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쓸수록 작아진다
조안나 지음 / 지금이책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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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기다리는 일은 늘 설렌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읽는 시간이 너무도 좋았다!)


블로그도 이웃하여 종종 작가의 소식과 집필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대체 이번엔 어떤 이야기와 문장을 보게 될까 궁금해진다.

이번 조안나 작가의 '슬픔은 쓸수록 작아진다'는 결혼 후 본격 육아에 들어선 여성이자 엄마가 어떻게 글을 읽고 쓰는 시간을 힘들게 만들었고 생산적인 글쓰기를 이어갔는지에 관한 에세이다.

글이란 건 참 어렵다. 이렇게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도 어떤 말을 어떻게 잘 해야 할지 두렵고 막막하기만 한데 도대체 엄마의 역할을 놓지 않고 글을 쓴다는걸까.

단순히 내 감상만 늘어놓지 않고 이 책의 분위기흘 정확하게 다른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지만 글이란 그렇게 쉽지 않다.

하지만 또 쓰다 보면 어떻게든 쓸 만해지는 게 글이다.

정말 글을 쓰고 싶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글의 영감을 받고 싶은 사람은 조안나 작가가 전하는 이 쓰기의 힌트를 하나씩 적용해 보면 꽤 도움이 된다. 글이란 건 거창한 게 아니고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있는 생활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아무 페이지를 펼쳐 그녀가 전하는 생활 글쓰기 팁을 꼭 따라 해 보시길 바란다.

"스무 살 이후로 책과 관련된 일을 계속하며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니 나의 성실성과 즐거움은 모두 글쓰기와 맞닿아 있다."

이런 믿음을 주는 작가라면 우리의 무서운 글쓰기가 훨씬 친해지지 않겠는가.


-

일단 의자에 앉는다.

"매일같이 블로그에 열심히 남겼던 글들이 인연이 되어 쉬지 않고 글을 쓰고 원고료를 받게 했다. 이 모든 것은 책상에 앉는 일부터 시작된다.

책의 첫 챕터다. 역시 글쓰기는 앉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나처럼 누워서 TV를 보다가 엄청난 영감이 찾아와도 의자에 앉지 않고 생각만 하면(곧 까먹어) 문장으로 남겨질 수 없다. 그래 일단 앉자. 그러고 나서 생각하자.

지금도 겨우겨우 부엌 아일랜드 끝에 얌전히 앉아 이렇게 한쪽엔 책을 펴 놓고 노래를 틀어 글을 쓴다.

'슬픔은 쓸수록 작아진다'를 읽다 보면 글이 갖는 진정성은 삶을 버티게 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정해놓은 시간에 글을 쓰면, 일주일 동안 제대로 일기도 쓰지 못하고 내 마음도 돌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달랠 수 있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남았다는걸, 외로울 때나 슬플 때나 곁에 있어 주는 건 내가 지켜낸 글들을 위한 시간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처음 글의 치유력을 믿게 된 건 종이에 친구의 험담을 적으면서부터다. 우리는 단짝이었고 PPT 발표를 위해 팀플을 할 때였는데 말로 하지 못한 섭섭함을 어느 새벽, 노트에 가득 적었다. 마음으로만 삭히지 않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내 감정을 다 드러냈을 때의 그 기분은 나와 친구, 모두를 보호했다. 그 뒤로 상사의 이상한 찌질함, 부당하다고 느낀 점들을 블로그에 비공개로 적기 시작했고, 남자친구와 이별 후 엉망진창이던 마음을 그대로 글로 쏟아붓는 시간을 보내면서 감정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었다. 모두 글을 써서 가능했던 일이다. 그래서 "쓰다 보면 확실해지는 것들이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말한 작가의 말을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빈 여백에 뚝딱 어떤 글을 채워 넣는 일은 꽤 어렵다. 불평불만도 하루 이틀이지 좀 더 다른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면 작가가 책에서 권하는 몇몇 챕터를 이용해 봐도 좋겠다.

1. 다른 렌즈로 보기

2. 풍경에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3. 유별난 나를 적어보다.

4. 한없이 시시한 이야기를 써라.

