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R 위대한 통찰 - 지난 100년을 바꾼 살아 있는 경영 아이디어 30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지음, 도지영 옮김, 최한나 감수 / 비즈니스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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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R 위대한 통찰 : 미래를 앞당기는 기업가 정신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가 창간 100주년을 맞아 선보인 “HBR 위대한 통찰”은 지난 한 세기 동안 비즈니스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30편의 대표 기사를 엮어낸 자신들의 업적을 정리한 책이다. 68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속에서 연구가와 기고가들이 바라본 미래 - 즉 2025년 현재의 모습들은 때로는 너무나 정확한 예측에 섬뜩한 경우도 있지만 기대에 못 미치거나 기대를 뛰어넘는 성과도 있었다. 발표 당시에 책에 제시되는 인사이트를 얻고 미리 움직인 자들의 미래는 분명 남들보다 한 수 앞선 시대를 이끌어가는 기업가 정신이 되었다. 

HBR이라는 매체가 가진 가장 놀라운 능력은 시대를 3~5년 앞서 읽어내는 통찰력이다. HBR에서 특정 주제가 다뤄진 후 약 3~5년이 지나면 주식시장이 개화기를 맞는다는 패턴이 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HBR이 학계의 엄밀함과 실무의 현장성을 동시에 갖춘 SSCI 등재 저널이자 경영 현장에서 신뢰받는 실용서로서의 이중적 지위 덕분이다. 한때 직장인이라면 무조건 읽어야할 필독서로 인기몰이를 했던 김위찬과 르네 마보안의 '블루오션 전략'이 2005년 대중적 인기를 얻기 전인 1997년에 이미 HBR에 소개되었고,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의 '파괴적 혁신', 마이클 해머의 '리엔지니어링' 역시 HBR 기사로 시작해 글로벌 스탠더드가 된 사례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책에 수록된 인공지능과 머신러닝 관련 아티클들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AI 폭발시대를 10년, 20년 전에 예견한 선각자들의 놀라운 안목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특히 2015년 게재된 '기계는 어떻게 스스로 학습하는가'와 2020년 '머신러닝 성공전략' 같은 글들은 현재 생성형 AI 열풍의 근본 메커니즘을 이미 정확히 짚어내고 있어 흥미를 끈다.

책에서 다룬 머신러닝 관련 내용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예측'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다. 많은 사람들이 AI와 머신러닝을 마법 같은 기술로 여기지만, HBR의 필자들은 이를 '잡음 사이에서 신호를 찾고, 수집 중인 데이터 전체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기술로 명확히 정의했다. 아무리 뛰어난 애널리스트도 단 몇 분, 몇 초 사이에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파헤쳐 패턴을 찾고 예측 작업을 하는 머신러닝의 속도와 강력함을 모방할 수 없다는 지적은, 2025년 현재 ChatGPT와 같은 생성형 AI가 보여주는 능력을 정확히 예견한다. ​

더 흥미로운 점은 HBR이 단순히 기술의 긍정적 측면만 조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21년 게재된 '머신러닝이 선로를 벗어날 때'라는 아티클은 머신러닝 기반 시스템이 가진 본질적 리스크를 세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머신러닝 기반 시스템이 판단을 내릴 때 확률에 기반하기 때문에 '일부' 판단은 언제든지 틀릴 위험이 있다. 둘째, 시스템 작동 환경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 셋째, 복잡한 시스템 안에서 발생한 오류를 식별하고 원인을 분석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분석은 2024년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AI 환각 문제, 편향된 학습 데이터로 인한 차별적 의사결정, 블랙박스 알고리즘의 불투명성 문제를 몇 년 앞서 정확히 진단한 것이다.



뿐만아니라 스테디 셀러인 '설득의 심리학', '디자인 씽킹' 같은 개념들도 단순한 기술이나 방법론을 넘어, 인간 행동과 사고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설득은 단순히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감정과 신뢰, 권위와 일관성 같은 심리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과정이며, 디자인 씽킹은 사용자 중심의 공감에서 출발해 문제를 재정의하고 창의적 해결책을 찾아가는 반복적 과정이다. 이러한 개념들이 HBR을 통해 경영 현장에 적용되면서, 비즈니스는 단순한 효율성 추구를 넘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가치 창출로 진화해왔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미래지향적인 주제들이 등장한다. 매트 와인지얼과 메헥 사랑의 '상업적 우주 산업 시대가 도래하다'는 SpaceX, Blue Origin 같은 민간 우주기업들이 어떻게 우주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나이절 토핑의 '탄소 제로의 미래에서 성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는 기후변화 대응이 단순한 사회적 책임을 넘어 비즈니스의 생존 전략이 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제들은 2025년 현재 가장 뜨거운 이슈들이지만, HBR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이를 다뤄왔다.

