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승주나무 > [퍼온글] 똑똑해지고 싶은가? 보지 말고 읽어라

 

똑똑해지고 싶은가? 보지 말고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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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잘하는 상위 10%학생들, 책·신문 2배 더 읽어
TV 자주 보면 좌뇌활동 둔화… 논리·분석력 약해져
"책과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두뇌발달에 큰 효과"

대구 경일여고 3학년 이슬반양은 아침 자습시간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책을 읽는 시간은 10분. 그러나 이양은 짧은 아침독서가 자신의 삶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책과는 담을 쌓았던 이양이 다시 책을 잡은 것은 대구지역 초·중·고교가 지난해 3월부터 도입한 ‘아침독서 10분’ 프로그램 때문.

“중학교 때 읽었던 책을 아무것이나 집어와 읽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중학교 때 읽을 땐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던 구절도, 그리고 읽어놓고도 그냥 넘어갔던 부분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의고사에서 언어영역의 점수가 눈에 띄게 올랐다. 많은 학원과 많은 문제집으로도 오르지 않던 점수가… ‘이래서 독서를 하라고 하는구나’라고 느꼈다.”(‘대한민국희망1교시 아침독서’에 실린 이양의 글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취미는 ‘읽기’

뇌 연구 전문가들의 연구와 독서 효과에 대한 실태 조사들은 한결같이 ‘똑똑하고 싶다면 보지 말고 읽으라’고 결론 내린다. 한국교육개발원과 함께 지난 2002년 서울시내 50개 고등학교 1, 2학년 학생 5000명을 대상으로 학습실태 설문조사를 실시한 성기선 가톨릭대 교수(교육학)는 “공부 잘하는 상위 10% 학생들은 책과 신문을 즐겨 보고 영상매체를 멀리했다”고 지적했다.

상위 10% 학생들의 35%가 거의 매일 신문을 읽었다. “자주 읽는다”는 대답도 22.3%를 차지, 절반 이상인 57.4%가 신문을 즐겨 읽었다. 반면, 나머지 90%의 학생들은 신문을 매일 읽는 학생(15.2%)과 자주 읽는 학생(15.6%)을 합해도 30.8%에 불과했다. 또 상위 10% 학생들 가운데 문학작품을 읽는 비율은 22.4%인 반면, 하위권 학생들은 10.8%에 머물러 상위권 학생들이 교과서 밖 독서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점에서 책을 사는 비율도 상위권(19.3%)이 하위권(11.6%)보다 높았다.


◆고소득 고학력일수록 읽기 중시

한국출판연구소가 20대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2004년 12월 발표한 국민독서실태 조사는 학력이 높고 소득이 많을수록 문자(text)의 힘을 믿는 경향을 보여준다. “독서가 사회생활에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에 대해 대학 재학 이상 응답자의 79.2%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중졸 이하는 46.5%만이 글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고졸은 70.2%였다. 소득별로는 301만원 이상 소득자의 76.9%, 201만~300만원 71.3%, 200만원 이하 67.4%가 “그렇다”고 대답, 소득이 높을수록 글 읽기를 중시했다.

한편 고교생을 대상으로 독서와 논술의 상관관계를 묻자 대다수(74.6%)가 “폭넓은 독서가 필요하다”고 응답하면서도 “실제로 독서를 했다”는 응답은 15.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고교생의 독서지도와 독서를 위한 시간 할애가 절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TV 많이 보면 논술 능력도 떨어져

이정춘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문화인프라 구축을 위한 독서와 도서관의 역할’이란 논문에서 읽기와 뇌 발달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지속적인 TV 시청은 좌뇌 활동의 뚜렷한 약화를 초래한다”는 내용의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 연구성과를 인용하며 “(영상미디어에의 노출은) 논리와 분석력을 약화시켜 인간의 원천적 문화기술인 읽기와 쓰기, 그리고 셈하기를 퇴보시킨다”고 지적했다.

