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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 - 디자인, 디자이닝, 디자이너의 보이지 않는 세계
홍동원 지음 / 동녘 / 2009년 6월
평점 :
제목에 혹 한다고 낚시질 아니다. 월척이다 -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

어릴 때(중고딩 때)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머리 좋은 사람이 만화의 한 장면처럼 머리 위에서 번개불이 번쩍 하면 좋은 카피가 한 줄 씩 술술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EBS 직업의 세계 - 카피라이터 편]에서 나의 예상은 완전히 깨졌다. 주님(광고주)이 요구하는 주제가 정해지면 그것과 관련된 세상의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먹는 것이면 먹어보고 마셔보고 타는 것이면 핸들을 잡아보고, 또 입어보고 만져보고 그렇게 별의 별 짓을 다 해야 카피 한 줄이 힘겹게 머리 위로 올라 올까 말까 란다. 디자이너의 세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 홍동원 지음. 동녘출판사. 제목 참 거시기하다. 얼마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 제목은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였다. 근데 이번에는 [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다. 책 내용이 함량 미달이면 낚시질 이라고, 제목으로라도 눈길 한 번 받아보려는 몸부림이라 여겼겠지만 재미도 있고 내용도 충실한 책이다. 함량 초과다.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디자이너 홍동원이 [월간 디자인]에 연재한 글을 묶은 책이다. 디자인 중에서도 편집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고 디자인 회사 대표다.
홍동원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이리 저리 검색을 하다가 발견한 글 - 그가 디자인 한 책 중에 [단원풍속도첩]이 있단다. 허!허! 왜 책에서는 이 이야기를 안 했을까? 이거 이야기 했으면 그냥 이야기 끝나는 건데...내가 가진 수많은 책들 중에 아니 내가 지금까지 본(not reading but seeing) 수많은 책들 중에 가장 이쁜 책을 꼽으라 하면 두말않고 선택하는 책이다. 단원의 그림을 어떤 모양의 책에 담아야 할 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는 책이다. 자료를 찾으면서 발견한 또 하나 재미있는 포스팅은 검찰 로고 디자인 할 때 담당했던 검사의 블로그다. http://blog.naver.com/tskeum/40071541335

<<단원 풍속도첩>>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저자의 글솜씨도 한 몫 하지만 디자인, 그리고 디자이너들의 세계 즉 일반인들이 깊이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세계가 잘 설명이 되어 있고, 길이 남을 만한 디자인에 대한 뒷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어서다. 우리가 최근에 지겹게 보는 검찰로고 디자인 이야기 - 찰리 채플린의 수염을 보고 만들었다고 하는데... , "Be the Reds" 붉은 악마 로고와 자동차 뒷 유리에서 자주 볼 수 있던 "내탓이오" 디자인이 한 사람의 작품이라는 이야기, "I ♥ NY" 을 디자인 한 계기와 9.11테러 후의 "I ♥ NY" 의 디자인 변화, 12시에 만나요 브라보콘의 말 그대로 뒷 이야기, 프라이탁 가방의 탄생비화, 워드 프로세서 한글 이야기, KS마크(㉿) 이야기, 자동차 번호판을 직접 담당하게 된 이야기, 한겨레 신문의 조금 다른 글자체 등등 알고 있으면 써 먹을 때도 많은 알토란 같은 이야기들이 많다.
처음에 카피라이터와 자료수집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디자이너와 연관시켰는데 저자 홍동원도 "자료 수집은 내 장사 밑천"이라고 이야기 한다. 클라이언트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 외국으로 자료 수집을 나간다. 세계 디자인 블랜드 소비국 10위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디자인 트랜드를 분석한 자료는 이 땅에 찾을 길이 없다. 그래서 외국으로 나간다. 돈과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엔테베 작전'을 방불케 하는 신속, 정확한 판단을 요하는 특급 작전이다. 자료 수집을 하다 보면 돈을 아끼느라 한댓잠을 자기도 하고 비행기 수하물 양을 초과할 까봐 구입하는 족족 긴급 소포로 날려야 한다. 자료의 옥석을 가릴 눈이 없으면 애초에 불가능한 작업이다. 이런 노력이 수십년 쌓여야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듣도 보도 못한 기발한 비둘기 똥구멍이 그려진다.
재미와 즐거움만 있는 책은 아니다. 디자인에 대한, 한국적인 디자인에 대한, 그리고 디자인 세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겨 있는 책이다. 처음 독일 유학 갔을 때 외국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는 학생에게 독일의 디자인 교수는 독일에 왜 왔냐고, 편집 디자인을 할 거면 어차피 돌아가서 한글을 디자인 해야 할 것인데 라고 던진다. 저자가 그토록 '개무시'하던 한국적인 것, 한국에는 디자인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디자인이라는 말만 없었던 것이지 한국적인 디자인의 철학, 원리, 소재가 다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그 때야 깨닫게 된다. 딸 아이 파워포인트 숙제를 도와 주다가 한글이 이쁘게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발전이 없는 한글 문서 편집기 [아래아한글]의 현실을 새삼 느끼고 돈이 없는 곳에 디자인이 없다는 뼈 아픈 세태를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 책은 읽는 내내 즐거운 책이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즐겁고, 저자의 건강한 사고를 읽고 공유할 수 있어 즐거운 책이다. 특정 분야에서 수십년 뼈가 굵은 이의 연속적인 글은 그 동네 사정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제목에 혹 해서 집어 든 책이지만 절대 낚시질 아니다. 월척을 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