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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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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야기꾼 누가 옆에서 이야기를 해주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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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사이버과시족'에 관한 기사가 어제 경향신문의 기획기사였는데(요즘 가장 다이내믹한 신문이다), 생각을 더 보태서 옮겨놓을까 하다가 일단은 자료로서 스크랩해놓는다. 그냥은 멋쩍으니까 나대로의 '과시'를 덧붙이자면 '인정'과 '인정투쟁'에 관한 책들을 이 참에 읽어보시라는 것. 그게 <정신현상학>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까지 이어지면 과시란 것도 전혀 만만하지 않은 것이 되겠지만.

 

 

 

 

경향신문(06. 11. 09) 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 ‘사이버 과시족’

직장인 김모씨(26)는 외식할 때 카메라가 없으면 안절부절못한다. 멋진 분위기의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게 생활화됐기 때문이다. 누구나 흔히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나 체인점 음식은 사진을 찍어 올리지 않는다. 조금은 특별하고, 남들과 다른 자신의 선택을 과시할 수 있는 음식만 찍는다. 주말에 좋은 식당을 찾아 음식을 먹고 일요일 저녁이면 간단한 작업을 거쳐 블로그에 올린다.

월요일이면 친구들은 김씨의 블로그를 찾아 “맛있겠다” “어디냐? 가격대를 가르쳐달라”고 리플을 단다. 김씨는 “음식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을 때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리플을 통해 나만의 가치있는 선택을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신(神)에 의한 인정을 중시하던 중세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는 근대 철학의 자신감 넘치는 출발점이었다. 이어 프랑스 철학자 메느 드 비랑은 데카르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나는 의욕적이다, 고로 존재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데카르트나 비랑의 선언을 패러디해 21세기 한국의 인터넷 세상을 묘사해보면 어떨까. “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사이버 스페이스의 유목민들은 이 광대한 공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부모, 형제,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채 꺼내지 못한 얘기를 얼굴도 모르는 인터넷 저편의 네티즌에게 건넨다. 그러나 단순히 자신의 사생활을 미주알고주알 드러내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현대인들은 타인의 비루한 일상을 꼼꼼히 챙길 만큼 한가하지 않다. 남들과 똑같아서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 남들과 조금은 다른 자신의 특별한 취향을 드러내기. 드러내는 사람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독특한 것이 결국은 사람의 이목을 끈다.

세계 최대의 동영상 공유 커뮤니티 유튜브는 1억건, 한국 최대인 판도라TV에는 85만건의 동영상이 하루에 올라온다. 그 중 네티즌의 이목을 끄는 건 극소수다. 오프라인에서 마주쳤다면 ‘미친놈’ 소릴 듣기 딱 좋은 황당한 퍼포먼스 정도가 돼야 네티즌들은 환호한다. 전세계를 돌며 우스꽝스러운 막춤을 춰서 인기를 얻은 미국 청년도 있고, 인기 가요에 맞춘 어설픈 립싱크로 인기인이 된 한국 청년도 있다.

블로그도 마찬가지다. 프로페셔널을 뺨치는 아마추어들이 예민하게 갈고 닦은 취향의 집적물을 전시한다. 방대한 DVD나 CD컬렉터들이 남들에게는 없는 리스트를 자부하면서 내밀고, 대중 앞에 내놓기 쑥스러워 골방에서 그려냈던 그림을 광활한 네트 갤러리에 전시한다.

유치하다고 해도 좋고, 어설프다고 해도 좋다. 다만 이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고, 그 취향을 인정받아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고픈 당연한 욕망의 발로다. 공자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닌가”하고 말했다지만, 이는 사람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점을 돌려서 말한 데 불과하다. 새로운 세대의 족속들의 손에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가 쥐여졌다. 최신형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빠른 통신망을 탄 채, 우리는 우리를 드러냄으로써 타인의 시선을 갈망한다. 외로우니까, 나 하나만으로는 외로우니까.(백승찬 기자)

06. 11. 10.