논문은 또 1983년 미국에서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3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TV시청과 필기능력’ 조사결과, ‘문법과 정서법, 문장부호, 문장 작성법, 사고력 평가에서 4시간 이상 TV를 보는 이른바 중시청자(重視聽者)들이 저능한 필기능력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한국교육개발원이 엮은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가 21세기를 지배한다’는 책은 “공부는 문자(text)를 바탕으로 하고 논리력을 요구하는 반면 컴퓨터는 영상(image)으로 표시되며 감각적 작용을 요구한다”며 “영상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한 줄 한 줄 이어지는 문자로 표현된 글을 읽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성적 상위 10% 학생의 절반 이상인 50.4%가 TV를 한 시간 이하로 시청하는 반면, 하위 90%의 학생들은 69.4%가 한 시간 이상 시청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성적 우수 학생 가운데 TV를 세 시간 이상 보는 학생은 3.2%에 불과한 반면, 하위 90% 학생들은 13.7%나 됐다.

◆어려서부터 글과 놀아라

생후 1년 이하의 영아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1992년 영국에서 시작된 북스타트(Bookstart) 운동은, 단지 책을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영아의 언어발달과 집중력, 읽기기술 등에 놀라운 효과가 있음을 입증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북스타트 운동에 관한 연구’ 결과 보고서에서 “북스타트는 교육의 의도를 배제하고 영아에게 책을 장난감으로 주는 것”이라며 “부모가 책을 읽어준 아이, 어려서부터 책을 갖고 논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커가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태훈기자 scoop87@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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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승주나무 > [퍼온글] 성폭력이 왜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화제의 책] 줄리아 우드의〈젠더에 갇힌 삶〉

 

 

 

 

젠더에 갇힌 삶> (한희정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의 저자 줄리아 우드는 "강간은 섹스 행위를 포함하지만 강간은 성적 욕망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그는 "강간은 성욕보다 다른 사람을 굴욕시키고 지배하기 위해 고의로 계획된 공격적인 행동"으로 본다.
  
  그는 "강간 같은 폭행은 성적 평등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회에서 가장 낮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믿고 성별에 따라 계층이 나뉘는 문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강간의 각본(rape script)"
  
  또 다른 고정관념은 "이미 '성립된 관계'에서는 강간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부부나 연인, 친구 사이에서는 강제된 성교를 강간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다.
  
  줄리아 우드는 "강간이 널리 퍼진 이유 중 하나는 상당수 남성들이 강제된 섹스를 용인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1998년도 연구에 따르면) 강간 사건의 75% 이상은 희생자를 아는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강간은 낯선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폭력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 모두 데이트 상대와 친구는 강간할 수 없다고 믿는 '강간의 각본'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강간의 많은 희생자들은 이러한 강간을 신고하면 자신들이 부정적으로 여겨질 것을 걱정하거나 가족들이 사회적 비난을 받을까봐 고발하기를 꺼린다"고 지적했다.

 "미국에서는 매 5분마다 한 여성이 강간당한다"
  
  강간은 '젠더 폭력(gendered violence)'의 일부다. 대부분 '젠더 폭력'이라고 하면 강간, 성희롱을 떠올리지만, 이 말은 보다 많은 형태의 폭력을 포함한다.
  
  부부나 연인 등 가까운 파트너에 의한 폭력, '여성에 대해 큰소리로 음탕한 말을 하거나 집적대는' 젠더 위협, 여성 할례 등의 성기 훼손, 인도, 파키스탄 등에서 종종 일어나는 신부살해와 같은 젠더 살해 등이 이에 포함된다.
  
  흔히 '가정폭력'이라고 표현되는 '가까운 파트너에 의한 폭력'은 한국에서도 남의 일이 아니다.
  
  줄리아 우드는 "여성의 최소 28%에서 최대 50% 정도는 가까운 파트너에 의한 폭력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또 부부관계뿐 아니라 연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 또한 급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는 "가까운 파트너에 의한 폭력은 주로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른다. 1995년 여성 살인 희생자의 26%는 남편이나 남자 친구에게 죽임을 당한 반면, 남성 살인 희생자의 3%만이 부인이나 여자친구가 저지른 사건이었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현재 미국에서는 매 12초마다 한 여성이 가족이든 친구든 가까운 사람에게 구타당하고, 매일 10명의 여성이 가까운 사람에게 폭력을 당해 사망한다. 더 많은 여성이 가까운 사람에게 구타당하고 죽임을 당하지만 그들의 사건은 신고되지 않거나 우발적인 부상이나 죽음으로 잘못 분류된다.
  