-

"아끼는 책의 끝이 다가올수록 안타까워서 까맣게 밤을 지새웠던 밤들이 생각난다. 모든 책은 작가가 쓴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독자들의 개별적인 삶으로 들어가 새롭게 태어난다.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몇 가지의 것들은 의식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침과 저녁, 출퇴근길을 이 책과 함께 하는 동안 글이 너무 쓰고 싶어졌다. 작가가 소개하는 글쓰기를 자극했던 다른 책들을 적어 놓고 인상 깊었던 구절을 메모하는 날들이었다. 이는 지겹고 권태롭던 회사 생활을 버티게 해주었고, 잠시 마음을 놓았던 브런치의 새로운 글 소재도 몇 개 남겨 놓는 성과(?)를 이루게 했다. 이것만으로 충분한 기운을 얻었던 일주일.

"모든 것은 인내력과 지구력에 달려 있다. 일이든 인간관계든 꾸준하지 않으면 내 곁에 오래 붙들어둘 수 없다."

이젠 나의 행동만이 남았다. 순간적으로 흘러가는 날것의 기분과 감정을 메모장으로 옮기고 그 단서를 발판 삼아 하나씩 꼬리를 물며 한 문장, 두 문장을 연결해 간다. 누군가 함께 읽고 공감해 준다면 더없는 행복이겠지만 아무도 봐주지 않고 나만 알고 있는 글이어도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나의 에너지가 된다. 그러니 가급적 오래오래 글을 쓰며 살고 싶다.

많은 독자가 '자신만의 글로 이어지도록 여러 팁들도 꼭지마다 선물처럼 남겨 둔' 작가의 성실성을 믿고 슬픔은 쓸수록 작아지는 경험을 해보시길 바란다. 쓰다 보면 쓸쓸한 하루도 쓸 만해진 다는 카피가 와닿는다.

쓸쓸함, 외로움, 행복에 겨움 등 모든 감정을 글로 남겨보길.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아기가 있든 없든, 바삐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에게 어렵게 주어지는 자기만의 시간을 글로 채운다면 일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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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빗 - 내 안의 충동을 이겨내는 습관 설계의 법칙
웬디 우드 지음, 김윤재 옮김 / 다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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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새해 별미는 ‘계획 세우기’다. 내게 운동과 영어 공부는 매년 빠지지 않는 목표지만 단 한 번도 이룬 적 없는 오아시스처럼 스르륵 사라지는 다짐들.



12월과 1월에 아주 잘 어울리는 책 ‘해빗’은 <내 안의 충동을 이겨내는 습관 설계의 법칙>을 부제로 달았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를 나의 ‘의지’가 아닌 비의식적 행동 ‘습관’으로 달성하는 방법을 여러 실험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뭔가를 하고자 할 때 노력하려 애쓰고 행동한다. 그러나 늘 머리 속으로 할까, 말까를 계산하며 결국 나의 이기적인 합리화가 승리하여 중단되는 경우가 많아 작심삼일이 된다.




의지만으로는 지속할 수 없다




P45


나는 곧 ‘시작’보다 ‘지속’이 더 특별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의식적 자아는 시작은 가능케 할 수 있어도 지속하기는 어렵다.

고민- 결정- 다짐- 고통- 갈등- 후회를 동반해서 우리의 끝을 보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무의식적으로 하는 ‘습관’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 가고 씻고 화장하고 옷을 입는 행위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몸이 저절로 움직여 만들어진 나의 아침 습관이다. 이렇다할 고민 없이 착착 이뤄진 이 루틴은 아침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게 효율적으로 만든다. 아주 잠시 갈등의 요소가 있다면 옷 고르기 정도일까? 그 외에는 마치 로보트 처럼 척척 수행되어 시계를 보지 않고도 매일 비슷한 시간에 현관문을 나선다.



저자 웬디 우드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여러 연구를 통해 보여준다.



나를 중심으로 상황을 재배열 하라.



P151


더 건강해지겠다고, 더 부자가 되겠다고, 더 똑똑해지겠다고 마음을 잡는데 실패했다면 스스로를 자책하는 대신 부엌을 정리하라. 과일 바구니를 눈에 더 잘 띄는 곳에 둬라.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가장 영향을 받는 곳은 바로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다. 아무리 나 혼자 금연을 외쳐도 주위 사람들이 다 편하게 흡연을 하고 있으면 결심이 무너지는데 1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가 나서서 음식점과 길거리에서 흡연시 과태료를 부과하기 시작하면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점점 상황에 맞춰 금연이 가능해진다.



