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전출처 : 로쟈 > "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사이버과시족'에 관한 기사가 어제 경향신문의 기획기사였는데(요즘 가장 다이내믹한 신문이다), 생각을 더 보태서 옮겨놓을까 하다가 일단은 자료로서 스크랩해놓는다. 그냥은 멋쩍으니까 나대로의 '과시'를 덧붙이자면 '인정'과 '인정투쟁'에 관한 책들을 이 참에 읽어보시라는 것. 그게 <정신현상학>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까지 이어지면 과시란 것도 전혀 만만하지 않은 것이 되겠지만.

 

 

 

 

경향신문(06. 11. 09) 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 ‘사이버 과시족’

직장인 김모씨(26)는 외식할 때 카메라가 없으면 안절부절못한다. 멋진 분위기의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게 생활화됐기 때문이다. 누구나 흔히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나 체인점 음식은 사진을 찍어 올리지 않는다. 조금은 특별하고, 남들과 다른 자신의 선택을 과시할 수 있는 음식만 찍는다. 주말에 좋은 식당을 찾아 음식을 먹고 일요일 저녁이면 간단한 작업을 거쳐 블로그에 올린다.

월요일이면 친구들은 김씨의 블로그를 찾아 “맛있겠다” “어디냐? 가격대를 가르쳐달라”고 리플을 단다. 김씨는 “음식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을 때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리플을 통해 나만의 가치있는 선택을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신(神)에 의한 인정을 중시하던 중세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는 근대 철학의 자신감 넘치는 출발점이었다. 이어 프랑스 철학자 메느 드 비랑은 데카르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나는 의욕적이다, 고로 존재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데카르트나 비랑의 선언을 패러디해 21세기 한국의 인터넷 세상을 묘사해보면 어떨까. “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사이버 스페이스의 유목민들은 이 광대한 공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부모, 형제,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채 꺼내지 못한 얘기를 얼굴도 모르는 인터넷 저편의 네티즌에게 건넨다. 그러나 단순히 자신의 사생활을 미주알고주알 드러내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현대인들은 타인의 비루한 일상을 꼼꼼히 챙길 만큼 한가하지 않다. 남들과 똑같아서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 남들과 조금은 다른 자신의 특별한 취향을 드러내기. 드러내는 사람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독특한 것이 결국은 사람의 이목을 끈다.

세계 최대의 동영상 공유 커뮤니티 유튜브는 1억건, 한국 최대인 판도라TV에는 85만건의 동영상이 하루에 올라온다. 그 중 네티즌의 이목을 끄는 건 극소수다. 오프라인에서 마주쳤다면 ‘미친놈’ 소릴 듣기 딱 좋은 황당한 퍼포먼스 정도가 돼야 네티즌들은 환호한다. 전세계를 돌며 우스꽝스러운 막춤을 춰서 인기를 얻은 미국 청년도 있고, 인기 가요에 맞춘 어설픈 립싱크로 인기인이 된 한국 청년도 있다.

블로그도 마찬가지다. 프로페셔널을 뺨치는 아마추어들이 예민하게 갈고 닦은 취향의 집적물을 전시한다. 방대한 DVD나 CD컬렉터들이 남들에게는 없는 리스트를 자부하면서 내밀고, 대중 앞에 내놓기 쑥스러워 골방에서 그려냈던 그림을 광활한 네트 갤러리에 전시한다.

유치하다고 해도 좋고, 어설프다고 해도 좋다. 다만 이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고, 그 취향을 인정받아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고픈 당연한 욕망의 발로다. 공자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닌가”하고 말했다지만, 이는 사람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점을 돌려서 말한 데 불과하다. 새로운 세대의 족속들의 손에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가 쥐여졌다. 최신형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빠른 통신망을 탄 채, 우리는 우리를 드러냄으로써 타인의 시선을 갈망한다. 외로우니까, 나 하나만으로는 외로우니까.(백승찬 기자)

06. 11. 10.

P.S. 마지막에 '외로우니까'란 멘트는 감상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저널리스틱한 것이지만 문제를 축소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인정'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면서 존립/존재에 관한 문제이기에 그러하다. 그러한 인정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애니멀'이다...

P.S.2. '인터넷 나르시시즘'에 대한 문화학자의 진단을 덧붙인다. 같은 기획기사의 하나이다.

경향신문(06. 11. 09) 소통·공유·행복 ‘인터넷 나르시시즘’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르키소스’라는 미소년 이야기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숲으로 사냥을 하러 갔는데 옹달샘에 비친 자신의 몸에 반해 먹지도 않고 자기 얼굴만 보다 말라 죽은 후 한 떨기 수선화가 되었다. 19세기 말 독일의 정신과 의사 네케는 나르키소스의 신화를 차용해서 리비도의 대상이 자신이 되는 심리상태를 ‘나르시시즘’으로 명명했다. 한 마디로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 말이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자기 과시에 몰입하는 네티즌들의 원형 서사 같아 보인다. 나르키소스의 옹달샘이 자기도취의 거울이었다면 네티즌들에게 그것은 바로 ‘블로그’ 혹은 ‘미니홈피’쯤 될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멋진 자신의 얼굴을 옹달샘에 비추듯, 네티즌들은 자신들이 만든 멋진 콘텐츠를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올린다.