특히 우주 산업과 AI를 HBR에서 언급한 시점으로부터 3~5년 후 주식시장이 개화기를 맞았다는 한 독자의 관찰은 매우 흥미롭다. 2015년경 HBR에서 머신러닝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고, 2018-2020년 AI 관련 기사들이 폭증했다면, 2023년 ChatGPT의 등장으로 AI 주식 붐이 일어난 것은 정확히 그 패턴에 들어맞는다. 이는 HBR이 단순히 트렌드를 좇는 것이 아니라, 학계와 선도 기업들의 실험과 연구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먼저 포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HBR이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이유는 학문적 엄밀함과 실무적 유용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SSCI(Social Sciences Citation Index)에 등재된 학술지로서 학문적 공신력을 갖추면서도, 경영 현장에서 오랫동안 신뢰를 받고 있다. 경영학 이론을 기업 실무에 적용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내고, 경영자와 임직원들이 마주한 고민과 해결 방안을 시의적절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MBA 과정에서 필독서로 채택되는 동시에, 실제 경영자들이 의사결정의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매체는 HBR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이중적 정체성은 HBR의 편집 방침에서도 드러난다. 학계의 최신 연구를 소개하되, 그것이 실무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 사례와 함께 제시한다. 반대로 기업 현장의 혁신적 시도를 다루되, 그것을 이론적 프레임워크로 체계화해 다른 조직에서도 응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번역' 작업이야말로 HBR의 핵심 가치이며, 이 책에 수록된 30편의 아티클 모두가 그러한 번역의 결과물이다.



이 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선 MBA를 준비하거나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필수 교재나 다름없다. 각 아티클이 해당 분야의 고전이자 필독서이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창업자나 경영자들에게는 자신의 비즈니스를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 마케터에게는 소비자 심리와 브랜드 전략의 본질을, HR 담당자에게는 조직과 리더십의 원리를, 전략기획자에게는 경쟁과 혁신의 메커니즘을 알려준다.

하지만 나는 특히 AI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직장인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머신러닝이 직장 일의 40% 이상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우리는 AI와 어떻게 협업할 것인지, 인간의 고유한 가치는 무엇인지, 어떤 역량을 개발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책에 수록된 AI 관련 아티클들은 단순히 기술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비즈니스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기술 자체보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변화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AI 버블론이 슬슬 고개를 쳐드는 상황에서 과거 닷컴 버블과는 다르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을 얼마나 심도있게 들여다 볼지 기초체력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HBR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 지 명확히 알려준다.

트렌드를 좇는 것이 아니라 트렌드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변화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도하고 싶다면, 한번쯤 읽어야 할 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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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 2 - 한순구의 게임이론으로 읽는 역사 : 리더십편 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 2
한순구 지음 / 삼성글로벌리서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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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 2 : 게임이론으로 되짚어 보는 역사의 이면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한순구 교수가 저술한 “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 2”는 경제학자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해부한 리더십의 관점으로 바라본 역사의 숨막히는 한순간들이다. 26개의 결정적 순간들을 게임이론의 렌즈로 해석하며 역사 속 인물들이 선택한 배경과 판단, 그리고 실패의 결과를 초래한 이유들을 분석해본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일본 전국시대의 세 명 영웅에 대한 평가와 정치적 결단에 대한 부분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자신에게 반대했던 영주들을 쫓아내고 자신의 측근들만을 에도 중심으로 재구성해 권력을 공고히 했다. 히데요시의 구 가신세력을 토벌하고 영지를 몰수하며, 자신의 세력으로만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적을 자신의 장수로 포용했던 오다 노부다나가 어이없는 죽음으로 내몰린 것과는 정 반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같은 주제를 놓고 저자는 두가지 상반된 의견을 내놓아 잠시 어리둥절했다. 유비의 패착을 관우와 장비라는 측근들에게 정치적 동료로서 포용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새로운 도전자들의 출세 길이 막히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

이 상충되는 전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게임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맥락에 따른 최적 전략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은 아닐까?