  미국에서 매 5분마다 한 여성이 강간당하고 있고, FBI는 강간의 단 36%만이 신고된다고 추정한다. 이는 미국 여성의 25%는 살면서 강간의 희생자가 될 것임을 의미한다."

  
  "여성을 무시하고 공격적일 것을 요구받는 '남성적 젠더'
  
  이러한 폭력은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줄리아 우드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한 폭력은 남성성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이러한 폭력에 있어 젠더는 성별보다 더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해석은 이 책에서 그가 줄곧 사용하는 '젠더 정체성'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남성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현대 사회가 남성성에 대해 기대하는 여러 요구조건을 설명한다.
  
  일단 남성성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조건은 '여성적으로 되지 말라'는 것이다. 어릴 때 대부분의 소년들은 소녀나 여성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거나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강요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알수 있다.
  
  또 남성은 '보다 공격적이 되라'는 사회적 지시를 받는다. 우리 사회가 은연중에 소년들에 대해 싸움이나 누군가와 맞서는 것을 피하지 말길 바라는 기대를 갖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이렇게 공격적으로 길들여진 남성성은 이성에 대한 폭력과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남자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어서, 줄리아 우드에 따르면 자신의 파트너를 폭행한 여성 또한 강한 남성적 젠더 지향성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났다.
  
  젠더는 하나의 사회적 제도
  
  이렇듯 젠더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성(sex)과 달리 한 시대의 가치, 문화, 고정관념 등을 반영해 사회적, 심리학적으로 구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줄리아 우드는 "엄밀하게 젠더는 개인적인 특성이라기 보다 성의 사회적 의미를 규정하는 상호 복합적인 문화적 사고"라고 규정한다.
  
  젠더는 여러 다른 사회적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삶을 억압하거나 트렌스젠더나 동성애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를 만들어낸다. 또한 젠더는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그 관습적 규정에 반발하는 이들에 의해 깨어지거나 다시 재편되곤 한다.
  
  예를 들면 줄리아 우드가 설명하는 남성성의 새로운 경향이 그러하다.
  
  그는 "현대 남성들은 전통적인 관점의 '진정한 남자'가 되는 것과 동시에 섬세하고 평등주의적인 남성이 되어 전통적 관점에 맞서는 아이러니한 기대를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남성들은 조직이나 남성 집단 내에서 "과묵하고 거칠며 독립적이고 위험을 감수하도록 요구"받는 반면, 가정이나 연인 앞에서 "집안을 꾸리고 어린아이 양육에 완전히 참여하는 파트너가 되고 보다 정서적으로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 과연 대화할 수 없을까
  
  줄리아 우드의 책 〈젠더에 갇힌 삶〉은 이러한 거시적인 측면에서의 젠더뿐 아니라 각 개인의 사적 관계에서 작용하는 젠더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분석을 가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성과의 관계에서 불화를 겪고, 해결방안을 찾지 못한 채 문제를 반복하고 있다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줄리아 우드의 분석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 책의 일부를 인용해보자.
  
  
"관계에 대한 이야기 :
  
  "우리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까요?" 오해와 상처로 끝나는 수많은 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은 언급해야 할 특정 문제가 있을 때만 관계에 대해 논하는 데 관심을 둔다. 대조적으로 여성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조차 (또는 특히 그럴 때) 중요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긴다.
  
  남성적 말 공동체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문제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반면, 여성적 말 공동체에서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긴다. 여성 파트너들이 '관계에 대해 논의하길' 원할 때 많은 남성이 회피하거나, 남성이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릴 때 여성은 자주 관계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자주 느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책에는 그밖에도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 서로가 다른 젠더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분석하고 있다.
  
  현재 인터넷 상에서 '남자가 알아야 할 여자에 대한 10가지 이야기'나 '오래가는 연인의 비법'이라는 식의 이성 간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한 여러 팁들을 알려주는 글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러한 임시방편의 기술이 아닌 '젠더에 갇힌 삶'을 사는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이 맺는 관계들의 한계?되짚어 볼 기회를 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추천할 만하다.