자신이 만든 특이하고 맛깔난 음식 정보를 블로그에 올리는 ‘가정주부들’. 디지털 카메라로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직접 찍어 미니 홈피에 올려놓은 ‘셀카족들’. 취미가 유사한 익명의 네티즌들에게 자신만의 고유한 정보를 제공하며 즐거워하는 네티즌들. 이들이 우리 시대 인터넷 나르시시즘의 주인공들이다.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의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익명의 네티즌들과 공유하길 원하는 이들은 자생적인 공간에서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고 유통, 소비하는 ‘생비자들’(prosumers)이다.

디지털 시대 콘텐츠 생비자들은 근대적, 물리적 공간에서의 자기도취자들과는 다른 욕망을 꿈꾼다.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사모님들’이나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며 주말에 고급 사교파티를 즐기는 ‘문화귀족들’의 자기과시는 오로지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다. 일반 서민들이 이들을 재수 없게 보는 것도 타인과의 소통과 공유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터넷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소통과 공유를 원칙으로 한다. 맛있는 해물 떡볶이, 내가 만든 가구, 알콩달콩한 우리가족 이야기, 이 모든 정보는 내가 잘났다는 과시이기에 앞서, 익명의 네티즌들과 소통의 기쁨을 공유하려는 소망을 담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만족을 위해 만든 콘텐츠라 해도, 타인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이른바 ‘댓글의 행복’이 없으면 인터넷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터넷에서 자기과시는 하나의 게임이다. 마치 고대 원시 부족사회에서 행해졌던 ‘포틀래취’(potlatch) 선물 게임처럼,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도전과 응수를 위한 반복적인 게임이다. 내가 맛있는 ‘해물 떡볶이’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블로그에 올리면, 누군가가 더 맛있어 보이는 ‘치즈 떡볶이’로 응수하고, 다시 나는 최고로 맛있어 보이는 ‘카레 떡볶이’로 도전하는 게임 말이다. 게임의 장에 참여한 유저들의 도전과 응수는 배타적, 폐쇄적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개방적, 다방향적 나르시시즘이다.

오로지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다른 유저들과 소통하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내하는 것은 블로그가 주는 일상의 행복과 천상의 기쁨 때문이다. 어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한 ‘해피해피 라이프’라는 네티즌 참여 코너의 사례처럼, 아기자기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탈권위적이면서 자기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다.

물론 유저들이 만든 콘텐츠가 모두 사심 없는 것은 아니다. 네티즌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특정 연예인들을 조롱하고 희화화한다거나 아니면 스스로 연예인이 되고 싶어 댓글 자작극을 벌이는 현상들도 일어난다. 인터넷 자기과시 행동이 지나칠 경우 오직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려 인터넷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어떤 정치인들은 애초부터 진정한 정보 소통에는 관심이 없고, 의정활동을 위한 홍보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적인 정보들이나 미니홈피의 ‘디카놀이’ ‘일촌 놀이’들이 사이버 커뮤니티를 지극히 개인화하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로부터 도피하려는 정치적 불감증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인터넷에서 자신을 뽐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직하고 열정적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자생적 콘텐츠는 무기력증에 빠진 가정주부들에게 생활의 활력소를 준다. 이제 부엌과 거실은 가사노동의 현장에서 풋풋하고 따근따근한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스튜디오로 전환된다. 인터넷 나르시시즘이 가정주부들에게는 가사의 불평등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자기 최면술일 수도 있지만, 가사의 반란을 꿈꾸는 쾌락의 에너지일 수도 있다.

소비 자본주의 시대 상품화된 나르시시즘은 결핍에 대한 편집 증세를 보인다. ‘명품중독’과 같은 상품 나르시시즘의 욕구는 끝이 없다. 소통과 공유를 위한 인터넷 유저들의 대중 나르시시즘은 비록 폭력과 집착의 위험성을 갖고 있지만, 타인에 대한 에로스의 열망을 담고 있다. 자신이 만든 정보를 미치도록 소통하고 공유하고 싶은 에로스적 욕망, 물질적 보상은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인터넷 나르시시즘은 행복하다.(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

(*)하지만 이 '행복'은 쾌락원칙의 경제 안에 있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 아닌가? 그 경제를 넘어선, 주이상스 곧 향략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은 때로 인생을 망치고 거덜낸다. '자기도취'의 이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하늘연못 > 잘 먹어야 잘 산다에서 덜 먹어야 잘 산다로!
누구나 10kg 뺄 수 있다
유태우 지음 / 삼성출판사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동양의 법 사상을 연구하던 선생님께서 노자를 가르치시면서 늘상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여보게. 자네들은 비싼 수강료를 낸 강의가 좋은 강의고 배우는게 많다고 하지? 그런데 말일세. 내가 생각해 보니까 비싼 강의는 그때는 좋을지언정 자신의 삶이 바뀌는 건 별로 없다네. 되도록 싼 강의, 되도록 돈이 들지 않는 강의, 아예 돈이 필요없는 이야기를 들어보게. 습관이 변하고 삶이 변한다네. 그래서 돈을 요구하지 않는 강의가 참 강의라네."

느닷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시겠지만, 이 책 내용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 책은 비싼 다이어트 음식을 먹으라고 하지도 않고, 헬스 크럽 회원권을 사라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적게 먹으라고 이야기 한다. 많이 먹는 습관이 달라지지 않는 한 다이어트는 성공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그래서 이 책의 핵심은 이거다. " 잘 먹어야 잘 산다에서 덜 먹어야 잘 산다로 마음을 고쳐 먹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부터 당장 반만 먹어라." 6개월만 반만 먹는 반식에 성공한다면 위가 줄어들어 더 먹으려고 해도 부담스러워진다. 그날까지 참아라.