유비는 약자의 위치에서 세력을 확장해야 했기에 다양한 인재를 포용하는 '협조 게임' 전략이 필수였다. 반면 이에야스는 이미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하고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후였기에, 배신 가능성이 있는 외부 세력을 제거하고 충성도 높은 측근으로 체제를 안정화하는 '비협조적 게임' 전략이 합리적이었다. 즉, 권력 획득 단계에서는 포용이, 권력 공고화 단계에서는 선별적 배제가 최적 전략이 되는 것이다. 같은 이론을 각기 다른 시대의 역사 속을 프레이밍할 때 이런 미묘한 차이로 인해 이론의 적용이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다는 흥미로운 메시지를 던져준다.


오다 노부나가는 과감한 혁신으로 시대 변화를 주도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자세로 기회를 포착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와 끈기로 최적의 때를 기다렸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그를 경계해 먼 에도로 보냈을 때조차 가족까지 희생시키며 참고 기다렸고, 결국 260년 에도막부를 열며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게임이론에서 이는 '백워드인덕션(backward induction)' 전략으로 설명된다. 이에야스는 현재의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미래의 최종 결과를 역산해 최적의 선택을 했다. 반면 한신은 이 백워드인덕션을 읽지 못해 유방에게 토사구팽을 당했다는 분석이 책의 또 다른 교훈이다.​

항우는 진나라를 정복한 후 너무 성급하게 공로를 세운 장수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줬고, 정작 유방과의 전쟁에서 이미 받을 것을 다 받은 이들이 도우러 오지 않아 사면초가에 몰렸다. 게임이론적으로 항우는 세 가지 실수를 했다: 첫째, 내부의 적(초나라 의제)을 제거하지 않고 외부 전쟁을 벌였다. 둘째, 논공행상을 전쟁 종료 전에 해버려 동맹의 인센티브를 상실시켰다. 셋째, 경제력이 높은 관중 땅을 유방에게 내주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또 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신라의 삼국통일로, 김춘추가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 불교·유교를 활용한 문화 통합 전략을 썼다는 점이다. 게임 이론의 '징벌 메커니즘'으로, 협력 유지를 위한 장기 보상 시스템을 보여준다. 유방은 이러한 교훈을 실천해 한나라를 건국했으며, 공신 한신을 처형한 것은 충성 관리의 냉철한 면을 드러낸다. 로마 시대나 가마쿠라 막부 사례처럼, 명성 과신이 몰락을 부른다는 분석도 신선하며, 몽골 침략 승리 후 내부 부패로 무너진 가마쿠라의 경우를 통해 리더의 '신호 관리'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역사 팬에게는 재미있고, 경영자에게는 실전 팁으로 다가온다.​​


고려 공민왕의 개혁 실패를 게임 이론의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로 분석하는 사례는 직장생활에서 비정함을 느낄 수 있는 적나라한 예시가 아닐 수 없다. 이 문제는 주인(공민왕)이 대리인(신돈)을 통해 목표(권문세족 개혁)를 달성하려 하지만, 정보 비대칭과 동기 불일치로 대리인이 주인의 이익을 저해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공민왕은 몽골 혈통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신돈에게 전권을 부여해 전민변정도감(토지·노비 개혁 기관)을 운영하게 했으나, 신돈의 비리와 권문세족 반발로 개혁이 실패하자 신돈을 버리고 처형했다.​

게임 이론적으로, 이는 '우월 전략(dominant strategy)'인 배신의 딜레마로 설명된다 – 대리인(신돈)이 주인(공민왕)의 책임을 피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된 데 실망하며, 공민왕이 자신을 버릴 가능성을 예상했다. 신돈 처형 후 공민왕은 자제위(홍륜 등)를 새 대리인으로 삼아 친위 조직을 만들었지만, 홍륜은 이전 신돈의 운명을 가만히 지켜만 보지 않았으나, 어차피 자신에게 돌아올 화살을 기다리느니 공민왕 암살로 선제 타격을 감행했다. 이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로, 대리인이 주인의 감독을 피하거나 보상을 과도히 기대해 배신하는 메커니즘을 드러내며, 리더가 대리인에게 인센티브와 감독을 균형 있게 제공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결국 공민왕의 개혁은 내부 배신으로 무너졌고, 이는 현대 조직에서 상사의 책임 회피가 직원 반발을 부르는 사례로 비유할 수 있다.