웬디우드의 또 하나 연구에 따르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자신만 아는 문제를 낸다. 문제를 맞히는 사람은 못 푸는 게 당연한데도 상대방을 더 똑똑하다고 느꼈다. 불리한 상황이 분명했지만 그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저자는 이 연구를 두고 “우리는 상황에 따라 행동하도 스스로를 평가하면서도 주변 상황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타인이 내게 끼치는 영향은 90% 이상이다.



P157


언제나 유리한 상황에 자신을 놓아두는 법을 터득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삶은 더 나은 방향으로 저절로 흘러갈 것이다.



p169


당신이 이 책을 읽고 단 하나의 개념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그 단어가 '마찰력'이 되길 바란다. 단순하고 직관적이면서도 잘만 활용하면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재배열하고 적절한 곳에 마찰력을 배치하기



운동을 시작하고 싶다면 거리를 핑계로 포기할 곳이 아닌 헬스장을 일단 등록하거나 집 앞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기. (마찰 제거 - 거리 마찰)


돈을 모으고 싶다면 밤마다 스마트 폰으로 쇼핑하지 않도록 쇼핑 앱을 지우거나 자동 저장 장치 해지하기 (마찰 추가 - 행동 마찰)



나는 개인적으로는 식사 방법과 운동 환경에 변화를 주었다. 퇴근하자마자 tv를 켜지 않고 곧바로 부엌에 들어가 밥을 차린 뒤 라디오 어플을 켜거나 아무 소리도 없이 밥을 먹기 시작하면 저녁 시간이 한결 많아진다. 책도 읽고 정리도 하고 글도 쓰는 시간이 확보되는 것이다. 또한 운동도 마찬가지. 퇴근하기 전부터 오늘 갈까 말까 고민하지 않고 퇴근 후 바로 옷을 갈아 입고 저녁을 먹으면 헬스장으로 가는 발걸음이 단호해진다. 처음에는 갈팡질팡하던 내 마음도 어느 새 한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상황을 세팅하고 내 손으로 마찰력을 만들어야 한다. (귀찮으면 나쁜 습관도 안하게 되겠지..)



p275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습관은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인생을 구원하는 습관도, 파멸시키는 습관도 모두 우리의 선택에서 비롯한다. 평소 좋은 태도를 유지하고 몸에 각인시킨 사람이면 급박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올바른 행동을 반복할 수 있다. 결국에는 우리를 목적지까지 인도한다. 좋은 습관은 늘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복잡다단한 일상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노오오오오력을 하면 달라질 줄 알았다. 영어도 유창하게, 운동도 매일 매일, 업무도 거의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내 의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그걸 우쭈쭈 다독이며 오랫동안 함께 걸어가기엔 너무 힘이 부친다. 이럴 때 우리는 '좋은 습관'에 기대어 일일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몸과 마음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놔둘 수 있다. 물론 그 안에서 약간의 상황 배치와 물리적 마찰을 심어 놓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한번 세팅만 잘 해 놓으면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덜고 작은 성취감을 차례 차례 쌓을 수 있다.



p16


내가 지난 수년간 만나 '충동에 휘둘리지 않고 일상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결코 스스로의 의지력과 끈기를 과신하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4회 이상 달리는 사람 중 93%는 날마다 운동하는 장소와 시간, 즉 '상황'에만 집중했다.


