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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인생을 바꾸는 게 아니라 행동이 인생을 바꾼다 - 과거에 갇힌 삶을 다시 흐르게 하는 12가지 마음 훈련법
카레나 킬코인 지음, 문가람 옮김 / 서스테인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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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나는 흔히 베스트셀러 가판대에 있을 법한 자기계발서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저자인 카레나 킬코인의 아버지가 차량 계기판 조작 혐의로 경찰에 끌려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도입부터 심상치 않더니, 그녀의 암울한 과거사가 하나둘 밝혀질 즈음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더 잘 살기 위한 자기계발의 서사가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하는 자기 구원의 서사였음을.

<생각이 인생을 바꾸는 게 아니라 행동이 인생을 바꾼다>는 반평생 지옥 같은 트라우마를 견뎌온 카레나 킬코인의 처절한 분투기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자신의 삶을 마주하고, 엉켜버린 삶을 이해하며, 마침내 새로운 삶을 써 내려간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히 독자들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교조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길을 택한다.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서사로 이해한다. 때로는 그 서사가 멋지고 근사한 삶이 되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 깊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실패와 좌절, 무엇보다 수치의 기억으로 굳어지기 쉽다. 사실 나는 유년 시절 저자처럼 삶을 옥죄는 깊은 트라우마를 겪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을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도 무언가를 실패한 경험,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경험,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은 경험, 다수에게서 배제되어 끝내 수치심을 느꼈던 경험들이 있다. 나는 그런 기억들을 오래도록 수면 아래 봉인해 두는 편이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었지만 그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상황을 마주하면 어김없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저자처럼 큰 트라우마는 없다'고 말하던 나조차, 돌이켜보면 작은 상처 하나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셈이다.

이 책은 차마 꺼내놓기 어려웠던 두려움과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예전의 나처럼 모든 것을 덮어두고 손쉬운 해결책만을 바라는 독자라면 이 지난한 과정이 마뜩잖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벌거벗고 손을 내미는 저자의 용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열리고 조금씩 행동해 보고 싶다는 의지가 샘솟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과거는 당신을 정의하지 않는다. 당신이 당신을 정의한다."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문장이다. 결국 저자가 전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의 삶을 스스로 써 내려가라'는 것이 아닐까. 나는 과연 내 자신을 스스로 정의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서 오늘도 한 줄씩 써 내려가고 있는가. 저자의 따뜻하지만 단단한 조언을 듣고 있자니 왠지 해낼 수 있으리라는 용기가 생긴다. 그리고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국 내 삶을 바꾸는 것은 오늘의 작은 행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믿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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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할머니의 벚나무 1000그루
타다 노부코 지음, 우민정 옮김 / 사파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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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은 흔히 스피노자가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나는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 문장을 좋아한다.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려는 사람의 작지만 단단한 의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마 벚나무를 천 그루나 심은 여든여섯 살 춘자 할머니의 마음도 바로 그러하지 않았을까. <산골 할머니의 벚나무 1000그루>의 주인공인 춘자 할머니가 사는 산골 마을은 여느 인구 소멸 지역처럼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해 급기야 할머니 열 명만이 남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다시 마을로 불러들일 수 있을까 고민하던 할머니들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 앞에서 막막해한다.

그때 춘자 할머니가 던진 한마디는 "우리 좀 더 멀리 생각해봐요."였다. 춘자 할머니와 마을 언니들은 도시 사람들이 산골 마을에서 사계절 내내 무엇을 하고 싶어 할지를 떠올리며 벚나무 묘목을 하나씩 심기 시작한다. 벚나무를 심는 동안 할머니들은 하나둘 하늘나라로 떠나지만, 그들의 과업은 멈추지 않는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들의 묘목 심기는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보지 못할 미래를 기꺼이 믿고 오늘의 한 그루를 심는 일이야말로 가장 단단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머니들이 가꾼 벚꽃이 만개한 마을을 보았을 때 나는 작은 희열을 느꼈다. 작가 타다 노부코의 그림은 투박하지만 정겨운 할머니의 손길을 닮아 있다. 실제로 작가의 사진을 보니 마치 그림책 속에서 막 걸어 나온 사람처럼 정감이 갔다. 한 사람의 소망이 시간 속에서 천천히 현실이 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에도 작은 벚나무 한 그루가 심어진 듯한 따뜻함이 남는 이야기였다.