한순구 교수의 책은 역사를 단순히 과거의 사실로 보지 않고, 반복되는 인간의 속성에 따른 결과물로 이해하기 시대가 변해도 놓치지 말아야할, 현재이 우리가 직면한 의사결정의 실험실로 활용할 수 있다. 현재의 조직과 정치, 경영 현장에서 내려야 할 결정들에 대한 실용적 가이드로 잘 정리해서 머리 속에 챙겨놓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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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 - 더 이상 불안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키렌 슈나크 지음, 김진주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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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 : 걱정 꽁꽁 묶어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기




임상심리학자 키렌 슈나크 박사의 “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 가장 보편적인 감정이자 은밀하게 퍼져있는 고통인 불안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도 따뜻한 해답을 건내준다. 20년 이상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저자는 불안을 단순히 없애야 할 부정적 감정이 아닌, 우리 내면의 신호로 재해석하고 불안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제안하고 있다. 불안의 신경학적, 생리학적, 진화적 필연성을 설명하고, 실질적인 극복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고 있다. 


슈나크 박사가 제시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바로 '데몽타주(demontage)', 즉 불안의 해체다. 영화의 몽타주가 여러 장면을 이어 붙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듯, 우리의 마음은 단편적인 기억, 부정적 감정, 미래에 대한 두려운 이미지의 상상 조각들을 긁어 모아 불안이라는 거대한 그림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결과물은 실체가 아닌 우리 뇌와 감정이 얽힌 왜곡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래서 작가가 알려주는 불안을 다루는 첫걸음은 이 거대한 심리적 콜라주를 하나씩 떼어내는 작업이다. 내가 느끼는 불안이 실제로 존재하는 위험인가, 아니면 상상이 증폭된 것인가를 구별해야 한다. 이는 불안을 적으로 규정하고 처절한 전투에 임하는 방식이 아니라, 불안의 구조를 하나씩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해보는데서 시작된다. 외과의사가 종양을 제거하기 전에 그 구조와 위치를 면밀히 파악하듯, 우리도 불안의 구성 요소를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원인과 규명을 시작해야한다는 것이다. ​


책에서 제시되는 불안 극복의 핵심 전략은 '유연성'과 '수용'이다. 


이는 현대 심리치료에서 가장 과학적인 접근법으로 평가받는 수용 전념 치료(ACT,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의 핵심 원리이기도 하다.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한 현실에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태도, 그리고 불안을 억누르기보다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을 골자로 한다. 


'분홍색 코끼리' 실험을 들어보자. 우리가 의도적으로 분홍색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머릿속에 그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떠오르게 된다. 불안도 마찬가지다. 불안을 억압하고 밀어내려 할수록 불안은 더욱 강력하게 우리읠 삶을 지배하고 제어한다.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 불안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치유의 형태와는 많이 다르지만 책장을 넘겨갈수록 오히려 이런 접근태도가 현실에 기반한 극복의 단계라는 확신이 들 것이다.


수용은 단순히 체념이나 포기가 아니다. 자신의 내적 경험을 조작하려 하지 말고 그대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불안하거나 우울할 때, 이를 무시하거나 기분을 바꾸려 노력하고 애쓰는 대신 "아, 지금 나는 불안하구나"라고 인정해보자. 이러한 태도는 마음챙김과 수용의 과정을 통해 도달할 수 있디고 저자는 조언하고 있다. 


불안한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불확실성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을 싫어하지만, 삶은 언제나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와 같다. 그러나 저자는 인생이 러시안 룰렛은 아니라고 말한다. 불확실성은 위험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바라봐야 한다. 불안을 없애는 대신, 불확실성을 견디는 근육을 기르는 조언이 등장한다. 마치 운동으로 근육을 키우듯, 작은 불확실성부터 시작해서 점차 더 큰 불확실성을 견디는 연습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예측하려는 욕구를 내려놓고, 삶의 예측 불가능성을 받아들일 때 역설적으로 더 큰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빠지기 쉬운 완벽성에 대한 통제는 실제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무시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경향은 끊임없는 불안의 원천이 되고 만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태도, 즉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이 불확실성 속에서 균형을 잡는 핵심요소라고 볼 수 있다.

