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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척학전집 : 훔친 부 편 - 있어 보이는 척하기 좋은 돈의 문법 ㅣ 세계척학전집 3
이클립스 지음 / 모티브 / 2026년 3월
평점 :

세계 척학 전집: 훔친 부 편 : 허상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서 인간의 평가 조건으로, 부의 변천사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부와 돈은 단순한 교환 수단을 넘어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자 인간의 가치를 표현하는 절대 기준이 되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떠서 밤늦게까지 노동을 시간 속으로 갈아 넣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모든 땀과 시간, 심지어 영혼까지 한 달에 한 번 통장에 찍히는 월급의 숫자 하나로 보상받는 것에 만족하며 나이를 먹어간다.
돈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죽을 때 결코 싸 가지고 갈 수 없는 이 존재하지 않는 숫자에 왜 우리는 인생을 저당 잡힌채 갈망할까?
이클립스의 시리즈 도서 세계 철학 전집의 새로운 도서, 훔친 부 편은 바로 이러한 근원적이고 도발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자기 자식들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조금 더 안정적인 노후를 설계하겠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끝없는 욕심
충분히 인정받을만한 작은 소망마저도 개인의 맹목적인 탐욕으로 낙인찍히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다.
항상 정해진 선을 벗어나는 탐욕과의 경계선이 애매한 탓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사실 이 거대한 부라는 프레임은 개인의 머리 속에서 생겨난 산물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와 국가,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정교하게 직조해 낸 제도이고 인간에게는 어쩌면 덫일지도 모르는 존재이다. 이 책은 경제라는 인류의 역사에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지혜를 현재의 우리 모습에 적용하여, 우리의 부를 누가 가져가는지, 그리고 이 끊임없는 부의 탈취 속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삶을 영위해야 하는지에 대한 불쾌하기도 다행스럽기도 한 개개인마다 저마다 다른 인사이트를 꺼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책의 초반부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등장하는 농부 파흠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문을 연다. 하루 동안 걸어서 돌아오는 거리의 땅을 모두 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에 파흠은 욕망의 질주를 시작한다. 점심때 반환점을 돌아야 했음에도, 조금 더, 아주 조금만 더 좋은 땅을 차지하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오후 늦게까지 걷고 또 걷는다. 결국 해가 지기 전 출발점으로 돌아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달리던 그는 도착점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그 거대한 욕망의 끝에서 그의 시체가 들어갈 땅은 사실 단 2m에 불과했다.
파흠의 죽음은 인간의 경제 생활을 관통하는 비극적 메타포다. 끝을 모르고 갈구하는 돈의 근거를 끝까지 추적해 보면, 결국 다른 사람도 이 가치를 믿으니까라는 허약한 명제 밖에 남지 않는다. 평생을 바치는 저축, 연봉 협상, 노후 설계가 전부 이 한 문장 위에 위태롭게 쌓아 올려져 있다. 우리는 그 근거를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물어본 적 없이 인생 전체를 걸고 있다.
이 지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노아 하라리의 통찰은 우리의 맹목적 믿음의 근거를 제시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인류를 물리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핵심 동력을 하라리는 집단적 상상력에서 찾는다. 우리는 사물을 단지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허구를 집단적으로 믿고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이다. 회사, 브랜드, 자격증, 학위 등 우리가 그토록 의지하는 것들은 사실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돈 역시 마찬가지다.
돈은 인류 역사상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훌륭한 상호 신뢰 체계다.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법률이나 제도, 심지어 종교조차도 넘볼 수 없다.인류 공통으로 숭배하는 유일하고 강력한 가치 체계이다. 종교와 달리 돈은 정직하고 보편적으로 작동한다. 과거 조개껍질에서 금으로 이어지던 실물 가치는, 미국이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지 않는 불태환 화폐 제도를 선언하면서 완전히 증발했다. 이제 종이 쪼가리 하나, 디지털 숫자 하나가 모든 실물을 대체한다. 어쩌면 실체 없는 허구에 대한 집단적 믿음이 우리의 욕망을 끝없는 질주로 떠민 것은 아닐까?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깨달음은 명확하다. 돈이라는 것이 일종의 허구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그 작동 원리를 아는 사람만이, 돈을 맹목적으로 숭배하지 않고 자신의 통제 하에 유용한 도구로 부릴 수 있다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의 이야기는 우리가 학창 시절부터 줄곧 들어온 경제학의 상식을 통쾌하게 뒤집는다. 스미스가 남긴 가장 거대한 어록인 ‘보이지 않는 손'은 사실 그의 방대한 저서 국부론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스미스는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면 만사형통이라는 천박한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즉,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미안하게도 개개인의 이기심이며, 시장에서 거래할 때 상대방의 자비심에 호소하지 말라는 냉혹한 현실을 지적한다. 거래는 자비심이 아니라 상호 이익의 충족이 될 때 작동한다. 이것이 시장이라는 게임의 첫 번째 규칙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스미스의 시장은 이기심만으로 굴러가는 것도 물론 아니다. 우리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물건을 사는 일상적인 행위 이면에는 거대한 신뢰의 네트워크가 깔려 있다. 당장 눈앞에서 금과 물건을 맞바꾸는 것이 아니라면, 시장 상인은 카드사가 대금을 지불할 것을 믿고, 카드사는 고객이 결제일에 돈을 입금할 것을 믿는다. 즉,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도가 높을수록 자본의 순환은 빨라지고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한다.