일주일에 3회 이상 주기적으로 달리기를 습관화 시킨 그룹은 '운동장' '공원' 등 달리는 장소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한 번도 달리기를 하지 않은 그룹은 '체중 감량' '마라톤 참가' 등의 본인이 설정한 목표에만 매달렸다.



p126


그들은 목표를 달성하려고 굳이 입술을 꽉 깨물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행동을 반복한다. 그들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고, 한번 시작하면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날마다 작은 성공을 쟁취한다. 그들은 투쟁하지 않는다.



p195


상황과 마찰은 습관이 형성되는 길을 닦고, 신호는 엔진에 시동을 건다. 그리고 보상은 습관이라는 전차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연료를 공급한다. 최초의 노력에 대한 사소한 보상조차 없다면 우리의 습관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습관이 한번 형성되기 시작하면 그 이후로는 목표와 보상이 필요없을 정도로 스스로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일과 목표에 대해 '성실하게' '버티고' '노력을 해야만' 원하는 결과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는다. 매일 조깅하는 사람도, 하나의 일을 수십년 째 반복하고 있는 사람 모두 '열심히 하기 때문'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정작 그들은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습관처럼 그 일을 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미니멀라이프 현상도 이와 맥락이 닿아 있지 않을까?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해보려 하지만 자꾸만 좌절하는 현실 속에서 넘치는 것을 덜어내고 단순하고 심플하게 행동하고 있는 태도. 이런 마음을 위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는 '습관'이 마침 우리에게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습관은 고약하다. 밥 먹고 바로 눕기 등의 나쁜 습관은 몸에 잘도 익는데 일주일 3일 이상 운동하기 같은 좋은 습관은 처음부터 어렵다. 양면의 얼굴로 우리 삶에 깊숙이 파고 든 무의식의 행동이 삶의 최전방에서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부디 올해는 글을 쓰기 위해 의자에 앉는 엉덩이부터 습관을 들여 보려고 한다. 적절한 상황 배치와 마찰력, 보상을 이용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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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의 인문학 - 천천히 걸으며 떠나는 유럽 예술 기행
문갑식 지음, 이서현 사진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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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의 인문학

천천히 걸으며 떠나는 유럽 예술 기행


읽는 내내 대학 교양 강의를 듣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지겨웠단 얘기는 아니고 ^^

그만큼 지식과 흥미를 모두 이끈 재밌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소감이다.


산책자의 인문학 작가는 여행을 떠나기 전 버릇이 여행하는 곳과 관련된 예술가와 작품을 찾아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배경지식과 흥미점이 있으면 여행하는 내내 훨씬 넓고 깊은 공감과 영감이 곁에 있다고.


다른 곳도 아니고 유럽이라면 고개가 단연 끄덕일만하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던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으니까.


이 책에는 다양한 예술가의 몰랐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동안 처음 들었던 화가나 작품들도 있어서 더욱 재밌게 읽혔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놔두고 보티첼리와 메디치가의 인연을 다룬 서사도 퍽 흥미롭고, 의의로 한 여자와 정신적 사랑을 교감했던 빈의 카사노바 클림트의 과거도 매력적이다.


역사 배경이 톡톡히 조미료 역할을 하니 사실과 판타지가 더해진 느낌이지만 어느 이야기가 그렇듯 이런 요소가 없다면 사람들에게 널리 익힐 수 없을 것이므로 이 책 한 권이면 르네상스 예술가 입문 정도는 충분히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읽는 내내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에게 영향을 주는 걸 보면서 인간의 삶을 중시했던 르네상스 시대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p27

보티첼리가 위대한 화가로 칭송받는 이유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선 처리에 있다. 그는 춤 동작이나 물결치듯 흔들리는 옷감에서 나타나는 우아한 곡선을 매우 사랑했다. 그것은 마치 생동하는 우리 삶의 은유와 같았기 때문이다.


-p28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은 보티첼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몸에 밴 세련된 매너, 학문적 깊이에 바탕을 둔 조리 있는 말투가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리고 보티첼리는 그러한 시대정신에 깊게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내가 그동안 관심 없었던 예술가의 이야기에 흠뻑 빠질 정도면 고흐, 생텍쥐페리, 랭보, 카사노바의 이야기는 읽으나 마나 매우 흥미롭겠지만 그보다 더 재밌는 건 유럽 도시마다 그들의 서사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점이다. 골목과 골목 사이, 숨겨진 동네,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마저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 그 자체인 동시에 너무나 사랑해서 작품에 남길 수밖에 없었던 곳들.


다시 한번 유럽 엘 갈 수 있을까 아쉬울 정도로 만약 다음에 정말 가게 된다면 이 책을 다시 한번 정독해야겠다 생각했다. 산책하는 길처럼 나도 어슬렁 걸어 다니면서 모든 순간의 공기를 흠뻑 마시고 오고 싶다.