책에서는 이론적 설명 뿐 아니라, 임상 현장에서 검증된 구체적 기법들이 제시되어 독자가 실행을 할 수 있는 가이드를 제시한다.


첫째, '감정에 이름 붙이기'다. 막연한 불안을 "지금 나는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수행 불안을 느끼고 있다"처럼 구체화하면 그 감정이 더 관리 가능해진다.


둘째, '자기 연민 실천'이다. 불안을 느끼는 자신을 질책하는 대신, 친구를 대하듯 부드럽게 위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괜찮아, 이 또한 지나갈 거야"와 같은 자기 위로의 말을 기록하고 반복해서 읽는 것도 효과적이다.


셋째, '생산적 주의 분산'이다. 이는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의미 있는 활동으로 주의를 옮기는 전략이다.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현실로 복귀하는 실용적인 방법이다. 예를 들어 불안이 엄습할 때 의미 있는 프로젝트에 몰두하거나, 타인을 돕는 활동을 하는 것이다.​


넷째, 불안의 긍정적 기능을 기억하는 것이다. 불안은 우리에게 위험을 알리고 대비하게 만드는 적응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적절한 수준의 불안은 우리를 더 신중하게 만들고 더 나은 준비를 하게 한다. 문제는 과도한 불안이지, 불안 자체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 제목 중에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표현이 있다. 이 시적이면서도 정신분석학적인 제목은 불안이 단순한 심리적 불편함을 넘어 우리 존재의 근간을 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정확히 포착한다. 우울증,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얼마나  평상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황폐하게 만드는지, 제목 하나만으로도 잘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나의 경우를 돌이켜보면, 불안감이 평균이상으로 삶을 지배했던 것 같다. 조직의 리더로서 조직을 이끌면서 성과를 내기 위해, 그리고 경쟁사 또는 협력사와 좀 더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 시나리오 중에는 성공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안 좋은 최악의 경우까지도 고려해야 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부정적 편향에 빠지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경험했던 것이 바로 슈나크 박사가 말하는 '인지 왜곡'과 '최악의 시나리오 자동 상상'이었음을 깨달았다. 리더로서 책임감과 신중함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과도해지면 부정적 편향의 덫에 빠진다. 그래서 보니까 매사에 삶에 대해서 자신감이 건축되는 듯했지만, 때로는 불안이 지배하면서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해서 과도하게 걱정하거나, 과거에 잘못 선택한 것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단념하는 모습들이 자주 나타났다.​


더욱 문제적이었던 것은 이런 사고 과정을 자연스러운 사고 과정으로 인지하고, 자신의 강점으로 착각했다는 점이다. '나는 신중하고 철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과도한 걱정을 긍정적 특성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저자의 지적처럼, 이는 불안을 없애야 할 적으로 여기는 대신 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위험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 빠지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이 불안을 평상시에 달고 사는 상황에 처할 수 있고, 여기서 큰 장애가 있다고 스스로 진단할 수 있을 것 같다.​


건강염려증도 그 연장선이었다.

평소에 넘어갈 수 있는 작은 신체 증상도 "혹시 이게 문제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나?"를 고민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슈나크 박사가 말하는 '질병불안'이라는 그림자였다. 회피 행동도 나타났다. 건강검진을 미루거나, 특정 증상에 대해 정보를 과도하게 검색하는 안전 추구 행동이 오히려 불안을 강화시키는 연료가 되었다.​