 

성폭력이 왜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 [화제의 책] 줄리아 우드의〈젠더에 갇힌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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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승주나무 > [퍼온글] [알라딘] 전문가들에게 배우는 글쓰기 전략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뼛속까지 내려가 자기 마음의 본질적인 외침을 적어내라!" 내면의 목소리를 믿는 법.
유혹하는 글쓰기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많이 쓰고 많이 읽으라. '오늘' 책을 읽는 사람은 언젠가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글쓰기의 공중부양
글쓰기의 공중부양
이외수 지음

작가 이외수가 30여년 동안 글을 쓰면서 터득한 ‘실전 글쓰기 노하우’
한국의 이공계는 글쓰기가 두렵다
한국의 이공계는 글쓰기가 두렵다
임재춘 지음

연구 자체보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더 많이 고민하는 이공계 출신자를 위하여.
 
네 멋대로 써라
네 멋대로 써라
데릭 젠슨 지음, 김정훈 옮김

내면에 숨어 있는 말들을 일깨우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보여준다.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쓰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쓰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에코가 공부하는 법, 글을 쓰는 기술, 정리된 사고를 하는 법을 공개한다.

글쓰기의 전략
글쓰기의 전략
정희모.이재성 지음

글쓰기의 숙련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요령을 제시하고 실전에 적용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글 고치기 전략
글 고치기 전략
장하늘 지음

좋은 문장은 끊임없이 고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글쓰기와 글고치기의 모든 것.
 
대학생 글쓰기 특강
대학생 글쓰기 특강
강준만 지음

글쓰기의 기본 바탕이 되는 인문사회학적 개념을 설명하고 각 의견의 차이를 보여준다.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 1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 1
탁석산 지음

논증이라는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실용적인 글쓰기의 훈련 방법을 다루는 책이다.
 
이렇게 해야 바로 쓴다
이렇게 해야 바로 쓴다
한효석 지음

글쓰기가 거짓이나 관념, 상투성 등으로 흐르는 것을 경고한다.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황혜숙 옮김

원고지 10장을 어려움없이 쓸 수 있게 되면 어떤 글이라도 잘 쓸 수 있다.

문장강화
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

이태준이 고심하여 쓴 문장론, 50년 세월 속에서도 빛이 바래지 않은 생생한 고전.
나의 한국어 바로 쓰기 노트
나의 한국어 바로 쓰기 노트
남영신 지음

적절한 예문과 연습 문제들을 제시, 한국어를 학습하고 잘못을 교정할 수 있도록 구성.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박남일 지음

아름답고 재치가 넘치는, 그러나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 옛말 1700여개.
한국어가 있다 1
한국어가 있다 1
중앙일보 어문연구소 우리말 바루기 팀 지음

잘못 알고 있거나 헷갈리기 쉬운 우리말을 골라 알기 쉽게 설명했다.
 
우리말 나들이
우리말 나들이
MBC 아나운서국 우리말팀 엮음

고루하게 느낄 수 있는 바른 언어생활에 대한 주제를 재미있고 다양한 구성으로 다룬다.
바른말 고운말
바른말 고운말
KBS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회 지음

바른 표기에서부터 한자어의 어원, 일본어의 잔재, 지나친 외국어 남용, 호칭 문제까지.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승우 지음

낯익은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끊임없이 소설을 생각하고, 소설을 읽고, 소설을 쓰라.
현대소설작법
현대소설작법
김용성 지음

체계적인 창작강의와 풍부한 예문을 함께 수록한 소설작법 안내서.
 
기사작성의 기초
기사작성의 기초
이재경 지음

기사란 무엇인가, 기자란 무엇인가. 기사쓰기에 필요한 기초지식과 기사의 기본 유형.
드라마 아카데미
드라마 아카데미
김수현.노희경.이금주.박찬성 지음

한국방송작가협회에서 펴낸 TV 드라마 작법 교재. 드라마의 기초부터 발상, 구성, 대본쓰기까지.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로버트 맥기 지음, 고영범 외 옮김

시나리오의 첫 대사부터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작가의 기본소양을 길러주는 책.
수필문학입문
수필문학입문
윤오영 지음