국민 3명중 1명이 비만이라고 한다. 얼마 후에는 지구를 지배한다는 비만인이 되는 까닭은 기본적으로 음식을 많이 먹고 활동량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음식을 통해 섭취한 칼로리는 그날그날 운동과 활동으로 다쓰지 못하면 고스란히 지방으로 우리의 배와 피부 밑, 혈관에 쌓이게 된다. 참고로, 채식만 하더라도 많이 먹으면 비만인이 되는 것은 그 큰 소나 코끼리가 풀만 먹고도 엄청난 덩치가 된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또 술을 먹으면 비만인이 되기가 더 쉽다. 밥 한 공기가 300Kcal인데 소주 1병은  660Kcal, 맥주는 240Kcal, 양주는 2000Kcal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술을 마시면 별다른 활동없이 잠을 자기때문에 체지방이 부쩍 오른다. 저녁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신다면 무려 8시간을 마시는 것인데 10000Kcal 즉 밥 33공기에 해당하는 칼로리를 축적할 수 있다. 따라서 일주일에 2번만 술을 마셔도 왠만한 운동광이 아니고서는 아랫배의 살을 빼기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1시간 동안 계속 달릴 때 600Kcal가 소모되는데,결국 소주 1병의 칼로리를 태우기 힘든 셈이다. 따라서 술꾼은 비만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먹는 음식을 그대로 먹는 한 아무리 운동을 해도 비만인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많은 칼로리를 먹고 적게 칼로리를 태우기 때문에 비만이 되지만, 운동을 해서 많이 태우기는 힘들기 때문에 적게 먹기를 우선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을 마치고 먹는 커피 한잔에 비스켓 2개, 포카리 스웨트에 빵 하나, 배고파서 먹은 밥 한그릇, 맥주 한잔에 땅콩 몇 개는 모두 300칼로리를 훌쩍 넘는다. 30분동안 쉬지않고 달린 노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 것이다.

유태우 다이어트의 핵심은 반식, 즉 그대로 먹되 모든 것은 다 반만 먹으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밥 한 공기와 깍두기 두개를 먹었다면 오늘부터는 밥 반 공기와 깍두기 한개만 먹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석달을 보내고, 석달후부터는 걷기등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다시 석달을 보내면 위장이 줄어들어 다이어트에 성공하게 된다. 여기서 이 다이어트의 보이지 않는 특징을 볼수 있는데, 몸무게가 줄은 것을 다이어트의 성공으로 보지 말고, 위장이 줄은 것을 다이어트의 성공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몸무게는 줄여봤자 위장이 그대로 식습관을 유지하는 한 요요현상에 시달리게 된다. 위장이 줄어들어 먹을려고 해도 거북해야 다이어트에 성공한 것이다.

참고로 유태우 다이어트에서 반식만으로 체중이 충분히 줄지 않는 사람을 위해 권장하는 운동을 적어본다.이 역시 돈 안드는 다이어트여서 좋은 느낌이 든다. 돈은 들지 않지만 노력과 땀을 요구하는 방법인데 헬스클럽 같은 특정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라 생활 속에 습관을 바꿔나가자는 것이다.

1. 쿠션이 좋은 운동화를 가방에 넣고 다니다 기회만 되면 걷는다.

2. 집에서 직장까지의 거리가 가깝다면 걸어 다닌다.

3. 5층 이하는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을 이용한다.

4. TV드라마를 보면서 러닝머신, 윗몸일으키기, 팔 굽혀펴기 등의 운동을 한다.

5. 고층 아파트에 산다면 계단 내려오기를 생활화한다.

6. 외출시 버스를 탈 때는 한 정류장 미리 걷고 타거나 미리 내려 걷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sayonara > 성공한 사람들의 10가지 비결

[주간조선 2003-11-04 14:16]

인생역전! 한판승

① ‘이거다’ 싶으면 과감히 덤벼라

② 사람들과 ‘인간적’ 관계를 유지하라

③ 최소 1년 이상 철저히 준비하라

④ 직원들에게 먼저 모범을 보여라

⑤ 하고 싶은 일, 잘 하는 일을 택하라

⑥ ‘인생 전체’를 놓고 철저히 계획하라

⑦ ‘창업’만이 유일한 길은 아니다

⑧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라

⑨ 인맥이 없으면 적극적으로 만들라

⑩ 당연한 말 한 가지… 최선을 다하라

어느 날 갑자기 내게 명퇴가 닥친다면? 부득이하게 현재의 직장과 직업을 그만두어야 한다면? 명퇴와 감원이 새삼 직장인들의 최대 화두로 등장했다. 경기침체로 인해 IMF에 버금가는 감원 태풍이 몰아치면서 직장인들의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이 때문에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제2의 인생은 어떻게 개척해야 하나 등에 대한 상념들이 불안감과 함께 많은 직장인들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다.

현 직장과의 이별은 샐러리맨의 숙명이다. 그것이 명퇴든 정년퇴직이든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30대까지 명퇴 대상이 되고 있으며 정년퇴직을 해도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할 만큼 평균수명이 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인생역전’의 방법은 없을까.