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는에서, 우리는 불안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그것을 수용하며,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울 수 있고, 비로소 불안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나는 여전히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이제 그 불안은 나를 잠식하는 우려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내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준비하고 있다는 신호이고, 나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내면의 목소리다. 불안과 싸우는 대신, 불안과 함께 춤추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을 깨우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배웠다. 불안은 우리를 피폐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다루면 우리를 더 깊고 성숙한 존재로 성장시키는 촉매가 될 수 있다. 불안을 느끼는 것은 약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성장하고 있고, 무언가를 신경 쓰고 있으며, 살아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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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혈관을 만드는 법 - 고혈압, 뇌졸중, 심근경색을 물리친다!
이케타니 도시로 지음, 윤경희 옮김 / 청홍(지상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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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혈관을 만드는 법 : 바로 지금 혈관 관리 시작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이케타니 도시로(池谷敏郎)의 『100년 혈관을 만드는 법』은 일본의 내과의사이자 혈관 건강 연구자인 저자가 수십 년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건강수명 100세”를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생활습관을 제시한 책이다. 일상 속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어떻게 혈관의 나이를 늙게 혹은 젊게 만드는지를, 실생활 예시와 과학적 근거를 곁들여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달라진다. 

젊을 때는 단순히 “피곤하네, 좀 쉬면 낫겠지” 정도로 넘겼던 몸의 신호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하루 내 삶의 질을 좌우하는 진지한 경고로 다가온다. 나 또한 고혈압과 고지혈증을 앓고 있어, 매일 약을 복용하며 지내는데, 돌이켜보면 이 문제의 씨앗은 이미 젊은 시절에 있었다. 불규칙한 식사, 짠 음식, 잦은 회식, 과로와 만성 스트레스. 이런 것들이 오랜 세월 내 혈관을 꾸준히 때리며 조금씩 손상시켜 온 것이다. 


혈관은 한번 손상되면 회복이 어렵다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 상태에서 더 악화시키지 않고 유지하는 일은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이 희망이다. 이케타니 도시로의 『100년 혈관을 만드는 법』은 바로 이 ‘지금부터라도 바꿀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과학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책의 중심 개념은 혈관의 나이를 젊게 유지하는 생활 습관의 총체라는 것이다. 

그는 “혈관은 한 번에 망가지지 않는다”는 단언과 함께,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 움직임, 수면의 질, 스트레스 반응이 모두 모여 혈관의 수명을 결정한다고 강조한다. 흥미로운 점은 ‘혈관의 노화’를 ‘개인 전체의 노화’로 본다는 시각이다. 즉, 혈관이 젊다는 것은 단순히 심혈관질환의 위험이 낮다는 뜻을 넘어, 뇌의 혈류, 피부의 탄력, 장기의 기능까지 젊게 유지된다는 뜻이 된다.



식습관과 혈당 관리에 대한 구체적 실천법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혈당 스파이크’라는 개념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식사 후 혈당이 급상승할 때 혈관벽에 산화스트레스가 가해지고, 이 과정이 수년, 수십 년 반복되면 결국 염증과 경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아침에 김밥 한 줄이나 라면으로 때우는 습관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이 책을 통해 절감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한 간단한 식사가 사실상 혈관을 공격하는 반복적 자극이었다는 점은, 읽는 내내 불편하면서도 강력한 경고로 다가왔다. 편의점에 잠깐 들린 아침식사가 오히려 독이라는 쓰라린 현실이 턱 밑으로 들어온 셈이다.

이케타니는 “무엇을 먹느냐”보다 “어떻게 먹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식전에는 반드시 식이섬유나 단백질을 먼저 섭취해야 하며, 이를 통해 혈당 상승을 완화할 수 있다. 일본식 표현으로 ‘베지 파스트(채소 먼저)’나 ‘소이 퍼스트(콩 먼저)’를 강조하는데, 이는 한국 식단에서도 충분히 응용 가능하다. 두부, 콩나물, 된장찌개 같은 메뉴가 대표적이다. 저자는 또한 ‘5일 선택법’이라 하여, 일주일 중 5일은 오메가3가 풍부한 생선류(고등어, 연어, 정어리 등)를 꾸준히 섭취하라고 권한다. 다만,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식 반찬 구성이 많아 실천에 어려움이 있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식이 원칙 자체는 충분히 응용 가능하다.


혈관의 젊음을 유지하는 생활습관 전반으로 확장되면서 실천 가능할 방법들이 제시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짜증을 내지 않는 것’도 혈관 보호의 첫걸음이라는 주장이다. 짜증이나 분노는 일시적으로 교감신경을 과도하게 자극하여 혈압과 심박수를 급격히 올리고, 이때 혈관 내벽에 손상을 준다. 저자는 실제로 병원에서 환자의 스트레스 반응을 관찰하면서, “성격이 온화한 사람일수록 혈관이 탄력 있고 깨끗하다”고 주장한다. 단순한 정신론이 아니라, 스트레스 호르몬(코르티솔, 아드레날린)의 생리작용에 근거한 설명이다.