P.S. 마지막에 '외로우니까'란 멘트는 감상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저널리스틱한 것이지만 문제를 축소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인정'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면서 존립/존재에 관한 문제이기에 그러하다. 그러한 인정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애니멀'이다...

P.S.2. '인터넷 나르시시즘'에 대한 문화학자의 진단을 덧붙인다. 같은 기획기사의 하나이다.

경향신문(06. 11. 09) 소통·공유·행복 ‘인터넷 나르시시즘’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르키소스’라는 미소년 이야기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숲으로 사냥을 하러 갔는데 옹달샘에 비친 자신의 몸에 반해 먹지도 않고 자기 얼굴만 보다 말라 죽은 후 한 떨기 수선화가 되었다. 19세기 말 독일의 정신과 의사 네케는 나르키소스의 신화를 차용해서 리비도의 대상이 자신이 되는 심리상태를 ‘나르시시즘’으로 명명했다. 한 마디로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 말이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자기 과시에 몰입하는 네티즌들의 원형 서사 같아 보인다. 나르키소스의 옹달샘이 자기도취의 거울이었다면 네티즌들에게 그것은 바로 ‘블로그’ 혹은 ‘미니홈피’쯤 될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멋진 자신의 얼굴을 옹달샘에 비추듯, 네티즌들은 자신들이 만든 멋진 콘텐츠를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올린다.

자신이 만든 특이하고 맛깔난 음식 정보를 블로그에 올리는 ‘가정주부들’. 디지털 카메라로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직접 찍어 미니 홈피에 올려놓은 ‘셀카족들’. 취미가 유사한 익명의 네티즌들에게 자신만의 고유한 정보를 제공하며 즐거워하는 네티즌들. 이들이 우리 시대 인터넷 나르시시즘의 주인공들이다.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의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익명의 네티즌들과 공유하길 원하는 이들은 자생적인 공간에서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고 유통, 소비하는 ‘생비자들’(prosumers)이다.

디지털 시대 콘텐츠 생비자들은 근대적, 물리적 공간에서의 자기도취자들과는 다른 욕망을 꿈꾼다.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사모님들’이나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며 주말에 고급 사교파티를 즐기는 ‘문화귀족들’의 자기과시는 오로지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다. 일반 서민들이 이들을 재수 없게 보는 것도 타인과의 소통과 공유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터넷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소통과 공유를 원칙으로 한다. 맛있는 해물 떡볶이, 내가 만든 가구, 알콩달콩한 우리가족 이야기, 이 모든 정보는 내가 잘났다는 과시이기에 앞서, 익명의 네티즌들과 소통의 기쁨을 공유하려는 소망을 담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만족을 위해 만든 콘텐츠라 해도, 타인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이른바 ‘댓글의 행복’이 없으면 인터넷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터넷에서 자기과시는 하나의 게임이다. 마치 고대 원시 부족사회에서 행해졌던 ‘포틀래취’(potlatch) 선물 게임처럼,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도전과 응수를 위한 반복적인 게임이다. 내가 맛있는 ‘해물 떡볶이’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블로그에 올리면, 누군가가 더 맛있어 보이는 ‘치즈 떡볶이’로 응수하고, 다시 나는 최고로 맛있어 보이는 ‘카레 떡볶이’로 도전하는 게임 말이다. 게임의 장에 참여한 유저들의 도전과 응수는 배타적, 폐쇄적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개방적, 다방향적 나르시시즘이다.

오로지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다른 유저들과 소통하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내하는 것은 블로그가 주는 일상의 행복과 천상의 기쁨 때문이다. 어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한 ‘해피해피 라이프’라는 네티즌 참여 코너의 사례처럼, 아기자기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탈권위적이면서 자기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다.