이에 준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선배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먼저 매를 맞은 직장인, 먼저 거센 풍파를 헤치고 인생역전에 성공한 사람들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다. 이들은 굳이 로또복권이 아니더라도 인생역전이 실현가능한 일임을 웅변하고 있다. 회사원, 대기업 간부, 공무원, 군인, 은행원, 홍보실장, 이사급 연구원, 자영업자, 의사, 기자 등에서 인생역전에 성공, 새 인생을 살고 있는 10인을 만났다. 이들은 “본인의 노력과 대비 여하에 따라 인생역전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노하우가 있다”고 말한다.

“매출 목표 200억원” 기업 대표된 샐러리맨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골프용품 유통업체 임팩트매니지먼트㈜를 운영하는 조진현(45) 대표는 6년 전인 1997년 4월까지 SK글로벌의 화학본부 사업팀장이었다. 샐러리맨이었던 그가 불과 6년 만에 골프 연구소까지 갖추고 내년 매출 200억원을 목표로 하는 업체 대표로 변신했다.

1983년 입사, 동기들 중 선두를 달렸던 그가 사표를 내자 회사가 발칵 뒤집어졌다. 사장은 4개월 간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만류했다. “1996년 계열사인 SK인더스트리가 거의 업계 최초로 명퇴를 실시하는 것에 충격받았습니다. 언젠가는 내게도 닥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승진이 빨라 직장생활이 지겹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라 인생행로를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자신이 좋아하는 골프 관련사업. 말레이시아 지사 근무 때 골프에 입문, 핸디 5의 애호가인 그는 이왕이면 전문가로 새출발하기로 결심했다. 40세에 집을 팔아 미국 샌디에이고 SDGA골프대학(골프경영학 전공)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여기에는 유창한 영어 실력도 한 요인이 됐다.

하지만 생활이 빠듯해 부인은 현지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자신도 한 학기를 쉬며 학비를 마련해야 했다. 새벽 3시까지 열성적으로 공부한 결과 1999년 8월 3.87점(4.0 만점)이라는 최고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거의 빈털터리 수준. 국내에 집 구할 돈이 없어 식구들을 미국에 남겨 놓은 채 단신 귀국, 방송국 골프 해설위원으로 새 인생을 시작했다.

2000년 4월 투자자들과 함께 현 업체를 설립한 그는 “처음에는 이 업계에 인맥이 없어 고전했다. 그러나 골프 지식과 성실성ㆍ친화력 등으로 인맥을 형성, 이제 ‘군단’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유학을 마치면 수중의 돈은 거의 다 떨어진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골프 지식이 새 출발에 큰 자산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과감히 투자했습니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교수 등 같이 공부한 미국인 동창들이 ‘한 직업만으로 평생을 살면 얼마나 지루하겠느냐’며 모두 ‘커리어 체인지(career change)’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의사 사표… 매출 400억원 벤처사 대표로

직원 110명, 올해 매출액 400억원. 제대혈 관련 생명공학기업 메디포스트 양윤선(39) 대표는 2000년 8월까지 6년 간 삼성서울병원 임상병리과 의사(교수 겸직)였다. 서울대 의대를 수석 졸업한 양 대표가 안정적인 교수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럽고 매우 쉬운 일이었다. 그런 그가 하루 수십 개 업체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벤처기업 대표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더 나아가 내가 해 보고 싶은 일에 전념해서 더 의욕적으로 일하고 싶었습니다. 대학병원 시스템에서는 내 일을 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양 대표의 창업에는 10년 이상 병원에서 쌓았던 경험들이 기반이 됐다. 그러나 직업 속성상 교수가 벤처사업가로 변신했다는 점은 큰 변화다. 특히 그는 수많은 벤처기업, 바이오업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와중에 회사를 10배 이상으로 성장시켰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지금은 항상 아슬아슬한 전쟁터에 놓여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양 대표는 “평소 비즈니스에 흥미가 많았기 때문에 재미있게 일한다. 힘들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낙천적으로 일한 것이 오늘에 이른 큰 요인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양 대표는 초창기 시설투자비가 많이 들어가 자본금을 소진할 때까지 수익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해 고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새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기술이 중심이 되는 벤처기업의 경우 구체적 수익모델이 완성됐을 때 창업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난관을 특유의 친화력으로 돌파했다고 한다. “업무상 만나는 사람들과 사업적 이해관계를 떠나 인간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내게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회가 되면 나도 돕겠다는 자세로 임해 왔습니다. 이같은 인간관계가 새로운 분야, 새 형태의 사업을 이해시키고 협조를 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기자에서 한의사로 극적 ‘대변신’

서울 강남구 대치동 황앤리한의원 황치혁(40) 원장은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한의사로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신문기자와 한의사 사이에는 약 10년에 걸친 시간적 공백이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 82학번인 황 원장은 1992년 하반기까지 약 4년 간 한국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힘들다는 ‘언론고시’를 통과해 경제부 체육부 등에서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일하던 그에게 인생역전의 계기가 찾아온 것은 1992년 3월쯤. 갑자기 심장부위 통증과 함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일을 겪었다.

대학병원의 종합진찰 결과 “아무 문제가 없다”는 진단이 나왔지만 선친이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그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또 항상 피로에 절어 힘들어 하는 선배들의 모습도 그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10~20년 뒤 나도 저렇게 힘들어 하면서 살아야 하나….’