- p89

아를에 머물던 시기, 고흐는 예술가로서는 꽃을 피우지만 동시에 정신병도 얻게 된다. (중략)

바로 프랑스의 태양빛이다. 너무나도 매섭고 찬란한 그 빛이, 남보다 훨씬 예민한 감각을 지닌 예술가의 모든 세포를 일깨웠고, 결국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든 게 아닐까.


페스트 열병으로 유럽 인구의 1/4이 죽고 그러한 환경에서 삶의 태도가 바뀔 찰나 종교의 타락과 개혁이 일어나며 르네상스 시대는 차차 불꽃을 피우게 된다. 신에 대한 믿음이 꺼지며 사람 자체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펼쳐지는 시대. 예술가가 보는 사람 그 자체의 열망과 모순을 그들의 그림, 시, 글, 음악 등 여러 방면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오늘날 우리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훌륭한 생각거리가 되어 준다. 


- p 145

시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이가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완전히 자기 자신을! 그는 자기 영혼을 찾아야 하며, 그 영혼을 면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시험하고 음미하면서 그 영혼을 겪어야만 합니다.

아르튀르 랭보, 견자의 편지


동성과의 떠들썩한 스캔들로 화려한 연애와 이별을 감당했지만 모든 감각을 시로 남긴 랭보. 어떻게 보면 클래식한 먼 옛날의 일이라고 넘길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가 닿는 걸 보니 분명 예술은 예술인 것 같다.


아는 게 힘이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다양한 것에 더 깊은 영감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의미로 산책자의 인문학은 유럽 여행을 앞두거나 유럽을 갈 수 없어 머릿속에서라도 떠나고 싶은 이들에게 아주 훌륭한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p296

보티첼리와 단테의 피렌체, 클림트의 빈, 랭보의 샤를빌 메지에르, 고흐의 생 레미 드 프로방스 등 곳곳에 남아 있는 예술가들의 삶의 흔적을 마주한 뒤에야, 예술이 삶의 연장선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삶은 곧 예술이다. 그걸 발견해 낼 수 있는 안목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뿐.

산책자의 인문학은 우리에게 안목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역사 배경과 어우러진 예술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언제든 다시 책을 펼쳐 들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공감할 수 있다면. 다음 여행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내 인생에도 르네상스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났다."

15인의 예술가에게 배우는 나를 발견하고 사랑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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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 키린 - 그녀가 남긴 120가지 말 키키 키린의 말과 편지
키키 키린 지음, 현선 옮김 / 항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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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기억력이 좋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는데 '키키 키린, 그녀가 남긴 120가지의 말'에선 분명했다.

밑줄 긋고 싶지만 전체 페이지를 닳게 할까 선뜻하지 못하겠는 마음. 귀한 음식을 꼭꼭 씹어 천천히 음미하듯 문장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마음 말이다.

사실 키키 키린의 방송, 광고 등의 출연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관심 있는 몇몇 일본 영화에서 자연스러운 연기가 돋보인 배우였고, 눈동자에서 보인 알 수 없는 어떤 분위기에 반한 배우 정도랄까? 그래서 처음에 이 분의 책이 나온다고 했을 땐 유명한 배우여서 책도 쓰시는구나 싶어 별 관심이 없다가 포털 사이트에서 소개된 몇 문장에 반해 그녀가 남긴 120가지의 말을 다 들어 보고 싶었다.

로큰롤에 심취한 남편과 45년 결혼 생활 중 43년을 별거하면서 깨달은 부부에 대한 이야기, 인생과 행복에 대한 솔직한 감정, 일과 책임에 대한 소신, 암 투병 시 깨달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까지, 길지 않은 짧은 물음과 대답 속에 그녀의 생활 철학이 드러난다. 거창하고 화려하지 않은 문맥 속에서 잘근잘근 본인이 직접 머리와 몸으로 깨우친 담담한 이야기가 지금의 청년들에게 꼭 필요한 이유다.

