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 1
N.T.라이트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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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라이트(N.T. Wright)의 단행본으로 워밍업을 하다가 그의 연구의 총체적 시리즈라 할 기독교의 기원과 신에 관한 문제 시리즈 제 1권을 열었다. 5권이 될지 6권이 될지 장담하지 못한 그의 연구서의 처음 책인 본서는 신약성서의 연구 방법론에 대한 그의 입장과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한 전제들을 소개한다. 그 소개를 위해 700여 페이지가 필요하다니 읽는 사람을 조금만 고려해 줬으면 하는 바램이 살짝 들었다.-_-;;

개인적으로 신약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본서는 소위 비평 방법에 대한 상식을 수포로 돌리는 전복적 요소가 있다고 본다. 물론 긍정적인 전복이고 성경을 보다 큰 틀에서 또 통전적으로 읽는데 도움을 주는 방식의 전복이다.
그가 성서를 읽는 방법은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이다. 무려 100여페이지를 이 해석학적 툴을 설명하는데 할애하고 있으나 해석학 역사를 100여페이지에 요약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의 시도가 다소 무모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치우침없이 비판적 실재론의 본질적 메커니즘을 보여주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쓴다. 그의 방법론은 현상학적 방법론(최근 성서 비평의 근저에 깔린 논리)이 아니라 실재론적 관점에 서 있다. 실재론이라 함은 간략히 말해서 성서가 보여주는 세계가 실재했다고 믿는 것을 말하는 데 역사가의 정체성을 가진 라이트가 실재론을 붙잡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범부가 생각하는 성서 세계의 모든 것이 실재라고 생각하는 선상에서의 실재론은 아니다. 분명 그는 텍스트에서 실제의 역사를 분별하며 읽어야 할 필요성을 아는 역사가다. 따라서 텍스트가 드러내는 현실에 비판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론적 전제는 그가 왜 그토록 이스라엘의 이야기에 집착하는지와 역사에 집착하는지 그리고 그 역사 속에 펼쳐진 신의 사역에 관심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 는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접근 가능한 자료에 대해서 '포괄성'과 '단순성'의 원리를 적용해야 함을 역설한다. 역사적 전제 혹은 가설을 수립하기 위해서 하나의 자료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접근 가능한 모든 자료를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 '포괄성'의 원리이며 포괄된 자료들의 연구를 통해 나온 결과는 '단순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가능한 단순한 진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의 신약성서 연구가 보여준 과거 200여년의 역사는 단순성을 추구하며 버린 자료가 너무 많고 포괄성을 추구하다 너무 다양한 결론으로 치달았던 웃지 못할 일의 실제를 보여준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런 전제들을 가지고 우리는 텍스트 자체가 보여주는 문학 세계와 텍스트가 지칭하는 역사적 현실, 그 현실에 대한 이면으로써의 신학을 포괄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는 이러한 모든 전제들을 포용하며 연구하는 처음을 세계관에 대한 담론으로 시작한다. 세계관은 곧 이야기로 형성되고 그 이야기는 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시키며 공동체에 상징을 부여하고 그 상징을 통한 실천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실증주의적 역사연구가 실천에 머물렀기 때문에 폐단을 초래한 것이고 우리는 그 실천을 만들어 낸 상징과 상징이 지칭하는 이야기의 세계에 관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이스라엘의 큰 이야기 배경 속에서 펼쳐진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전의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지 않고 신약성서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 된다.

그는 신약성서를 읽기 위한 이전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특별히 1세기 유대교의 실상을 역사가의 입장에서 진술한다. 유대교가 아닌 "유대교들"로 존재했던 격동의 시기에 태동한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한 당연한 연구이며 이들이 가졌던 이야기, 상징, 실천. 그리고 그들의 신앙과 역사와 분리될 수 없는 소망들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서술한다. 이렇게 지리한 배경사를 그가 서술한 이유에 대한 의문은 제 4부 기독교의 제1세기를 읽으면서 해소된다. 기독교의 이야기와 상징, 실천들이 유대교의 그것과 얼마나 닮아있고 어떻게 그것을 전복시키고 있는지...

복 음서의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이 바울의 서신 조차도 상식처럼 헬라적 요소가 반영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근저에 유대적 음조를 가진다고 말하는 그다. 소위 선교를 위해서 유대적 그림을 헬라화 시켰다고 알고 있는 우리의 이해에 의의를 제기하며 선교의 추동은 '동화'가 아니라 신앙 자체-"이스라엘이 이제 구속되었고 이방인들을 위한 때가 도래(p.736)-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선교지에 가서 비쳐진 기독교는 여전히 신앙적 요구사항과 도덕적 기준이 이교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만일 선교적 목적으로 동화되어 헬라화시켰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역사가 보여주는 기독교의 인상을 설명해야 한다. 비판적 실재론의 예를 살짝 맛보는 대목이다.

불트만을 소위 신약학계의 수퍼스타로 부상시킨 양식비평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읽고 있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날이 섰다. 양식비평은 예수가 아니라 초기교회의 신앙과 삶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 때문에 실제 기독교를 태동시켰던 예수의 삶과 역사는 주변적 사건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은 양식비평이 분명 유용한 툴이지만 포커스의 조정이 필요하며 양식비평이 얼마나 상상 속의 가설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폭로한다.
이 어 등장한 편집비평 역시 역사와 무관한 텍스트의 전승층을 구별하고 이를 지지하기 위한 상상력의 나래를 너무 활짝 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대표적인 예로 재림 지연이 텍스트 형성에 미친 영향에 대한 편집 비평적 연구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가설 위에 세워졌는지를 보여준다.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서 실망해서 교회를 떠났다거나 하는 역사적 자료는 3세기가 될 때까지도 등장하지 않는데 유독 복음서의 형성기에 재림 지연이 문제가 되어서 편집적 요소가 개재되었다는 것이 넌센스라는 거다.
그 렇다면 우리는 더욱 역사를 한 손에 잡고 우리의 텍스트인 신약성서를 읽어야 할 필요를 절감한다. 유대의 역사는 신약성서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고 신약성서의 이야기를 통해 구약은 성취의 역사로 읽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철저한 유대교적 배경 속에 있던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분기된 지점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다. 예수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유대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근본적 차이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예수에 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고 2권의 내용이다.

700 여페이지의 빼곡한 학문적 연구를 요약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고 내게는 이정도의 큰 그림만 갖게 된 것도 보람이고 행운이다. 얼개를 보니 교회에서 당연하게 가르치는 큰 골격과 다르지 않지만 이 골격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변증이 필요한지...
양 식비평, 편집비평, 전승사 비평, 현대의 포스트모던 비평까지 툴로서는 손색이 없지만 포커스가 제대로 맞추어져 있지 않으면 얼마나 해악이 되는지에 대한 그의 지적은 조금이나마 신약학을 맛본 나에게는 일종의 경종이된다. 이 한권을 읽으면서 '감동'이라는 말 밖에는...또 이런 분과 함께 공부해 보면 좋겠다는 바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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