책에 묘사된 스미스의 통찰을 현대 경제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면 네 가지 게임의 규칙이 도출된다.
첫째, 거래는 상호 이익으로 작동한다. 상대방의 이익을 충족시켜야 비로소 내 이익도 얻을 수 있다.
둘째, 시장 참여자들은 사실 경쟁을 원하지 않으며 기회만 되면 담합하여 경쟁을 없애려 한다. 힘은 흩어진 쪽이 아니라 모인 쪽에 있기 때문이다.
셋째, 따라서 경쟁이 존재해야만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경쟁이 사라지는 순간 '보이지 않는 손'은 소수의 강한 자들을 위한 폭력적인 손으로 변질된다.
넷째, 돈은 결코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 낙수효과는 환상이며, 돈은 철저히 돈이 있는 곳으로 중력처럼 흐른다.
결국 우리는 이 돈의 길목을 파악하고 철저히 준비해야만 부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 고전 경제학자의 원칙이 2026년에도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고 이를 아는 사람만 획득할 수 있다. 동시에, 이기심이 폭주하여 담합과 불공정이 판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의 적절한 개입과 사회적 조율이 필수적임을 깨닫게 된다. 어차피 자본 그 자체에는 양심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책에서 만나는 경제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논쟁적인 인물, 바로 칼 마르크스의 통찰은 전율을 일으킨다.
"돈이 신이 되면 사람이 물건이 된다."
마르크스는 이미 150년 전에 자본주의의 이 끔찍한 본질을 정확히 간파했다.
우리는 우리의 시급과 월급을 협상하며 나 자신의 이름에 가격표를 매긴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도 당연한 시장의 원리로 인정하고 있다. 마르크스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이 지점, 원래 세상은 그런거야라는 안일한 체념에서 멈추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원래부터 당연한 것은 없다. 마르크스는 시장에 놓인 테이블 하나에 10만 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을 때, 그 안에 깃든 노동자의 땀방울과 노력, 통증과 시간이 완벽하게 지워지는 현상, 즉 물신숭배를 날카롭게 꼬집었다.
인간이 창조해 낸 노동의 가치는 철저히 은폐되고, 오직 결과물인 물건에 매겨진 가격만이 진실이 되는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와 관계는 사라지고, 물건과 물건 사이의 관계, 즉 가격을 매개로 한 교환 만이 인간관계의 주요 활동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상거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 부르주아지는 인간 사이에 적나라한 이해관계와 냉혹한 현금 거래 외에는 어떤 연결 고리도 남기지 않았다.
더욱 두려운 것은 원래 가격이 붙을 수 없는 영역까지 철저히 상품화되어왔다는 부분이다.
중세의 농노는 영토에 묶여 있었을지언정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분절하여 시장에 내다 팔지는 않았다. 노동에 시간당 가격을 매겨 거래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슬픈 결과물이다. 땅이 상품이 되고, 물이 상품이 되고, 지식이 상품이 되더니, 결국 우리의 생명과도 같은 노동 시간이 돈이 된 셈이다.