* 이 책은 출판사 사파리의 독서모임 지원으로 제공받았으며 직접 책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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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 <군주론> 읽어 본 사람이다! 독서 모임의 최대 장점이라고 한다면 평소라면 내 의지로 읽지 않았을 책을 읽게 된다는 사실이 아니겠는가. 조직 내 권력이나 정치 같은 것에 정말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는 내게 <군주론>은 딱 그런 책이었다.

마키아벨리 사후에 출간된 것으로 잘 알려진 <군주론>처럼 극과 극의 평가로 나뉘는 책도 많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정치에 대한 통찰로 가득한 ‘인생책’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권모술수만으로 가득한 ‘악마의 책’처럼 여겨지니까.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개인적인 호불호와는 별개로 양쪽의 평가 모두 어느 정도는 수긍하게 된다.

우선 이 책, 제목이 주는 중압감에 비해 굉장히 술술 읽힌다. 군.주.론. 뭔가 무겁고 재미없어 보이지 않나? 그런데 막상 읽어 보면 의외로 속도감이 있다. 아무래도 <군주론>이 15세기 이탈리아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고대 로마부터 중세까지의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자신의 주장 근거로 끌어오기 때문에 처음엔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명분이나 과정보다 실리와 결과를 중시하는 마키아벨리의 성향답게 필요한 이야기만 군더더기 없이 끌고 와 의외로 읽는 맛이 있다.

무엇보다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굉장히 명확하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마치 자기계발서처럼 직설적인 화법이 이어지는데, 이는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마키아벨리는 원래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으로 일했지만 메디치 가문이 권력을 되찾으면서 실각했고 결국 고문과 추방까지 당하게 된다. 시골로 쫓겨나 사실상 실업자 신세가 된 그가 다시 메디치 가문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자 쓴 책이 바로 <군주론>이다. 이를테면 이 책은 그의 취업 포트폴리오인 셈이다. 그렇다 보니 책의 메시지도 자연스럽게 간결하고 선명해진다.


내가 <군주론>에서 가장 흥미롭게 느낀 지점은 정치와 윤리의 분리에 있다. 흔히 우리는 정치와 윤리는 분리될 수 없으며, ‘정치 없는 윤리’는 무력하고 ‘윤리 없는 정치’는 가혹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어쩌면 그 ‘윤리 없는 정치’를 끝까지 밀어붙인 사람처럼 보인다. 물론 ‘윤리 없는’이라는 표현은 다소 비약일 수 있다. 다만 그가 정치에서 의도보다 결과를 훨씬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그의 신념은 폭력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불신 역시 엿볼 수 있는데, 이런 지점은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속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사실 나는 마키아벨리의 이런 주장에 전적으로 동조하지는 않는다. 결과만을 위해 윤리를 유예하기 시작한 정치는 결국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기술로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정치가 현실을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윤리의 후퇴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윤리는 정치의 발목을 붙드는 장애물이 아니라 권력이 끝내 넘어서는 안 될 마지막 경계에 가깝다.

그럼에도 <군주론>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비도덕을 찬양하는 책이 아니라 혼란한 시대 속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라는 위험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인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그 질문 앞에서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는 듯하다.

* 이 책은 출판사 까치의 독서모임 지원으로 제공받았으며 직접 책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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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불복종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수필집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39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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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같은 사람을 보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든다. ‘위험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닮고 싶다.’ 자신의 신념을 이토록 결기 있게 밀어붙이는 사람을 실제로 만나는 일은 내게 조금은 피곤하게 느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의 신념에서 오만과 독선, 심지어는 위험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확신에 찬 어조가 얕고 부박한 치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랜 숙고 끝에 도달한 것처럼 느껴질 때면, 오히려 그를 우러러보게 된다. 나에게는 과연 목숨을 걸 만한 신념이 있었던가.