그는 수개월 고민하고 가족, 선배, 친지들과 상의한 끝에 한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신의 건강문제에 대한 우려도 한 요인이 됐다. “처자의 생계를 책임진 상태에서 한의대 입시 준비를 해야 하는 형편이라 우선 물려받은 39평 아파트를 팔아 22평짜리 전세로 옮겼습니다. 이후 학원과 독서실을 오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도중에 자영업을 하기도 했던 그는 두 번째 도전에서 경희대 한의대 97학번으로 입학했다. “6년 간 재학 중 줄곧 과외를 했음에도 매달 100만~200만원씩 까먹어 물려받은 아파트를 완전히 날렸습니다. 그러나 돈보다는 졸업 후 어떤 한의사가 될 것인가에 대해 더 고민했습니다.”

올 4월 개원한 황 원장은 두 번에 걸친 입시와 오랜 과외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수험생 전문 클리닉으로 특화,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이미 4권의 수험생 관련 서적을 출간하기도 했다. 건강문제 때문이었지만 퇴사할 때 ‘도태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는 그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때에는 최소 1년 이상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패밀리 레스토랑 대표된 회사원

샐러드 전문 패밀리 레스토랑 운영자 세븐스프링 한준(39)씨는 1997년 IMF 여파로 7년 간 일했던 직장을 떠나야 했다. 이랜드 식품사업부에서 근무하던 한씨는 자신이 하던 일과 같은 업종을 선택해 새 출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퇴직 후 3년 간 피자 프렌차이즈 사업을 구상하기도 했지만 피자 가게가 워낙 많아 경쟁이 버거워 포기하기도 했다. 세븐스프링 1호점이 강남에 문을 연 것은 2002년 3월 18일. 투자자를 모집하고 신용대출을 받아 힘들게 돈을 모아 사업을 시작했다. 약 1년 5개월이 지난 올 8월 25일 여의도에 2호점을 열었다. 현재 세븐스프링 하루 매출액은 약 1500만원 정도. 그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세븐스프링의 경쟁력은 헬프서비스입니다.” 보통 패스트푸드점은 고객이 직접 가져다 먹는 셀프서비스, 호텔 고급 레스토랑은 종업원이 모든 시중을 드는 풀 서비스 혹은 테이블 서비스를 실시한다. “기본적으로 셀프서비스 시스템으로 매장을 운영하지만 손님이 원한다면 풀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또 샐러드를 맛있게 먹는 법을 아는 분이 적기 때문에 종업원들이 고객 옆에 붙어서 어드바이스를 합니다. ‘이 야채에는 이 소스를 뿌리면 좋다’ 이런 식 입니다.” 헬프서비스란 단어는 세븐스프링에서 직접 만든 단어다. “헬프서비스는 토론 끝에 나온 아이디어입니다. 남과 다른 우리만의 장점 없이 경쟁에서 이길 수는 없습니다.”

“다 때려치우고 음식점이나 하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외식산업이 3D업종이라고 말했다. “손님 중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상대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사장이니까 시키면 된다고 생각하면 망합니다. 종업원들은 사장이 하는대로 합니다. 직접 설거지를 하고 화장실도 치워야 합니다.”

공무원 진급 앞두고 사표… 등반업체 차려

아시아트랙킹닷컴 이상배(49) 대표는 1994년 14년 공무원 생활을 접었다. 당시 그의 직책은 경남 양산 시청 주사보 계장 진급을 앞둔 시점이었다. 그가 공무원을 그만둔 이유는 산, 그것도 8000m 이상의 높은 산에 오르고 싶어서다.

“1990년부터 해외에 나가 높은 산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공무원이 일주일 이상 휴가를 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해외 고산 등반은 보름 이하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결국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정된 직장을 버렸다.

처음 시작한 일은 건설 하청업. 작은 회사라도 사장은 원하면 산으로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감을 준 업체에서 사장이 장기 해외 여행을 나간다는 것을 좋게 보지 않더군요.” 사장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그리고 아예 산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루는 회사를 만들었다. 아시아트랙킹닷컴은 등반 장비 판매, 등반 가이드, 패러글라이딩 장비 판매 및 교육 사업을 한다. 예를 들어 경험이 없는 등산 동호인을 고산 적응 훈련을 시켜 히말라야,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 등에 올라가도록 도와 준다.

“8000m 이상 산에 오른 것이 6회입니다. 내 인생관은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후회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수입이요? 공무원 때보다는 2배 정도 많습니다.”

물론 안정적인 생활을 외면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공무원하다 나오니까 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공직사회에 있으면 자기 업무만 하면 끝입니다. 아무래도 공직에 있으면 권위주의적 마음이 생깁니다. 남들이 와서 굽신거리니까요. 그러나 반대로 사업은 내가 허리를 숙이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씨는 힘들 때마다 목숨을 건 등반을 할 때를 생각한다. “더 힘든 일은 없습니다. 약한 마음이 사라지지요.”

그는 내년 8월 50세 때 세계에서 6번째로 높은 8201m 초오유 정상에서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내려올 계획이다. “등반의 진수를 맞보려면 3000m 이상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주 5일 근무로 레저의 시대가 열립니다. 앞날은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성공비결은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을 선택해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고교시절부터 산악반 활동을 해 온 이씨는 산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다. “일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항상 정열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행원서 변호사로 ‘업 그레이드’

인천에서 개업하고 있는 남궁평(39) 변호사는 1983년 서울여상을 졸업했다. 이후 주택은행에 취업, 10년 간 평범한 은행원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92년 동기들보다 5살 많은 ‘언니’로 성균관대 법대에 입학, 1996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1999년 사법연수원 수료 이후에는 기업법무를 담당하다 2002년 11월 인천 지방법원 인근에 개인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 가정문제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남궁 변호사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한 것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1남 3녀 중 둘째딸. 그러나 남궁씨는 “아쉬운 건 사실이었지만 그 때는 다 그랬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단순한 일을 반복해야 하는 은행원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또 화려한 집안 배경이 없는 상황에서 노력으로만 성공할 수 있는 일을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목표가 사법시험.

