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더, 경성을 누비다 - 식민지 조선이 만난 모던의 풍경
김기철 지음 / 시공사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라이더, 경성을 누비다 : 식민지 경성인이 바라온 새로운 세상과 21세기
 
 
 
구한말 어지러운 시대를 바라보는 눈은 침침하다.
돋보기 안경이라도 구해서 살펴봐야 사회상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겠다 싶다.
급변하는 시대정신을 따라잡지 못한 국가와 국민의 비참한 모습은 21세기 세계 곳곳에서도 목도되듯 과거의 영광은 간데없고 주변국들 장난에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상황에 내몰린다.
속이 울렁거리는 나라의 운명을 쑥대밭으로 만든 매국노들이 시간이 흘러 해방이 된 이후에도 단죄하지 못한 채 21세기까지 호위 호식하는 꼴을 보게 만든 우리 자신이다.
역사에 심판의 과정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반복된 배신자들에게 용기를 준 셈이다.
잘못에 대한 바로잡음 없이 시간을 질질 끈 결과물은 현재와 미래의 한국인에게는 멍에가 되고 있고 돌이킬 수 없다.
 
한가지는 확실히 해야 한다.
개화기 일본에서 물밀듯 들어온 신문물과 제도, 사회변혁은 비록 강점기의 식민지배 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한 도구였지만 한반도의 개화를 이끌었다는 긍정으로 봐야하느냐의 문제다.
일부는 어차피 조선의 개방정책은 시간문제였으므로 일본이 도와준 거 의미 없다고 무시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과오와는 별개로 발전에 도움을 준거는 인정해야 하지 않겠냐고 주장한다.
어느 쪽 말이 맞을까?
 
어차피 정답이 없는 질문이었고, 양측의 주장이 뒤섞인 사회상이었다. 판단의 기준을 어떤 방향에 주냐 보다는 일련의 개혁이 결국은 수탈과 지배를 위한 도구였을 뿐 그들의 선의를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핵심을 간파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일본 자신도 해외의 문물을 받아들여 만들어낸 그들만의 신문화를 누구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이라고 떠 벌이지 않던가?
구둣발로 국가를 유린하고 민족의 정신을 시궁창에 메다꽂은 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낼 일도 없고 앞으로 이웃나라로서 우정을 나누리라는 기대도 없다.
언제 바다 밑으로 꺼질 줄 모르는 열도의 위기는 정한론의 반복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도 않거나 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앞잡이로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며 언제든지 나라를 받칠 준비가 된 내부의 적들을 구분해내고 싹을 잘라버리는 일이다.
 


구한말 신문화에 취해 나라 잃은 슬픔조차 싸구려 코피 한 잔에 희석시킨 어리석은 무리에 포함되지 않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일본이 조선땅에 내려놓은 씨앗들은 비록 자신들의 탐욕을 실현시킬 도구였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놀라움과 선망이 뒤섞인 문화 충격 그 자체였다.
하루 세끼 챙겨 먹기 힘든 시절에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던 문물들이 한양을 중심으로 일반 대중의 앞에 펼쳐지고 있으니 감히 넘볼 수도 없던 양반 네 집 안방에 있던 값비싼 자개장을 선망하는 눈빛과는 또다른 것이었다.
 
나라가 빼앗겨 신음하고 있을 때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써 내려간 문인들은 일반인들에게는 이질적인 존재였으리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흔적 없이 사라져가는 국가의 혼을 글로 표현하고 싶지만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는 없다.
일부는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변절하여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된 이들도 있으니 조선의 부활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믿어버린 그들의 미래 투영을 탓할 수도 없다.
원래 그런 자들이었을 뿐이니.
서구문물의 화려한 물품 지상주의 속에서도 문학을 위시한 사회과학의 유입은 일본은 물론 우리에게도 멋진 일이었다.
상상도 못했던 기술의 발전은 사회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낳을 수 있었고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정작 국민들은 신음하고 있던 동경의 지식인들이 느낀 현실도피 또는 비판은 나라를 빼앗긴 경성의 지식인이 느낀 비애 와도 맞닿아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은 매니아들만 읽는 어렵고 딱딱한 고전물들이 전집 형태로 중산층 이상 집에 필수로 진열되는 광경은 앞으로도 회복되지 않을 과거의 유산이다.
사전 예약이 일상의 고전도서의 판매량을 훌쩍 넘는 기록을 보유하게 되는 상황은 아마 2020년대 대한민국 문화산업을 결정지은 OTT의 인기에 버금가지 않을까? 책 속에 등장하던 저자들도 당시 문학전집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의 필력을 키워왔다고 하니 그나마 긍정의 공란에 써넣을 수 있는 변화다.
 


모던보이들의 바쁜 일상 생활이 냉면 배달로 상징되는 서두의 테마는 신선했다.
우리가 누굽니까? 바로 배달의 민족! 이라는 기발한 광고 카피가 연상된다.
중국집과 피자집말고는 딱히 10여년 전 배달음식이 떠오르지 않는데 1930년대 경성에서는 이미 제각각 맛을 뽐내는 메뉴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다만 이런 시스템이 가능했던 당시의 어두운 단면도 우리는 엿볼 수 있다.
최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제대로 치루지 않으니 식당에 가서 먹으나 시켜 먹으나 별반 금액 부담이 적었기에 가능했다.
홀에서 먹으나 배달하나 짜장면은 4천원이던 불과 몇 년 전의 모습이 당시에도 통용되었다.
너무 낮은 급여로 데모를 할 정도니 인건비가 바닥이던 어려운 시절에 서민들의 삶은 고달프기만 했다.
선진국의 척도는 인건비 수준이라는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사례가 아닐까?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즐기는 꽤 근사한 런치세트의 작은 사치, 몰래 밀입국하는데 성공하였지만 미국의 거대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던 김동성의 도전과 가능하게 했던 경제적 여유.
백년이 훌쩍 넘는 시간의 간격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기상천외한 행동과 상황도 나타났었지만, 사람의 삶이라는 게 큰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라를 잃고 가난에 입에 풀칠조차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부의 불균형은 지금보다 차이가 컸던 시대, 새로운 문물은 여유 있는 부자들에게는 신세계와 같았을 것이다.
삶의 풍요로움은 결국 경제의 자유에서 시작되고 부의 축적이 왜곡된 정치경제의 산물로 나타났다면 사회의 변혁은 촉발된다.
다만 타의에 의해 선진화 과정을 겪게 되면 단계를 밟아 이룩한 서방국가들의 부의 품격같은건 실종된다는 증거를 100년 경성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는 씁쓸함을 버릴  수 없다.
 
읽고 또 읽고 새로운 소설책을 찾아 지적 호기심을 반짝이던 박완서 소설가의 소녀시대가 하나의 시대상이었던 그때가 흥미롭다.
보기 어려운 그 시절의 신문기사와 삽화, 사진 자료들은 의외로 역사 매니아도 접하기 힘든 강점기의 일상을 엿보는데 큰 도움이 된다.
 
시대의 변화와 변혁을 책 한 권에서 느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