산물이지 1세기 예수에게 까지 소급되는 것은 아니라던 그가 결국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그의 사랑을 경험한 자들이 그 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집을 세우는 것이 사명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더욱 미궁으로 빠져든다. 어쩌라는 것인지...

일천한 지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높은 지식을 전하고 있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겸손을 가지고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을 읽어야겠다.

그 래도 톰 라이트가 조금씩 좋아지는 것은 그가 복음주의자이면서 역사적 연구에 비중을 두고 있으며 이해가능한 예수를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학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는 자신의 실존이 덮어 놓고 믿으라고 강요하는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유사 자유주의자라 욕먹고 역사적 연구의 첨단을 달리는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근본주의자라 무시당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소명의 자리가 그 자리라고 고백하고 그 자리에서 '사랑'의 해석학을 통해 예수를 학문적인 책을 통해 매주의 설교를 통해 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참 훌륭한 사람이다. 배우고 싶고 도전받고 싶고...

나의 실존이 그렇지 않은가? 70년대 80년대의 근본주의적 교회 교육을 받고 90년대 종교학이라는 '계몽주의'의 최고봉을 맛보았고 역사적 연구를 통한 성서 이해를 본격적으로 배우길 5년...그래서 더욱 그의 입장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것 같다.

어쨌든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올 여름엔 그가 전하는 예수와 하나님 나라에 빠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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