기업은 계속해서 덩치를 키우며 잉여생산물을 독식하고, 노동자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초과하며 자신을 갈아넣는다. 하나의 직장으로는 사고 싶은 물건을 살 수 없어 짜투리 인생도 박박 긁어모아 N잡러가 된다. 돈은 도구였지만, 어느새 우리의 주인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를 뒤집을 유일한 방법으로 혁명을 꿈꿨지만 역사는 자본주의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혁명이 실패했다고 해서 그의 주장이 폐기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정교한 메커니즘 속에서 나의 가치가 돈으로만 환산되고 있으며, 그마저도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부여할 수 있다. 이 뼈아픈 현실 인식이 선행되어야만, 미래에 우리의 가치가 돈보다 더 고귀한 대우를 받는 세상을 향한 꿈을 꾸고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현대의 투자자 조지 소로스는 그 자본주의의 최전선인 금융 시장이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심리적인 맹신에 의해 굴러가는지를 폭로한다. 소로스의 '재귀성(Reflexivity) 이론'은 오늘도 대한민국 여기저기 경제 활동 과정에서 벌어지는 예언의 자기 실현 현상을 설명한다. 시장 참여자들의 믿음이 현실을 바꾸고, 그렇게 바뀐 현실이 다시 대중의 믿음을 더욱 강력하게 강화하는 끝없는 피드백 고리다. 실적이 좋아서 주가가 오르는 것인가, 아니면 주가가 오르니까 사람들이 열광하여 실적이 좋아 보이는 것인가?
금융시장은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는다. 항상 어떤 방향으로든 현실을 왜곡하며, 그 왜곡은 실제 시장에 물리적 영향을 미친다. 단순히 시장의 표면적 지표를 거울처럼 받아들이는 수동적 관찰자와, 그 이면에 숨겨진 대중의 심리 및 사회적 분위기를 입체적으로 읽어내는 투자자의 수익률 차이는 여기서 벌어진다.
왜 가격이 떨어지는지 묻는 대신, 가격이 떨어지면 시장 구조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격 하락이 공포를 불러 추가 하락을 견인하는 구조가 보인다면 그것이 바로 대폭락의 신호이며, 가격 상승이 맹목적인 희망을 부추겨 추가 상승을 부르는 구조가 보인다면 그것이 붕괴 직전의 버블 신호라고 소로스는 말한다. 그가 영국 영란은행을 굴복시키고 파운드화 공매도로 막대한 부를 거머쥔 것은 단지 차트를 잘 봐서가 아니다. 허상에 불과한 고평가된 파운드화의 통화 가치와 대중의 맹신이 빚어낸 괴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돈의 흐름을 지배하려면 눈앞의 현상을 넘어 대중의 욕망과 제도가 작동하는 원리, 그리고 결과의 냉정한 예측까지 관통하는 혜안이 필요하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 세 가지로 분류했다.
'노동'은 먹고살기 위해 하는 끝없는 반복이다. 밥을 짓고, 출퇴근을 하고, 월급을 받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존 활동이다. 아렌트는 이를 동물도 하는 가장 낮은 차원의 활동으로 보았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을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 정의해버린다. 대통령부터 아르바이트생까지 모두가 스스로를 '일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무슨 일 하세요?"가 한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최우선 질문이 되어버렸다. 아렌트는 이를 ‘동물적 노동자 의 승리'라고 부르며 탄식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할 인간 고유의 가치가 생존을 위한 생리적 활동에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현상은 유독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의 명함 문화가 그 좋은 사례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건네는 명함에는 그 사람의 철학이나 세계관이 아니라 회사, 부서, 직급이라는 노동자로서의 계급장만 적혀 있다. 만약 그 명함을 빼앗긴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물론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아렌트의 시각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모욕하는 엘리트주의로 비칠 위험도 있고, 뚜렷한 현실적 대안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녀가 던지는 본질적인 경고는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노동만으로 인간의 삶이 채워질 때, 사회는 비정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진리를 탐구해야 할 대학은 기업의 부품을 생산하는 직업 학원으로 전락했고, 당장 돈이 되지 않는 순수 학문은 도태되고 있다. 노동과 자본이라는 단일한 가치관만이 지배하는 사회는 미래의 먹거리를 창출할 상상력도, 위기에 대처할 식견도 잃어버린다. 다양성이 압살된 채 노동의 효율성에만 모든 가치가 집중된 사회는, 외부의 작은 경제적, 사회적 충격에도 산산조각 날 수밖에 없는 얇은 유리그릇 신세가 될 뿐이다. 더군다다 AI 시대에 노동력만이 무기인 인간은 더욱 필요없는 폐품이 되어갈 운명아니겠는가?
이 책은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경제의 거대 담론들을, 우리의 일상 속 에피소드와 교차시키며 탁월한 몰입감을 주고 있다. 거장들의 사상이 동네서점의 한적한 서가가 아닌,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빛나고 있고 예리한지 잘 보여준다.
한 개인이 책 한 권에서 얻은 인사이트로 자기의 여생마저 드라마틱하게 바꿀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았 듯, 개개인이 모은 공동이 자각하고 인지하여 조금 더 나은 경제체계를 조금씩 만들어간다면 그래도 노동을 넘어 우리의 가치를 스스로 빛낼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