문학은 표현이다. 표현기술의 연마 없이 개성적 문체는 탄생되지 않는다. 독서와 문장 수련은 절대적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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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달빛요정 > [퍼온글] [씨네21]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소설

[씨네 21 No.419] 2003년 09월 09일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소설 - 한지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부터 나오키상 수상작들까지, 일본 소설 올 가이드


일본 소설이 좋은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읽는 데 부담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의 소설에는 어떠한 강박도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에 대해서, 민족에 대해서, 이념에 대해서 그리고 가족에 대해서. 일본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어 있지 않다. 오직 개인의 일상과 개인의 존재감만이 있을 뿐이다. 등장인물은 나와 너와 그리고 그 혹은 그녀가 전부다. 주인공들의 일상은 그들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 관계에 얽매이는 법도 없다. 치정 정도가 사람과 사람이 만나 가장 복잡하게 꼬인 관계라고나 할까. 그들의 소설은 만나다, 헤어지다, 살아가다 딱 그 정도의 관계 안에서만 고민하고 그 안에서 방황한다. 담백하다 싶게 개인적인 소설, 그게 바로 일본의 '사소설'이다.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의 무게에 대해서만 고민하는데 강박이 없는 존재의 무게는 가벼운 법이다. 읽는 마음도 가볍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들의 소설이 항상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볍고도 무거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가벼운 작가이자 동시에 무거운 작가다. 하루키의 소설은 크게 두 가지 스타일로 나뉜다. <상실의 시대>처럼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을 특유의 감성으로 디테일하게 쓴 소설이 있는가 하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세계의 구조와 인간 실존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조망한 소설이 있다. 전자는 가볍고, 후자는 다소 무겁다. 최근 출간한 <해변의 카프카>는 후자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가출한 15살 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 소설은 단순하게 말하면 한 소년의 내면이 성장하는 과정이다. 주인공이 35살이 아니라 15살이다보니(하루키의 소설은 35살 남자가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35살 그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가끔 그게 궁금하다) 요리를 하고 연애를 하고 맥주를 마시는 일은 없지만, 음악을 듣고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여 해답을 찾는 방식은 여전하다. 게다가 의식과 무의식이 시공을 초월한 대립을 통해서 비로소 어떤 답을 찾아가는 다소 난해한 설정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변의 카프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루키 소설과 다소 다르다. 작가후기에서 그는 불후의 걸작을 쓰고 싶다고 했던가. 비틀스와 듀란듀란 대신 나쓰메 소세키와 고대 소설인 <겐지 이야기>와 그리스비극을 차용하고 있는 <해변의 카프카>는 한결 깊이있고 풍부해 보이기는 하지만 때문에 하루키 특유의 감수성은 오히려 빛이 바랜 느낌이다. '걸작'에 대한 부담을 덜어냈다면 훨씬 재미있는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문체는 감성적인 소설에 더 적합하다. 형이상학은 그에게 버거워 보인다.

또 다른 무라카미 류는 퇴폐적이고 감각적이며 관능적이고 폭력적인 소설을 즐겨 쓴다. 그에게 아쿠타가와상을 안긴 <한없이 투명한 블루>에서부터 그가 지속적으로 택하는 소재는 마약과 섹스와 폭력.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즐기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세계에 냉소적인 시선을 던진다. 이러한 경향은 신작 <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에서도 예외없다.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을 그대로 옮겨 그린 듯한 책표지가 말하듯 이 책은 SM에 빠져 있는 일곱명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에게 살해된 남자가 여자들의 기억을 찾아내어 그들이 사디즘에 빠진 원인을 말해주는데, 그 원인이란 게 일곱명 모두 유년 시절의 성적 학대라는 결론이 좀 씁쓸하다. 하기야 여성을 바라보는 무라카미의 시선은 획일적인 데가 있다. 그에게 있어 여성은 성적으로 착취하거나 착취당하는 존재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여성에 대한 무라카미의 입장은 비교적 최근작인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세계 미식가협회 회원이기도 한 무라카미 류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세계의 요리 31개를 엽편소설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는 이 책에서 편마다 요리와 함께 여자가 등장한다. 그 여자들에 대한 묘사는 요리에 대한 그의 평가와 일치한다. 그에게 여자란 입맛 다시며 먹어치우는 요리에 불과할 뿐이다.