물론 유저들이 만든 콘텐츠가 모두 사심 없는 것은 아니다. 네티즌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특정 연예인들을 조롱하고 희화화한다거나 아니면 스스로 연예인이 되고 싶어 댓글 자작극을 벌이는 현상들도 일어난다. 인터넷 자기과시 행동이 지나칠 경우 오직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려 인터넷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어떤 정치인들은 애초부터 진정한 정보 소통에는 관심이 없고, 의정활동을 위한 홍보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적인 정보들이나 미니홈피의 ‘디카놀이’ ‘일촌 놀이’들이 사이버 커뮤니티를 지극히 개인화하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로부터 도피하려는 정치적 불감증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인터넷에서 자신을 뽐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직하고 열정적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자생적 콘텐츠는 무기력증에 빠진 가정주부들에게 생활의 활력소를 준다. 이제 부엌과 거실은 가사노동의 현장에서 풋풋하고 따근따근한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스튜디오로 전환된다. 인터넷 나르시시즘이 가정주부들에게는 가사의 불평등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자기 최면술일 수도 있지만, 가사의 반란을 꿈꾸는 쾌락의 에너지일 수도 있다.

소비 자본주의 시대 상품화된 나르시시즘은 결핍에 대한 편집 증세를 보인다. ‘명품중독’과 같은 상품 나르시시즘의 욕구는 끝이 없다. 소통과 공유를 위한 인터넷 유저들의 대중 나르시시즘은 비록 폭력과 집착의 위험성을 갖고 있지만, 타인에 대한 에로스의 열망을 담고 있다. 자신이 만든 정보를 미치도록 소통하고 공유하고 싶은 에로스적 욕망, 물질적 보상은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인터넷 나르시시즘은 행복하다.(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

(*)하지만 이 '행복'은 쾌락원칙의 경제 안에 있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 아닌가? 그 경제를 넘어선, 주이상스 곧 향략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은 때로 인생을 망치고 거덜낸다. '자기도취'의 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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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늘연못 > 잘 먹어야 잘 산다에서 덜 먹어야 잘 산다로!
누구나 10kg 뺄 수 있다
유태우 지음 / 삼성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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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양의 법 사상을 연구하던 선생님께서 노자를 가르치시면서 늘상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여보게. 자네들은 비싼 수강료를 낸 강의가 좋은 강의고 배우는게 많다고 하지? 그런데 말일세. 내가 생각해 보니까 비싼 강의는 그때는 좋을지언정 자신의 삶이 바뀌는 건 별로 없다네. 되도록 싼 강의, 되도록 돈이 들지 않는 강의, 아예 돈이 필요없는 이야기를 들어보게. 습관이 변하고 삶이 변한다네. 그래서 돈을 요구하지 않는 강의가 참 강의라네."

느닷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시겠지만, 이 책 내용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 책은 비싼 다이어트 음식을 먹으라고 하지도 않고, 헬스 크럽 회원권을 사라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적게 먹으라고 이야기 한다. 많이 먹는 습관이 달라지지 않는 한 다이어트는 성공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그래서 이 책의 핵심은 이거다. " 잘 먹어야 잘 산다에서 덜 먹어야 잘 산다로 마음을 고쳐 먹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부터 당장 반만 먹어라." 6개월만 반만 먹는 반식에 성공한다면 위가 줄어들어 더 먹으려고 해도 부담스러워진다. 그날까지 참아라.