수면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는 “수면은 하루 중 유일한 혈관의 회복 시간”이라고 표현하며, 최소 7시간의 숙면을 확보할 것을 권한다. 수면 부족이 지속되면 혈관 내 염증성 단백질이 증가하고, 교감신경 항진으로 인해 혈압이 떨어지지 않게 된다. 직장인들이 흔히 처하는 ‘수면 부채’가 결국 혈관 노화를 앞당긴다는 것이다. 이 점은 저자가 직접 측정한 수면 중 혈압 데이터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사원시절 하루 5시간 정도 자는게 자랑이었던 나 자신이 미련 곰탱이였다는 뼈 아픈 실책을 상기시키는 부분이다., 밤새 뭐 대단한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실천 가능한 궁극 활동은 바로 운동이다. 

이케타니는 “혈관이 젊다는 것은 근육이 살아 있다는 뜻”이라고 말하며, 가장 실천하기 쉬운 운동으로 ‘걷기’를 권장한다. 하루 8,000보를 기준으로 하되, 단순히 걷는 것이 아니라 리듬과 속도에 변화를 주어 심박수를 부드럽게 자극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짧은 시간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좀비 체조’(팔과 다리를 약간 무력하게 흔드는 릴랙스 스트레칭)를 소개해, 근육 긴장을 풀고 혈류를 원활히 하는 생활 속 움직임을 강조한다. 장시간 앉아서 일하는 현대인에게 매우 실용적인 조언이다.

스마트폰을 활용해 심박수 모니터링을 통한 자기 점검 같은 습관도 평상시 건강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 개인적으로도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얻은 통찰은 ‘혈관은 내 삶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기장과 같다’는 점이었다. 무심코 먹은 짠 음식, 잠을 줄여가며 마무리한 보고서, 짜증 섞인 야근의 연속이 결국 내 혈관 안에 고스란히 새겨져 흉터가 된다는 사실은 섬뜩했다. 반면, 오늘의 소소한 산책, 한 끼의 콩 반찬, 한숨 돌리는 명상의 순간은 아무리 작아도 혈관을 회복시키는 선물이었다.

지금 내 혈관이 몇 살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 책을 덮으며 드는 생각은, 나이를 탓하기보다 습관의 방향을 바꾸는 용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케타니 도시로의 조언처럼,오늘부터 나만의 100년 혈관을 만드는 루틴을 시작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건강한 삶의 첫걸음일 것이다.


이미 이 책을 선택하는 상황이라면 혈관에 염증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시기이다. 일단 책에서 배운 내용을 실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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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브 센스 - 소진된 일상에서 행복을 되찾는 마음 회복법
그레첸 루빈 지음, 김잔디 옮김 / 북플레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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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ve Sense 파이브 센스 : 오감으로 하루를 재해석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커피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습관처럼 아침에 출근 길에 커피전문점에서 한 잔을 건내받아, 카페인의 효과만을 기다리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그레첸 루빈 저자의  '파이브 센스'는 잠들어 있던 감각의 문을 하나씩 열어주는 열쇠 같은 느낌을 준다. 행복 연구의 대가로 알려진 저자가 어느 날 안과를 방문한 후 깨달은 것은, 우리가 얼마나 머리 속 생각에만 갇혀 살아가고 있는지였다.

시각을 잃어 앞으로 무지개 색이 넘치는 거리 풍경을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위기감은 오히려 삶을 무지개 색 가득한 아름다운 채색의 시간으로 밝혀줄 수 있다.