직장을 그만두고 학력고사를 치르고 25살에 성균관대 법대에 입학해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대학 등록금은 4년 내내 받은 장학금으로 해결했지만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일은 대학 입학처럼 순조롭지 않았다. 남궁씨는 “경제적인 것도 문제였지만 평소 약골 소리를 듣던 몸으로 고시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1994년 1차 시험 합격 후 이듬해 응시한 2차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가 가장 큰 위기였다. 하지만 남궁씨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고시에 도전해 1996년 38회 사법시험에 동차(한 해에 1·2차 시험을 동시에 합격하는 것)로 합격했다.

남궁씨는 늦게 공부를 시작하면서도 조급하게 결과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상황에 맞는 공부 스타일을 찾은 것을 성공의 비결로 꼽았다. 남궁씨는 또 고시 합격을 통해 인생역전을 꿈꾸는 직장인들에게 “고시는 원래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 인생의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서 도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최연소 이사에서 컨설팅회사 대표로

한스컨설팅 한근태(47) 대표는 졸업 후 연구원 생활을 하다 국비장학생으로 미국 애크론대에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고분자공학 전공)를 받았다. 이후 1989년 대우자동차에 차장으로 입사해 39살에 최연소 이사가 됐다.

직장 내에서 초고속 승진을 하던 한씨가 대기업 이사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유는 ‘샐러리맨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한씨가 대우자동차 이사로 재직했던 1997년, 회사 임원들이 미국으로 최고경영자 과정 연수를 떠났다가 연수가 끝날 무렵 골프를 친 것이 사내에서 물의를 빚었다. 임원들이 연수 중 골프를 쳤다는 사실이 김우중 회장 귀에 들어가 전원 인사조치가 내려졌던 것. 한씨는 “그 사건을 보니까 ‘대기업 이사도 어쩔 수 없는 월급쟁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 회사를 창업해야 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말했다.

이후 한씨는 대기업 이사를 지내며 익힌 경영마인드를 바탕으로 경영컨설팅 회사를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한씨의 시작은 불안했다. 일을 배워 보겠노라고 컨설팅 회사에 들어갔지만 경험이 부족했던 한씨의 한 달 월급은 고작 60여만원. 한씨는 월급통장을 보고는 ‘괜히 홧김에 대기업 이사 자리를 관둔 것은 아닌지’ ‘아내와 아이들을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있을지’도 고민했다.

그러나 한씨는 2년 간 묵묵히 미래를 위한 투자를 했다. 그리고 1999년 핀란드 헬싱키대학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하고 2002년까지 한국리더십센터 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켜 나갔다. 그리고 2002년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스컨설팅’을 창업했다. 한씨는 “창업 1년 후 매출액은 10억원에서 조금 부족한 정도인데 이 정도면 순조로운 출발”이라고 평가했다. 한스컨설팅은 대기업을 상대로 리더십 강좌와 조직내부 문제 해결 등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한씨는 컨설팅뿐 아니라 한경비즈니스의 고정 칼럼니스트를 비롯해 각종 매체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한씨는 “창업 후 내 능력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해 투자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며 “이전에 몸 담고 있던 회사에서 인맥과 노하우를 최대한 쌓은 것이 이 바닥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소개했다. 한씨는 또 “반드시 창업을 해야 성공한다는 생각은 금물”이라며 “직장 내에서도 충분히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을 달성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호텔 홍보실장 그만두고 교수로

수원대학교 호텔경영학과 우경진(39) 교수는 1991년 대우그룹에 입사, 힐튼호텔 홍보실장으로 근무했다. 근무환경도 급여도 괜찮은 직장이었지만 1996년 9살 터울의 둘째 아이를 갖게 되면서 회사를 그만뒀다. 평소 체력이 좋지 않았던 우씨에게 육아와 직장을 병행한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우씨는 아이를 놓고 1년 간은 육아에 매달리다 1998년 다시 교수로 화려한 컴백을 했다.

우씨는 출산과 함께 직장에서 밀려나야만 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기 좋게 깨뜨린 경우다. 우씨는 호텔에서 근무하면서 경희대로 야간 강의에 출강하면서 교수직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씨는 “내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지에 대해 반신반의 했는데, 막상 강의를 나가 보니 가르치는 일이 즐거웠고 학생들의 호응이 의외로 좋은 것을 보고 교수라는 직업을 꿈꾸게 됐다”고 말했다.

출산 이후 우씨는 다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이 둘을 둔 아줌마가 다시 직장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전 회사로 다시 복귀는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인생에 변화를 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러던 중 몇몇 대학에서 호텔경영학과 교수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지원해 1998년 단박에 교수로 임용됐다. 호텔에서 쌓은 실무경험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몸에 배어 있는 호텔리어의 매너가 면접장에서 통했기 때문이다.