국민 3명중 1명이 비만이라고 한다. 얼마 후에는 지구를 지배한다는 비만인이 되는 까닭은 기본적으로 음식을 많이 먹고 활동량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음식을 통해 섭취한 칼로리는 그날그날 운동과 활동으로 다쓰지 못하면 고스란히 지방으로 우리의 배와 피부 밑, 혈관에 쌓이게 된다. 참고로, 채식만 하더라도 많이 먹으면 비만인이 되는 것은 그 큰 소나 코끼리가 풀만 먹고도 엄청난 덩치가 된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또 술을 먹으면 비만인이 되기가 더 쉽다. 밥 한 공기가 300Kcal인데 소주 1병은  660Kcal, 맥주는 240Kcal, 양주는 2000Kcal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술을 마시면 별다른 활동없이 잠을 자기때문에 체지방이 부쩍 오른다. 저녁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신다면 무려 8시간을 마시는 것인데 10000Kcal 즉 밥 33공기에 해당하는 칼로리를 축적할 수 있다. 따라서 일주일에 2번만 술을 마셔도 왠만한 운동광이 아니고서는 아랫배의 살을 빼기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1시간 동안 계속 달릴 때 600Kcal가 소모되는데,결국 소주 1병의 칼로리를 태우기 힘든 셈이다. 따라서 술꾼은 비만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먹는 음식을 그대로 먹는 한 아무리 운동을 해도 비만인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많은 칼로리를 먹고 적게 칼로리를 태우기 때문에 비만이 되지만, 운동을 해서 많이 태우기는 힘들기 때문에 적게 먹기를 우선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을 마치고 먹는 커피 한잔에 비스켓 2개, 포카리 스웨트에 빵 하나, 배고파서 먹은 밥 한그릇, 맥주 한잔에 땅콩 몇 개는 모두 300칼로리를 훌쩍 넘는다. 30분동안 쉬지않고 달린 노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 것이다.

유태우 다이어트의 핵심은 반식, 즉 그대로 먹되 모든 것은 다 반만 먹으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밥 한 공기와 깍두기 두개를 먹었다면 오늘부터는 밥 반 공기와 깍두기 한개만 먹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석달을 보내고, 석달후부터는 걷기등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다시 석달을 보내면 위장이 줄어들어 다이어트에 성공하게 된다. 여기서 이 다이어트의 보이지 않는 특징을 볼수 있는데, 몸무게가 줄은 것을 다이어트의 성공으로 보지 말고, 위장이 줄은 것을 다이어트의 성공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몸무게는 줄여봤자 위장이 그대로 식습관을 유지하는 한 요요현상에 시달리게 된다. 위장이 줄어들어 먹을려고 해도 거북해야 다이어트에 성공한 것이다.

참고로 유태우 다이어트에서 반식만으로 체중이 충분히 줄지 않는 사람을 위해 권장하는 운동을 적어본다.이 역시 돈 안드는 다이어트여서 좋은 느낌이 든다. 돈은 들지 않지만 노력과 땀을 요구하는 방법인데 헬스클럽 같은 특정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라 생활 속에 습관을 바꿔나가자는 것이다.

1. 쿠션이 좋은 운동화를 가방에 넣고 다니다 기회만 되면 걷는다.

2. 집에서 직장까지의 거리가 가깝다면 걸어 다닌다.

3. 5층 이하는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을 이용한다.

4. TV드라마를 보면서 러닝머신, 윗몸일으키기, 팔 굽혀펴기 등의 운동을 한다.

5. 고층 아파트에 산다면 계단 내려오기를 생활화한다.

6. 외출시 버스를 탈 때는 한 정류장 미리 걷고 타거나 미리 내려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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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승주나무 > [퍼온글] 똑똑해지고 싶은가? 보지 말고 읽어라

 

똑똑해지고 싶은가? 보지 말고 읽어라


읽기 > 보기 + 듣기
공부 잘하는 상위 10%학생들, 책·신문 2배 더 읽어
TV 자주 보면 좌뇌활동 둔화… 논리·분석력 약해져
"책과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두뇌발달에 큰 효과"

대구 경일여고 3학년 이슬반양은 아침 자습시간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책을 읽는 시간은 10분. 그러나 이양은 짧은 아침독서가 자신의 삶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책과는 담을 쌓았던 이양이 다시 책을 잡은 것은 대구지역 초·중·고교가 지난해 3월부터 도입한 ‘아침독서 10분’ 프로그램 때문.