루빈은 의사로부터 "근시가 심해 망막박리 위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보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날 집으로 걸어가며 뉴욕 거리의 색깔과 질감, 사람들의 표정과 건물의 디테일이 생생하게 다가왔다는 그의 경험은 나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시각을 '전경 시각(foreground vision)'과 '배경 시각(background vision)'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주로 사용하는 것은 배경 시각으로, 자동적이고 습관적인 시선이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전경 시각을 사용할 때, 즉 색채와 형태, 빛과 그림자에 주의를 기울일 때 세상은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며칠 전 점심시간, 사무실 근처 작은 공원에서 벤치에 앉아 '보기 명상'을 해봤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책에 쓰여있는대로 '의식적으로' 보는 것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의 패턴, 벤치 팔걸이의 페인트가 벗겨진 모습, 멀리서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는 회사원들의 다채로운 옷 색깔. 일행과 떨어져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의 휴식이었지만, 세상에 새로운 렌즈를 끼워 넣은 듯한 청량감이 머리를 개운하게 해준다.



"소리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색맹인 채로 미술관을 걸어 다니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 인상깊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소리에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듣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책에서 등장하는 '오디오 약국' 개념이 흥미로웠다. 특정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치유용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필요할 때마다 활용한다는 것이다. 나도 따라해 보기로 했다. 노래목록을 정하려고 머리 속 음악들을 헤집을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스트리밍 서비스에는 용도에 맞는 플레이리스트들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활력 충전용', '마음 진정용', '집중력 향상용' 등으로 분류된 음악 중 취향에 맞는 목록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침묵 속에서 소리 찾기' 연습이었다. 매일 저녁 10분간 눈을 감고 귀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우리 집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많은 소리들이 들렸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위층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아, 이건 소리가 아니라 공해지만), 창밖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까지.



저자는 후각을 '기억과 감정의 문'이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냄새는 뇌의 변연계와 직접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감각보다 훨씬 강력하게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지난달, 엄마가 끓여주신 된장찌개 냄새를 맡는 순간 갑자기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초등학교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항상 맡을 수 있었던 그 따뜻한 냄새. 그때의 안정감과 포근함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냄새 하나가 30년 전 기억을 이토록 생생하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니.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무향'도 사실은 하나의 향이라는 지적이었다. 무향 세제나 로션을 사용할 때도 우리는 어떤 냄새를 맡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 집안의 '무향' 제품들을 다시 맡아보니 정말 각각 다른 미묘한 냄새가 있었다.



저자는 각각의 감각을 개별적으로 단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오감을 통합적으로 활용할 때 진정한 '감각적 삶'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따뜻한 온도를 느끼고(촉각), 원두 볶는 고소한 냄새를 깊게 들이마시며(후각),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쓴맛과 단맛의 조화를 음미한다(미각). 카페 안의 은은한 조명과 창밖 노을의 색채를 바라보고(시각), 잔잔히 흐르는 재즈 음악과 에스프레소 머신 돌아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청각).


이런 모습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평안함 속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흥분과 안심을 동시에 경험하는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순간은 정말로 현재에 온전히 있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머릿속을 맴도는 걱정과 계획들이 잠시 멈추고, 지금 이 순간 내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집에서도 오감을 활용한 하루의 마무리는 저마다 가능한 방법을 탐색해볼 가치가 있다.


오감을 깨우는 것은 단순히 삶의 질 향상뿐만 아니라 실제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감각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뇌를 자극하고, 스트레스를 줄이며, 면역력을 향상시킨다. 


또 다른 포인트는 오감이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같이 음식을 나눠 먹고, 향기를 함께 맡고, 음악을 같이 듣고, 서로의 손을 잡는 행위들이 모두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에서 의식적으로 '감각적'으로 보내려고 노력하는 시도는 누구나 충분히 해볼만 하다. 가족과 함께 요리할 때는 재료의 냄새와 촉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산책할 때는 새소리나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걷는다. 지인과 만날 때도 맛집 탐방보다는 함께 감각을 나누는 경험들을 우선시하는 음식점을 검색해보는 즐거움도 괜찮지 않을까?



오감을 깨우는 것은 단순히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그것은 현재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방법이고, 일상의 작은 기적들을 발견하는 능력이며, 나와 세상 사이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는 과정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오감을 의식하며 살아가기로 마음 먹는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경험들을 쫓아다니는 대신, 이미 내 곁에 있는 풍부한 감각적 세계를 더 깊이 탐험해보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방법이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 구절, "뇌는 하늘보다 넓다(The Brain is wider than the Sky)". 우리의 의식이 무한히 넓을 수 있다면, 그 첫걸음은 바로 우리 몸이 가진 오감을 온전히 깨우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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