일탈에 관하여

무라카미 류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일탈에 대해 쓰는 시마다 마사히코는 다자이 오사무와 더불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작가다. 무라카미 류의 일탈이 세계에 대한 나르시시즘이라면 시마다 마사히코는 무정부주의를 꿈꾸는 소설가다. 그에게 있어 관(觀)으로 말할 수 있는 모든 세계는 부정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는 체제와 이념을 거부한다. 틀 안에 갇히는 것을 싫어하고 규정에 반발한다. 심지어 그는 그 자신도 부정한다. 아니 조롱한다. 모든 이념과 집단의식이 그의 소설에서는 하나의 농담이자 유머가 되어버린다. <부드러운 좌익을 위한 회유곡>은 그 농담의 절정이다. <꿈의 메신저>에는 버려진 유조선을 개조하여 움직이는 무국적 도시를 건설하려는 소설가가 등장하는데 그런 도시의 건설은 바로 마사히코의 꿈이기도 하다. 마사히코의 소설은 워낙 독특해서 정상적인 코드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악마를 위하여>를 읽어두면 다른 마사히코의 소설을 이해하는데 한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아쿠마 카즈히도는 악마적인 내성을 가진, 분열된 자아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마사히코의 소설적 자아인 셈이다. 마사히코의 모든 소설은 아쿠마 카즈히도가 썼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39살에 자살한 다자이 오사무는 이른바 '퇴폐의 미학'을 보여주는 작가다. 그의 삶이나 소설적 행보는 우리나라 소설가 이상을 연상시킨다. 상처입은 예술가 소설의 전형인 <인간 실격>은 예민한 자아로 인하여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고 끝내 유리된 삶을 살다가 미쳐버리는 한 사내의 일대기로 그 자신의 정신적 자화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세상과 맞물리지도 등돌리지도 못하는 인간 내면의 풍경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이 소설은 패전 뒤 일본사회에 만연하던 허무주의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투신자살이라는 극적인 상황과 맞물려 지금까지도 일본 문청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적인 미의식

지극히 소설적인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오직 소설로만 가능한 이야기, 그것이 마루야마 겐지가 지향하는 소설이다. 마루야마는 일본 문단 내에서도 매우 구도자적인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의 에세이나 소설에서 드러나는 여성관이나 세계관은 나하고 맞지 않는다. 맞을 까닭이 없다. 수시로 여성을 무뇌아나 단세포 생물로 취급하는데 누군들 맞장구치고 싶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값진 데가 있다. '소설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건강한(?) 마초의 전형이다 싶은 그가 어떻게 이렇게 섬세한 문장을 쓸 수 있을까 의심이 날 정도로 그의 문체는 아름답다. 소설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훔치고 싶은 문체다. 우리나라 몇몇 작가들은 마루야마 겐지의 문장과 이미지를 그들의 소설에 차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기도 한데, 그네들의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다. 겐지의 소설 가운데 특히 문체가 아름다운 소설 가운데 하나가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다. 해변가에 사는 청년이 죄를 짓고 도망쳐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어릴 적 여자친구와 오토바이를 타고 고향을 떠났다가 되돌아오는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오토바이가 질주하며 보는 거리의 풍경이 내용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음에도 지겹거나 단조롭지 않다. 오히려 장편의 시를 읽는 것과 같은 감동이 있다.

아베 고보<모래의 여자>도 문청들에게는 필독서다. "8월의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인간의 실존을 생각하게 한다. 날마다 똑같은 분량의 모래를 퍼내야 살 수 있는 모래구덩이에 갇힌 남자의 삶은 읽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버석거린다. 시시포스의 신화를 연상시키는 어쩔 수 없는 반복의 삶도 가슴 메이지만, 몇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비로소 탈출의 묘안을 세운 남자가 그 방법이 탈출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탈출을 미뤄두는 마지막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다. 정작 삶을 억압하는 건 희망 혹은 가능성이 아닐까. 잠재된 가능성이라는 건 사실 실현 여부가 불가능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희망도 없이 모래구덩이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희망을 안고도 모래구덩이에서 나오지 못하는 존재, 사실은 그것이 인간의 실존인 것은 아닐까.