“중학교 때 읽었던 책을 아무것이나 집어와 읽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중학교 때 읽을 땐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던 구절도, 그리고 읽어놓고도 그냥 넘어갔던 부분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의고사에서 언어영역의 점수가 눈에 띄게 올랐다. 많은 학원과 많은 문제집으로도 오르지 않던 점수가… ‘이래서 독서를 하라고 하는구나’라고 느꼈다.”(‘대한민국희망1교시 아침독서’에 실린 이양의 글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취미는 ‘읽기’

뇌 연구 전문가들의 연구와 독서 효과에 대한 실태 조사들은 한결같이 ‘똑똑하고 싶다면 보지 말고 읽으라’고 결론 내린다. 한국교육개발원과 함께 지난 2002년 서울시내 50개 고등학교 1, 2학년 학생 5000명을 대상으로 학습실태 설문조사를 실시한 성기선 가톨릭대 교수(교육학)는 “공부 잘하는 상위 10% 학생들은 책과 신문을 즐겨 보고 영상매체를 멀리했다”고 지적했다.

상위 10% 학생들의 35%가 거의 매일 신문을 읽었다. “자주 읽는다”는 대답도 22.3%를 차지, 절반 이상인 57.4%가 신문을 즐겨 읽었다. 반면, 나머지 90%의 학생들은 신문을 매일 읽는 학생(15.2%)과 자주 읽는 학생(15.6%)을 합해도 30.8%에 불과했다. 또 상위 10% 학생들 가운데 문학작품을 읽는 비율은 22.4%인 반면, 하위권 학생들은 10.8%에 머물러 상위권 학생들이 교과서 밖 독서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점에서 책을 사는 비율도 상위권(19.3%)이 하위권(11.6%)보다 높았다.


◆고소득 고학력일수록 읽기 중시

한국출판연구소가 20대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2004년 12월 발표한 국민독서실태 조사는 학력이 높고 소득이 많을수록 문자(text)의 힘을 믿는 경향을 보여준다. “독서가 사회생활에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에 대해 대학 재학 이상 응답자의 79.2%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중졸 이하는 46.5%만이 글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고졸은 70.2%였다. 소득별로는 301만원 이상 소득자의 76.9%, 201만~300만원 71.3%, 200만원 이하 67.4%가 “그렇다”고 대답, 소득이 높을수록 글 읽기를 중시했다.

한편 고교생을 대상으로 독서와 논술의 상관관계를 묻자 대다수(74.6%)가 “폭넓은 독서가 필요하다”고 응답하면서도 “실제로 독서를 했다”는 응답은 15.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고교생의 독서지도와 독서를 위한 시간 할애가 절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TV 많이 보면 논술 능력도 떨어져

이정춘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문화인프라 구축을 위한 독서와 도서관의 역할’이란 논문에서 읽기와 뇌 발달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지속적인 TV 시청은 좌뇌 활동의 뚜렷한 약화를 초래한다”는 내용의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 연구성과를 인용하며 “(영상미디어에의 노출은) 논리와 분석력을 약화시켜 인간의 원천적 문화기술인 읽기와 쓰기, 그리고 셈하기를 퇴보시킨다”고 지적했다.

논문은 또 1983년 미국에서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3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TV시청과 필기능력’ 조사결과, ‘문법과 정서법, 문장부호, 문장 작성법, 사고력 평가에서 4시간 이상 TV를 보는 이른바 중시청자(重視聽者)들이 저능한 필기능력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한국교육개발원이 엮은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가 21세기를 지배한다’는 책은 “공부는 문자(text)를 바탕으로 하고 논리력을 요구하는 반면 컴퓨터는 영상(image)으로 표시되며 감각적 작용을 요구한다”며 “영상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한 줄 한 줄 이어지는 문자로 표현된 글을 읽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성적 상위 10% 학생의 절반 이상인 50.4%가 TV를 한 시간 이하로 시청하는 반면, 하위 90%의 학생들은 69.4%가 한 시간 이상 시청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성적 우수 학생 가운데 TV를 세 시간 이상 보는 학생은 3.2%에 불과한 반면, 하위 90% 학생들은 13.7%나 됐다.