초임 대학 교수의 연봉은 호텔 홍보실장 연봉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우씨는 “돈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익힌 경험과 이론을 접목할 수 있어 진정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게 교수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우씨가 말하는 성공 비결은 ‘변화에 대한 확신’. 우씨는 “인생의 진로를 변경할 때마다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경했을 때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도전한다면 성공 가능성은 높아지게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장교에서 수억원 연봉 보험사 지점장으로

매트라이프 생명보험 서울 삼성동 스타지점장 김성환(32)씨는 이 회사의 스타 가운데 하나다. 입사 이후 영업사원 시절 실적 경쟁에서 늘 전국 1~2등을 다투었다. 그는 입사 전 1999년까지 군인이었다. 중대장인 대위로 군생활을 마치고 회사에 들어갔다. 다른 회사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보험 영업이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다.

현재 200명 직원을 거느린 김 지점장은 “한창 영업 일선에서 뛸 때 연봉이 수억원이었다”고 말했다. 김 지점장은 자신이 얼마나 받았는가를 밝히기를 꺼린다. 그러나 대충 짐작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회사 관계자는 “현재 영업 직원 가운데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사람은 7억원 정도를 번다”고 말했다.

“군을 나서기로 작정을 하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신문 경제면에서 증권, 부동산 관련 기사를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그는 입사 5개월 후 제주도로 내려갔다.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똑같이 일하면 다른 영업사원들에게 뒤지더군요. 10명에게 상품을 판 돈이 남이 한두 명에게 판 것과 같았습니다.” 제주도를 찾은 이유는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한 번 부딪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부유한 전문직 종사자인 의사들을 겨냥했다. 무조건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 의사들에게 보험 가입을 권했다. 그렇게 북으로 북으로 진격했다. 마지막 도착지는 인천. 기간이 1년이나 걸렸다. 확보한 의사 고객이 200명에 달했다.

“의사 200명을 고객으로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들었지만 점차 내공이 쌓이더군요. 요령이 생겨 미리 편지를 보내게 되고, 편지 안에 복권을 넣게 되고….” 그는 “의사를 만날 때 진료권을 끊고 들어갔다”고 한다. “시간이 돈인 사람들입니다. 그 정도는 예의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의사들 사이에 전국을 도는 보험 영업직원이 있다는 소문이 났다. 만 2년 영업을 하는 동안 434명의 고객을 확보했다.

그는 또 지금 영업 사원에서 관리자로 변신에 성공했다. 삼성동 스타지점이 문을 연 것은 지난 10월 1일. 김 지점장은 20여명 사원을 거느리는 본격적인 관리자로 막 첫발을 디딘 것이다. 그의 성공비결은 적극성이다. “외국 보험사들은 영업사원들이 무작정 사람을 만나 영업을 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라는 것이죠. 그러나 모든 사람이 좋은 인맥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인맥이 없다면 적극적으로 인맥을 만들면 됩니다.”

인터넷 농산물점 주인된 자영업자

옥션에서 보현산골이라는 이름으로 과일즙·고춧가루·참기름 등을 팔고 있는 허문길(39)씨. 그는 대구에서 휴대전화 대리점을 하다가 1997년 IMF 한파에 사업을 접었다. 형이 농사를 짓던 경북 영천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로 마음을 먹었다. 읍내에서 15㎞ 떨어진 산골짜기다.

“농촌에 돌아와보니 소비자 가격이 산지 가격에 10배에 달하는 물건도 있더군요.” 그는 인터넷으로 소비자에게 직접 물건을 팔 마음을 먹었다. 1999년 인터넷 전자상거래 사이트인 옥션에 고구마 양파 복숭아 등을 올려 놓고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택배비는 비싸고, 포장이 부실해 멍이 들고 벌레가 들어가 항의를 받았습니다.”

살아 숨쉬는 농산물을 파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가 생각해낸 해법은 가공이었다. “과일은 과일즙을 만들고, 깨는 참기름으로 만들어 판매했습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 시작했다. 시중에 포도 다이어트가 유행하면서 설탕을 넣지 않은 허씨의 ‘순수 과일즙’이 인기를 끌었다. 직접 포도를 재배하고 가공해 시중가격보다 30~40% 저렴하게 물건을 팔았다. “이제는 포장기 6대, 착즙기 20대 분량 돌리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습니다.” 작년 추석에는 한 달에 4000만원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그냥 농사만 지었을 때보다 5배 정도는 더 벌고 있습니다.”

옥션에서는 수만 명이 물건을 판다. “그 가운데 잘 파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따라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소비자가 신뢰할 수 있도록 선전문구를 만들고,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그를 따라해보겠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무조건 저에게 전화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이트에 방법이 다 적혀 있는데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이트를 샅샅이 뒤져 잘하는 사람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며 “사이트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며 판매방법을 연구하는가가 승부”라고 말했다.

성공과 실패를 가른 것은 적극성이다. “대구에 있는 대학까지 하루 3시간씩 오가며 인터넷과 컴퓨터에 대해 배웠습니다. 술, 담배도 이때 끊었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공부하다가 밤을 새운 적도 많습니다.”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과 몸으로 부딪쳐 배우는 사람의 차이가 성공과 실패로 나타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sayonara > 인생을 걸작으로 만들 바로 당신!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너 자신의 미래와 거래하라]
글 조철 기자 (cheol@joongang.co.kr)

 

젠가, 멀고 먼 옛날, 이름 모를 나라에, 한 노인이 언덕 위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노인은 일생을 연구와 사색에 바친 사람이었다. 그의 높은 학식과 지혜는 명성이 자자했으며,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여러 유명인사들이 조언을 얻고자 찾아오곤 했다. 그의 조언은 언제나 정곡을 찔렀다. 그에게는 어떤 문제나 고민에 대해서도 단번에 핵심을 짚어낼 수 있는 신통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조언에 따르면 안 되는 일이 없었으며,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만 갔다.