여성작가들의 힘

일본 소설을 읽다보면 의외로 여성작가들을 찾기 힘들다. 남성작가들의 소설 위주로 번역이 된 것인지 실제로 여성작가들의 활동이 미비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나마 알려진 여성작가들이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야마다 에이미로 이른바 여자 하루키 3인방이다. 이들의 소설은 말랑하고 가볍고 감상적이다(이런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여자 하루키로 불린다는 것은 하루키의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건 아닐까).

소설이라기보다는 한권의 순정만화를 읽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특히 에쿠니 가오리가 쓰지 히토나리와 함께 쓴 <냉정과 열정 사이>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실연당한 사람들에게는 경전 같은 소설이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 <향수>에서 '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네가 어찌 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고통'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은 그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네가(동시에 내가) 어찌하고 있는지'를 거울처럼 보여준다. 사소한 오해로 헤어지게 된 연인의 헤어진 이후를 각각의 입장에서 서술한 내용이다. 읽는 동안은 살을 에이는 감정선을 따라가느라 마음이 아린데 읽고 나면 실연의 고통도 사실은 판타지구나 깨닫게 해주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그와 내가 맺고 있던 관계가 깨져서 아픈 것이 아니라 '아프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아픔을 가져온 전후사정과 잘잘못 따위를 잊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관계의 쓸쓸함은 에쿠니 가오리의 최신작인 <호텔선인장>에서도 읽을 수 있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볼 수 있는 이 소설은 '호텔선인장'이라는 이름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오이와 숫자 2와 모자가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줄거리의 전부다. 서로를 받아들이고 느끼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설레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지만 그 감정들이 본질을 변화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야마다 에이미는 단편집 <공주님>에서 실연 대신 연애를 통해 관계의 불안정함을 묘사한다. 5편의 연애소설이 수록된 <공주님>에서 연애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그 사랑에 도취되어 있는 순간이 아니라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죽음을 감추고 있는 여자는 남자에게 버림받지 않는다' (체온재기)라는 문장은 연애나 사랑은 상대에 대한 불안이 팽팽하게 이어져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파 같지만 수긍이 간다.









일본 여성작가들의 연애소설을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유미리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유미리의 소설은 이들과 확연하게 다르다. 주제도 소재도 쓰는 방식도 다르다. 동포 2세인 그녀를 일본 작가의 범주에 넣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소설이 일본사회와 충돌하고 교류하여 형성된 정서적 기반을 근간으로 씌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 소설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 소설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가족에 대한 강박, 민족적인 정체성이 끝없이 노출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러한 강박도 그녀에게 아쿠카타와상을 안겨준 <가족 시네마>처럼 비교적 초기작에서만 엿볼 수 있다. 이후에 보여지는 그녀의 소설인 일본사회 자체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렇더라도 다른 여성작가들과 주제의식이 많이 다르다는 점은 변함없다.

영화로도 제작되어 성공을 거둔 바 있는 <철도원><러브레터> (영화 <파이란>의 원작 소설)의 작가 아사다 지로도 폭넓게 사랑받는 작가 가운데 하나다.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몰락하는 바람에 야쿠자 생활까지 해봤다는 그의 밑바닥 체험이 녹아 있는 소설은 읽기 쉽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는 가족이 해체되고 파편처럼 남은 개인들이 홀로 살아가는 풍경을 자주 쓰는데 우울하고 쓸쓸하면서도 동시에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을 보면 본성이 착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장편보다는 단편이 훨씬 매력적인 작가다. 최근에 나온 아사다의 소설은 주로 장편이다. 단편으로는 <장미도둑>이 있지만 <낯선 아내에게>를 더 권하고 싶다.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가 없다고는 하지만 대중적인 감수성의 글로 시작했다가 어느 정도 인기를 모으고 나면 좀더 문학적인 수사법을 구사하려는 태도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자연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의도적인 전환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법이다. <장미도둑>은 조금 더 문학적일지는 몰라도 '아사다'스럽기는 덜하다.