◆어려서부터 글과 놀아라

생후 1년 이하의 영아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1992년 영국에서 시작된 북스타트(Bookstart) 운동은, 단지 책을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영아의 언어발달과 집중력, 읽기기술 등에 놀라운 효과가 있음을 입증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북스타트 운동에 관한 연구’ 결과 보고서에서 “북스타트는 교육의 의도를 배제하고 영아에게 책을 장난감으로 주는 것”이라며 “부모가 책을 읽어준 아이, 어려서부터 책을 갖고 논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커가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태훈기자 scoop87@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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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승주나무 > [퍼온글] 성폭력이 왜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화제의 책] 줄리아 우드의〈젠더에 갇힌 삶〉

 

 

 

 

젠더에 갇힌 삶> (한희정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의 저자 줄리아 우드는 "강간은 섹스 행위를 포함하지만 강간은 성적 욕망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그는 "강간은 성욕보다 다른 사람을 굴욕시키고 지배하기 위해 고의로 계획된 공격적인 행동"으로 본다.
  
  그는 "강간 같은 폭행은 성적 평등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회에서 가장 낮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믿고 성별에 따라 계층이 나뉘는 문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강간의 각본(rape script)"
  
  또 다른 고정관념은 "이미 '성립된 관계'에서는 강간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부부나 연인, 친구 사이에서는 강제된 성교를 강간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다.
  
  줄리아 우드는 "강간이 널리 퍼진 이유 중 하나는 상당수 남성들이 강제된 섹스를 용인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1998년도 연구에 따르면) 강간 사건의 75% 이상은 희생자를 아는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강간은 낯선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폭력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 모두 데이트 상대와 친구는 강간할 수 없다고 믿는 '강간의 각본'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강간의 많은 희생자들은 이러한 강간을 신고하면 자신들이 부정적으로 여겨질 것을 걱정하거나 가족들이 사회적 비난을 받을까봐 고발하기를 꺼린다"고 지적했다.

 "미국에서는 매 5분마다 한 여성이 강간당한다"
  
  강간은 '젠더 폭력(gendered violence)'의 일부다. 대부분 '젠더 폭력'이라고 하면 강간, 성희롱을 떠올리지만, 이 말은 보다 많은 형태의 폭력을 포함한다.
  
  부부나 연인 등 가까운 파트너에 의한 폭력, '여성에 대해 큰소리로 음탕한 말을 하거나 집적대는' 젠더 위협, 여성 할례 등의 성기 훼손, 인도, 파키스탄 등에서 종종 일어나는 신부살해와 같은 젠더 살해 등이 이에 포함된다.
  
  흔히 '가정폭력'이라고 표현되는 '가까운 파트너에 의한 폭력'은 한국에서도 남의 일이 아니다.
  
  줄리아 우드는 "여성의 최소 28%에서 최대 50% 정도는 가까운 파트너에 의한 폭력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또 부부관계뿐 아니라 연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 또한 급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는 "가까운 파트너에 의한 폭력은 주로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른다. 1995년 여성 살인 희생자의 26%는 남편이나 남자 친구에게 죽임을 당한 반면, 남성 살인 희생자의 3%만이 부인이나 여자친구가 저지른 사건이었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현재 미국에서는 매 12초마다 한 여성이 가족이든 친구든 가까운 사람에게 구타당하고, 매일 10명의 여성이 가까운 사람에게 폭력을 당해 사망한다. 더 많은 여성이 가까운 사람에게 구타당하고 죽임을 당하지만 그들의 사건은 신고되지 않거나 우발적인 부상이나 죽음으로 잘못 분류된다.
  
  미국에서 매 5분마다 한 여성이 강간당하고 있고, FBI는 강간의 단 36%만이 신고된다고 추정한다. 이는 미국 여성의 25%는 살면서 강간의 희생자가 될 것임을 의미한다."