키키 키린, 그녀가 남긴 120가지의 말이라고 하면 얼마나 말이 많을까 싶지만 막상 책을 펼치면 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에서 남긴 짧은 메모 형식의 말을 엄선한 것이기 때문에 알맹이 중의 알맹이만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루에 다 읽기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여서 괜찮다면 하루에 몇 가지의 문장을 읽고 나머지는 본인의 상황에 빗대어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내 생각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그게 '의존증'이라는 겁니다. 스스로 생각하세요" (책 구절 中)

제일 좋은 건 매일의 뽑기 운세처럼 지치고 힘든 하루를 지켜줄 든든한 문장을 뽑는 것처럼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는 것이다. 마치 포춘 쿠키의 말처럼 어떤 말이든 내 상황에 적절히 녹아들지도 모른다.

그녀가 남긴 120가지의 말에서 키키 키린은 굉장히 불안하고 자유분방한 젊은 시절을 보낸 뒤 점점 나이를 먹어가며 차분하고 담담한 태도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막연하게 올곧기만 한 도덕 선생님 같은 그저 그런 말이 아니라 놀 것 다 놀아 보고 실컷 방황하면서 깨우친 사람의 알찬 말이다. 우리에게 더 가깝고 깊게 들리는 이유다.

[에세이] 키키 키린, 그녀가 남긴 120가지의 말 中

- 사람이 뭔가를 품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 그것보다 더 가지려고 해도 가질 수 없어요.

- 실패하면, 실패한 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요. 지금도 봐요. 여기 옷이 해졌잖아요. 그럼 헤진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 딱히 대단한 아이디어도 아니에요. 내가 가진 걸로 어떻게든 해나가는 거죠.

- 가능한 한 나를 일상적인 상황에 두려고 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지 않으면 삶 속에서 성장하기 어렵고, 당연히 생활 감각도 잘 모르게 됩니다.

- 인생이 모두 필연이듯 내 암도 분명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성숙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늙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려고 해요. 자식, 손자들한테도 해요. 그러면 죽음이 무섭지 않게 됩니다. 또 사람을 귀히 여기게 되죠.

정말 이것 외에도 좋은 문장이 너무 많지만 다 옮겨 적을 수 없고, 또 종이 위 글자를 조용히 읽으며 느끼는 바가 더 크기 때문에 다들 직접 읽어 보시라 필사를 멈춘다.

한때는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혼란된 자아를 주체하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영혼이 복잡한 남편을 만나 그 사람을 무게 추처럼 여기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를 잘 중심 잡으며 살았다는 키키 키린.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왕이면 삶을 즐겁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했던 그녀의 노력과 태도가 확연히 보이는 대목이다. 살아가는 삶 속에서 성숙해가며 마지막을 향해 걸어갔던 그녀의 발걸음이 당당한 이유도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했던 의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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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의 심리학 - 비로소 알게 되는 인생의 기쁨
가야마 리카 지음, 조찬희 옮김 / 수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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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의 심리학. 이런 책 종류는 서점에 가면 참 많다. 꼼꼼하게 읽지 않아도 어떤 분위기에 무슨 내용이 있을지 짐작되지만 그래도 끌리는 이유는 내가 서른 중반인 때문일까. 언제부터인지 나이를 잘 먹고 싶단 생각을 한다.

 

이왕이면 곱고 차분하게 늙고 싶은데 그럴려면 경제적 기반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주위에 마음 터 놓을 친구도 있어야 할 것 같고, 건강도 잘 관리해서 내 고관절로 이곳저곳 돌아 다니고 싶다. 일단 건강하게 나이를 먹으려면 신체 관리도 중요하지만 마음, 내가 늙어감을 인정하는 태도도 중요하다.

 

나이 듦의 심리학에서는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가야마 리카가 환자들을 치료한 사례를 적으면서 다양한 주제로 자신의 생각을 펼친다. 목차를 보면 그 주제가 꽤나 다양한데 신선한 것도 있다.

 

이를테면 [성희롱에 정년은 없다] [혼자서 살아간다] [부모 돌보는데에 너무 몰두하지 마라] 가 내가 곱씹으며 좀 더 집중하게 된 이야기다. 나 또한 중년의 성을 간과했다. 아줌마라서  멋진 연하남이 슬쩍 어깨동무를 해도 좋아한다? 아줌마한테 해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왜 화를 내?