대중소설의 경쾌발랄함









소설이 농담처럼 가벼워지는 건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비슷한 추세다. 경쾌발랄함은 솔직히 일본 소설이 한수 위다.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에 대한 적서 차별이 없는 탓인지 그들의 대중소설에는 콤플렉스가 없다. 특히 재미있는 건 나오키문학상 수상작들이다. 이것저것 고민하지 않고 낄낄거리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읽고 싶다면 일단 나오키문학상 수상작부터 고르면 된다. 아쿠카타와상이 순수소설에 주어지는 문학상이고 나오키상은 대중소설에 주어지는 상이라는데 그 선정 기준이 유머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한·일 합작영화로도 제작된 <GO> (흥행에는 실패했지만)는 스스로를 코리언재패니즈라고 부르는 재일동포 가네시로 가즈키가 썼다. 조총련계 초·중학교를 다니며 느낀 일본사회의 차별을 딴청부리듯 경쾌한 문체로 그려냈다. 외형적으로 연애소설을 표방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연애는 단순히 남녀의 교감의 문제가 아니라(그건 문제될 것도 없다. 이 소설에서 남녀로서의 두 존재는 갈등의 여지가 없다. 그야말로 한눈에 반해 딱딱 들어맞은 그들은, 성별 존재로서는 전혀 갈등하고 있지 않다.) 다분히 언제가 그 기원인지 알 수도 없는 국적으로 이질화된 타자들간의 문제로 나타난다. 이 문제 앞에서 작가는 역사와 상황 속에서 개인은 떠돌아다니는 부초라고 말한다. 즉 개인은 민족이나 국가 인종에 매이지 않는 고유의 개체라는 뜻이다. 물론 부초라는 표현에는 뿌리내리지 못한 이의 서글픔도 어쩔 수 없이 묻어난다. 가볍지만 경박하지는 않은 것 또한 이 소설의 미덕이다. 비극이 정점에 달하면 유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정체성 혼란의 상황을 농담으로 풀어내기까지 작가가 거쳐간 심적 고통이 소설의 문체처럼 발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또 다른 소설인 <레벌루션 No3.>도 재미는 있지만 만한 깊이는 없어서 아쉽다.

역시 나오키문학상 수상작인 야마모토 후미오<플라나리아>도 재미를 전면으로 내세운 소설이다. 농담의 기저가 비극에 있다는 앞서의 명제는 이 소설에서도 유효하다. 재미있는 소설의 주인공들은 인생의 낙오자라는 공통분모를 안고 있다. 그러고보니 학창 시절에 반에서 제일 웃기는, 자처한 개그맨들은 모두 반에서 가장 가난한 아이들이었다. 슬픔과 웃음은 일종의 샴쌍둥이 같은 것일까.

물론 일본의 젊은 소설이 모두 경쾌발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2002년 아쿠타카와상을 받은 요시다 슈이치<파크 라이프>는 현대인의 일상을 보여준다. 전철을 타고 회사와 집을 오가며 가끔 회사 근처 공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남자의 일상과 그 남자 주위 사람들의 가벼운 에피소드가 소설의 전부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는 소설인데 한순간 아찔해진다. 끝없이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고,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지만 화자는 누구와도 관계맺지 않는다. 의도한 것도 아니고, 따돌림을 당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가 숙명처럼 몸에 배었을 뿐이다. 주인공을 비롯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삶은 지하철을 타고 가다 맞은편 창 어둠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느닷없이 조우했을 때처럼 낯선 동시에 익숙하다. 내 삶이 어떠하다고 말해주지 않으면서 어떠하다고 직시하게 만들어주는, 질투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요시다 슈이치는 아쿠카타와상과 더불어 가장 대중적인 신인작가에게 준다는 야먀모토 슈고로상도 수상했다. 우리의 문학적 풍경 속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실 경쾌발랄하고 당당한 일본의 '대중소설'을 읽다보면 가끔 헷갈린다. 그들의 대중소설에서는 배다른 오빠가 조폭이어서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리는 일도 드물지만 순수문학을 하는 작가가 대중적인 상을 받았다고 해서 경원하는 일도 없다. 이른바 대중과 순수가 경계도 모호하지만 서로 배타적이지도 않고 넘나듦도 자유로워 보인다. 우리 문학에서도 그런 게 가능할까. 쉽지는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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