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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얻은 글재주 - 고대 중국 문인들의 선구자적 삶과 창작혼
류소천 지음, 박성희 옮김 / 북스넛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쉽게 읽을 수 있는 중국 문장가 이야기 - 천하를 얻은 글재주
고등학교 때 본고사를 준비한다고 한문 강독을 한 적이 있다. 원래는 한문이 아니라 독일어였다.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는데 독일어 하기 싫은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과목이 한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 때는 한문을 좋아한 것보다 독일어를 싫어한 것이 더 큰 이유다. 1학년 때 퍼펙트한 점수로 두 학기 다 '수'를 먹던 성적이 2학년 때는 '우', '미' 3학년 때는 '미', '양' 이었다. 학창시절 유일하게 '양'을 받아본 것이 독일어였다.
제 2외국어 대신 선택한 한문. 다행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한문 선생님이 2분이나 계셨고(다른 학교는 국어 선생님이 한문까지 가르치시곤했다) 두 분다 서예에 일가견이 있고 한학에 조예가 깊으신 분들이였다. 그 때 한문강독을 위해 선택한 교재가 '고문진보'다. 전국시대부터 남송까지 시문을 새롭게 번역한 책으로 옛선비들의 필독서다. 그 책을 통독할 역량도 안 되고 시간도 없어서 시험에 나올 법한 지문들을 골라 공부했다.
아직도 그 책이 있어 목차를 훑어보니 공부한 글들을 표를 해 놓았다. 굴원의 '어부사', 제갈량의 '출사표', 도연명의 '귀거래사',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 한유의 '원인' '원도' '사설' '잡서', 구양수의 '상주주금당기' '취옹정기' 등이다. 그 후 시간이 지나서도 한 번씩 들춰보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은 한유의 '사설師說'이다. 스승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누군가를 스승으로 삼을 때는 사람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 나보다 도를 들음이 낫다면 그의 나이를 따지지 않고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그를 스승으로 삼는다.
천하를 얻은 글재주. 저자가 뽑는 중국 최고의 문인 9명의 이야기다. 중국 최초의 자유 사상가 굴원, 진정한 지식인의 초상 사마천, 고대 지식의 장사꾼 사마상여, 당대 최고의 풍류 명사 혜강, 자연을 닮은 영성주의자 도연명, 광기와 야성의 유랑시인 이백, 속세의 고통을 대변한 관음보살 두보, 귀족과 평민을 오간 문학 거장 백거이, 어질고 따뜻했던 국왕시인 이욱 등이다. 이들 9명 중에서도 내가 다른 책을 통해 더 관심두고 읽은 굴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록 세상이 온통 혼탁할지라도 물들지 않으며 모두 취하여 있을지라도 홀로 깨어 있으라' 그 유명한 [어부사]의 한 대목이다. 굴원은 스물 여섯의 나이에 승상격인 영윤에 버금가는 좌도에 올라 회왕의 투터운 신임을 받았다. 안으로는 임금과 국사를 의논하고, 밖으로는 각국의 제후들을 응대하였다. 그의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은 늘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였다. 한 번은 회왕이 그에게 헌령을 작성하도록 하였는데, 초고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상관대부가 빼앗으려 하자 굴원은 거절하고 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참소를 받는 그는 끝내 회왕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밀려나게 된다.
당시 정국은 진나라와 제나라, 그리고 초나라가 팽팽하게 맞서는 분위기 였다. 굴원은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와 맞서자고 주장했으나 굴원이 쫓겨난 틈을 타 진나라는 장의를 파견하여 회왕을 꾀여 제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게 하였다. 뒤늦게 진의를 알게 된 회왕이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참패를 당하고 그제야 지난 일을 후회하며 굴원을 다시 등용하게 된다. 진나라, 제나라, 초나라 삼국이 팽팽하게 세를 겨루던 시기에 세력을 얻는 친진파들은 굴원을 강남으로 내쫓았고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던 굴원은 조국이 망해가는 비분을 가슴에 품은 채 멱라강에 몸을 던졌다.
이러한 조국을 향한 안타까움은 그의 작품 [어부사]에 잘 드러난다. 자신의 상황을 중취독성(衆醉獨醒, 모두 취하여 있는데 홀로 깨어 있다)이라 말하여 시대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던 것이다. 이후, '중취독성'은 혼탁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중국 3대 전통 절기의 중 하나인 단오절은 굴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굴원이 조국을 걱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분함을 가슴에 안고 멱라강에 몸을 던진 날이 5월 5일이다. 그날의 풍습 중 하나가 쫑즈라는 음식을 강물에 던지는 것인데 물고기 떼가 굴원의 시신을 뜯어먹을까 안타까워한 백성들의 염려가 담겨 있다.
[천하를 얻은 글재주], [중국 최고의 문인 9명의 이야기], [중국 고전], [시가] 이런 것들만 나열해 보면 책장을 열기도 전에 머리 지끈해오고 읽을 엄두가 안 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은 인물을 중심으로한 역사서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글솜씨, 솔직한 견해, 그리고 후대에 미친 영향에 대한 평가들이 적절하게 들어가 전혀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 않는 책이다. 중국 도서박람회에서 단행본 거래량 및 판매량에서 종합 1위를 차지한 작가의 힘이 느껴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