 

은근히 이런 풍토가 깔려 있는 제3의 성이라고 불리는 아줌마. 중년 여성. 정말로 중년의 성은 희롱으로부터 아무렇지 않을까?나부터 반성을 해야 할 것 같다. 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유로우면서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기에 이건 아니다 싶으면 중년도 당당히 소리쳐야 한다. "내 몸을 건들지 마시오!"

 

비혼인 작가는 아이 없는 삶에 대한 이러쿵 저러쿵 간섭을 꽤나 받아 왔다. 무려 40대까지도 충분히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니 말 다했지.. 50대가 되서야 비로소 그 질문에 자유로워졌고 스스로 조급했던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한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와 일본은 정서가 비슷해 아이에 대한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을거다. 결혼은 했냐, 아이는 없냐, 왜 안 낳냐, 그래도 하나는 있어야지, 아직 늦지 않았다....

 

사회 문제로도 대두되는 임신과 출산은 그래도 엄연히 사적 영역이다. 부부가 함께 결정할 일이지 사회에서, 주변에서 들들 볶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적어도 아이 키우기 좋은 나라만 되면이야 더할나위 없겠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100쌍의 부부가 모두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님이 사실이다. 작가는 이 점을 꽤 진지하게 다루지만 역시 시간이 해결임을 말한다.

 

주위에서 물어 보면 아주 타당하게 맞받아 치고 싶지만 그럴수록 옆 사람은 더 측은하게 바라볼뿐. 인생은 흑백으로 나뉘는게 아니라서 아이 있는 삶도 나름 행복하고 없는 삶도 충분하다. 그러니 비혼으로 늙어 간다면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하는게 제일 현명하다고 조언한다. 요양원을 알아 본다든가, 지역 사회 커뮤니티를 찾아보는 등 우리가 50~60대가 되면 예전과 다른 미혼/비혼 공동체가 분명히 만들어질 것이니 적절하게 활용하면 된다. 또한 나의 장례식이나 무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처리해 놓는다면 더욱 좋겠지.

 

100세 시대가 어색하지 않을만큼 70세 자식이 구순의 노인을 수발하는 일이 흔하다. 자연스러운 세대 교체가 더뎌지기 때문인데 이때 거리 두기가 실로 중요하다고 전한다. 일단 내가 건강하고 마음이 편해야 부모님을 잘 간병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특히 치매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면 정신적 부담을 해소할 무언가가 더 필요함을 인지한다. 

 

너무 혼자서 감당하려 하지 말고 시스템, 커뮤니티를 적극 활용하고 본인이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 말자. 어느 부모님이든 자신 때문에 자식이 힘든건 원치 않으실테니까.

 

실로 현실적인 책이었다. 실제 사례 상담이 내 고민과 다를 바가 없기도 하고, 그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도 완벽하기 보단 인간적이어서 좋았다. 작가는 56세가 되고 나서 마음뿐 아니라 몸도 고칠 수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 종합진료과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데 물러서지 않고 용기를 냈더니 젊었을 때와는 또 다른 설렘과 기쁨이 있다고 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서 노년으로 가는 기차 속도도 똑같을거다. 유한한 시간을 직면하고 내게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해내다 보면 그 안의 희노애락을 모두 사랑할 수 있겠지. 마음이 점점 더 너그러워지고 여유있는 중년과 노년을 보낼 수 있기를..!

 

나이 듦의 심리학 밑줄 친 문장-

 

· 정년 후에 어떤 일이 생기든 와르르 무너지지 않도록 '나는 나'라며 본인 스스로를 꽉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성희롱에 정년은 없다.

 

· 막연히 상상했던 내 인생과 너무 달라서 가끔 이렇게 살아도 될까 싶은 생각이 들고 이렇게 50대가 되는 건가 싶어서 초조해졌다. 그런데 쉰 살이 된 순간,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마음이 가뿐해졌다. 지금의 이 상쾌한 느낌이 계속 됐으면 좋겠다.

 

· 나이가 들어도 지금같은 호사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너무 외롭지 않은 곳에 살면서 아주 가끔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 그저 그게 원하는 전부다.

 

·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신의 몸 상태에 연연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음식,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관심을 둬야 하지 않을까.

 

· 어떻게든 본인의 숨통을 틔우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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