언덕 아래 마을에는 어울려 노는 아이들이 있었다. 때때로 그 아이들도 궁금한 것을 물어보러 언덕을 올라왔고, 노인은 그 아이들에게도 언제나 정확한 해답을 말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일종의 게임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노인이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은 질문을 짜내 언덕을 올랐지만, 노인은 언제나 해답을 말했다.

어느 날, 아이들의 대장 격이던 애덤이라는 소년이 다른 아이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 “저 늙은이를 골탕먹일 방법을 드디어 알아냈다. 여기 내 손 안에 새가 한 마리 있거든. 그 늙은이에게 가서 내 손의 새가 살아 있나, 죽었나를 물어보는 거야. 그가 죽었다고 하면, 손을 펴서 새가 날아가도록 하는 거지. 살아 있다고 하면, 주먹을 꽉 쥐면 돼. 그럼 새는 죽어버리겠지? 어떤 대답을 하든 틀린 대답이 되도록 하는 거야.”

마침내 노인이 틀린 답을 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흥분한 아이들은 언덕을 달려 올라갔다. 노인은 그 아이들이 들떠서 달려오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마침내 애덤이 앞으로 나서더니 노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내 손에는 새가 한 마리 있어요. 살아 있게요, 죽었게요?”

노인은 장난기와 기대에 달아오른 아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애덤아, 그건 네 손에 달려 있구나.”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이 이야기의 요점이자 교훈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 운명은 다른 누가 아닌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우리의 미래는 대부분 우리 스스로가 정하며, 우리 자신의 선택과 판단에 따른다. 우리의 현재는 우리가 매년, 매일 한 일과 하지 못한 일의 결과다.

내가 스물 한 살 때였다. 아주,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나는 작은 원룸 아파트에 앉아 장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희망차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건설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고, 생활 태도도 건실하지 못해 주급을 받기가 무섭게 빈털터리가 되곤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는 깨달았다. 그 노인의 이야기처럼, 그 시점부터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행복하고, 건강하고, 인기가 있고, 풍요롭고, 매사에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그런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진 기회와 방법 외에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길은 없다. 다행히도 말이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을 최대한 선용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최고 목표이다.

세상에는 기본적으로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능동적인 사람과 수동적인 사람. 정말로 능동적인 사람은 10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은 각자의 영역을 이끌어가는 창조적 소수다. 그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스스로의 삶을 움켜쥐고, 만들어간다. 스스로의 현재에, 스스로의 행동에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 위험과 불확실 속으로 과감하게 발을 딛는다. 우리 미래는 우리 손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라. 그러면 우리도 창조적 소수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누군가 다른 손길이 자신을 지켜주리라 믿으며 복권을 사고, TV 앞에 죽친다. 그리고는 현재의 자신을 불평한다. 그들은 성공한 사람들을 흘겨보면서, 그들이 했던 것처럼 노력할 생각은 않는다. 그들은 노선이 끊긴 버스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인생을 흘려보낸다.

희망은 전략이 아니다

희망은 성공을 위한 전략이 아니다. 우연에 맡기기에 인생은 너무 귀중하다.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책임지고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 그래서 주어진 인생을 값지게 쓰는 것이 우리의 최대 사명이다.

그 때 조그만 원룸에서 깨달음을 얻은 다음, 나는 80개 이상의 나라를 다니며 일했다. 내가 시작하고, 세우고, 운영하고, 흑자로 전환시킨 사업은 22개에 달한다. 나는 500개 이상 기업의 컨설턴트나 트레이너로 일했으며, 사업과 개인 생활에서 이 성공 전략을 배우려는 수강생들과 세미나 참여자들 200만명 이상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나는 바람직한 미래를 스스로 만들기 위해 독자들에게 쓸모 있을 아이디어들을 제시했다.

가끔 나는 세미나 도중에 이렇게 질문한다. “여기 수입을 두 배로 늘리고 싶으신 분 계십니까?” 그러자마자 모두의 손이 지체없이 올라간다.

나는 말한다. “좋아요.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수입을 두 배로 늘릴 수 있다는 거죠. 충분히 오래 살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연 3퍼센트에 달하는 물가 상승률과 여러분이 앞으로 20내지 25년을 더 일한다는 가정을 하면 결국 여러분의 수입은 두 배가 될 겁니다. 따라서 수입을 두 배로 늘리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요. 얼마나 빨리 늘릴 수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가속 페달을 밟아라

여러분이 나와 비슷하다면 결과를 얻고 싶어 안달일 것이다. 문가 새로운, 다른 것을 해보기로 결심했다면(특히 자신의 미래를 만드는 일에서) 가능한 한 빨리 성과를 얻고 싶으리라.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해야만 한다.

나는 스스로의 인생 행로에 가속 페달을 밟아 꿈꾸던 것 이상으로 빠르게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내가 제시한 여러 가지 실용적인 방법은 그것을 이용한 모든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었다. 그것은 개인 생활과 직무 경력을 향상시키는 최고의 방법이며,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된 사람들이 사용했던 바로 그 방법이다.

이제 여행을 떠나자. 여러분의 넓고 넓은, 아직 개척되지 않은 가능성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바로 지금부터, 우리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sayonara > [퍼온글] 오드리햅번이 아들에게 들려준 글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위 내용은 오드리 햅번이 숨을 거두기 일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때에 아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 오드리햅번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