  
  "여성을 무시하고 공격적일 것을 요구받는 '남성적 젠더'
  
  이러한 폭력은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줄리아 우드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한 폭력은 남성성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이러한 폭력에 있어 젠더는 성별보다 더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해석은 이 책에서 그가 줄곧 사용하는 '젠더 정체성'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남성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현대 사회가 남성성에 대해 기대하는 여러 요구조건을 설명한다.
  
  일단 남성성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조건은 '여성적으로 되지 말라'는 것이다. 어릴 때 대부분의 소년들은 소녀나 여성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거나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강요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알수 있다.
  
  또 남성은 '보다 공격적이 되라'는 사회적 지시를 받는다. 우리 사회가 은연중에 소년들에 대해 싸움이나 누군가와 맞서는 것을 피하지 말길 바라는 기대를 갖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이렇게 공격적으로 길들여진 남성성은 이성에 대한 폭력과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남자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어서, 줄리아 우드에 따르면 자신의 파트너를 폭행한 여성 또한 강한 남성적 젠더 지향성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났다.
  
  젠더는 하나의 사회적 제도
  
  이렇듯 젠더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성(sex)과 달리 한 시대의 가치, 문화, 고정관념 등을 반영해 사회적, 심리학적으로 구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줄리아 우드는 "엄밀하게 젠더는 개인적인 특성이라기 보다 성의 사회적 의미를 규정하는 상호 복합적인 문화적 사고"라고 규정한다.
  
  젠더는 여러 다른 사회적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삶을 억압하거나 트렌스젠더나 동성애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를 만들어낸다. 또한 젠더는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그 관습적 규정에 반발하는 이들에 의해 깨어지거나 다시 재편되곤 한다.
  
  예를 들면 줄리아 우드가 설명하는 남성성의 새로운 경향이 그러하다.
  
  그는 "현대 남성들은 전통적인 관점의 '진정한 남자'가 되는 것과 동시에 섬세하고 평등주의적인 남성이 되어 전통적 관점에 맞서는 아이러니한 기대를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남성들은 조직이나 남성 집단 내에서 "과묵하고 거칠며 독립적이고 위험을 감수하도록 요구"받는 반면, 가정이나 연인 앞에서 "집안을 꾸리고 어린아이 양육에 완전히 참여하는 파트너가 되고 보다 정서적으로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 과연 대화할 수 없을까
  
  줄리아 우드의 책 〈젠더에 갇힌 삶〉은 이러한 거시적인 측면에서의 젠더뿐 아니라 각 개인의 사적 관계에서 작용하는 젠더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분석을 가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성과의 관계에서 불화를 겪고, 해결방안을 찾지 못한 채 문제를 반복하고 있다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줄리아 우드의 분석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 책의 일부를 인용해보자.
  
  
"관계에 대한 이야기 :
  
  "우리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까요?" 오해와 상처로 끝나는 수많은 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은 언급해야 할 특정 문제가 있을 때만 관계에 대해 논하는 데 관심을 둔다. 대조적으로 여성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조차 (또는 특히 그럴 때) 중요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긴다.
  
  남성적 말 공동체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문제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반면, 여성적 말 공동체에서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긴다. 여성 파트너들이 '관계에 대해 논의하길' 원할 때 많은 남성이 회피하거나, 남성이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릴 때 여성은 자주 관계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자주 느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책에는 그밖에도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 서로가 다른 젠더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분석하고 있다.
  
  현재 인터넷 상에서 '남자가 알아야 할 여자에 대한 10가지 이야기'나 '오래가는 연인의 비법'이라는 식의 이성 간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한 여러 팁들을 알려주는 글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러한 임시방편의 기술이 아닌 '젠더에 갇힌 삶'을 사는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이 맺는 관계들의 한계?되짚어 볼 기회를 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추천할 만하다.

 

성폭력이 왜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 [화제의 책] 줄리아 우드의〈젠더에 갇힌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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