문예출판사의 『시민 불복종』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대표 수필 아홉 편을 엮은 산문집이다. 그중 앞의 두 편인 <시민 불복종>과 <존 브라운 대위를 위한 청원>은 소로의 저항 정신이 강하게 드러나는 선 굵은 글이고, 이후 이어지는 글들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월든>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을 세밀하게 관찰한 기록에 가깝다.

하지만 이 두 갈래의 글이 칼로 자르듯 명확히 나뉘는 것은 아니다. 소로에게 있어 자연을 거니는 ‘산책’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문명과 제도, 권력에 대한 저항처럼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산책은 진정한 야생의 삶과 접촉하는 통로이며, 인간이 본래의 자유를 회복하는 방식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산책>에 담긴 사유는 <시민 불복종>과 <존 브라운 대위를 위한 청원>에서 줄곧 드러나는 정부에 대한 불신과 저항의 목소리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불의에 맞서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소로는 노예제를 방관하는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길을 택한다(<시민 불복종>). 그리고 모두가 머뭇거릴 때, 홀로 행동에 나선 사람을 위해 기꺼이 변호를 자처한다(<존 브라운 대위를 위한 청원>).

내가 특히 흥미롭게 느낀 것은 소로가 가진 선(善)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는 선한 의견을 품는 것보다 자기 삶으로 그 선을 직접 증명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다수의 미온적이고 표현되지 않는 선의보다 소수의 뜨겁고 선명한 행동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믿는 사람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얼핏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역사 진보의 바퀴는 언제나 소수의 깨어 있고 용감한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 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 점에서 “절대선은 누룩이 되어 온 반죽을 부풀리기 때문이다.”(18p)라는 그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미국이 독립과 자유의 정신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왜 오랫동안 미국인들에게 사랑받아 왔는지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의 급진적이고 단호한 신념은 다소 낯설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다만 마틴 루서 킹이 말했듯, <시민 불복종>의 핵심을 ‘악에 협력하지 않는 것’에 둔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내가 대단한 선을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악에 협력하지 않을 용기를 지닌다면 세상은 아주 조금씩은 나아질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언급되는 아이히만처럼 악은 언제나 거대한 얼굴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루의 침묵과 외면 속으로도 조용히 스며든다. 어제 하루 은밀하게 숨어들어왔을지 모르는 악에게 나는 과연 협력하지는 않았는지 곰곰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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죔레는 거기에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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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얼굴을 잘 모르는 나는 <죔레는 거기에>의 겉표지에 그려진 작가의 사진을 주인공인 요제프(요지 아저씨)의 얼굴이라 상상하며 읽었다)


요제프는 분명 책의 서두에 ‘더 이상은 불을 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느덧 아흔 살을 훌쩍 넘긴 그에게 남은 여생은 분명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기운 빠진 상태로 존재했다. 그런데 어느날 한 무리가 찾아와서 그에게 '폐하'라고 부른다. 요제프는 어제까지 평범한 노년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오늘 갑자기 헝가리 왕국의 왕의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상태에서 상징적인 권력을 부여받은 요제프는 이제 그 권력에 걸맞는 일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이 웃지도 울지도 못할 한바탕의 부조리한 상황을 작가인 라슬로는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만연체로 구술에 가까운 리듬으로 밀어붙인다. 이리저리 복잡하게 이어지는 생각과 상황을 문자화하기라도 한 듯 문장은 마침표 하나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끊어져야 할 때 끊어지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은 내게 모종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안겨주었는데, 이는 내가 작품 속 세계와 인물들에게 느끼는 감각과 닮아 있었다. <죔레는 거기에>에 등장하는 요제프의 추종자들은 명약관화한 정치적 믿음을 가지고 요제프를 왕위에 앉히려고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들의 주장은 논리라고도 부르기 힘든 망상에 가깝다. 마치 꿈을 꾸듯 주저리주저리 읊어대는 몽언과 닮았다고나 할까. 이런 현실 감각의 부재를 나타내기에 라슬로의 만연체는 더없이 좋은 예술적 장치라 느껴졌다.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극우의 물결은 이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각 나라의 역사와 배경은 각기 다르지만 이런 현상은 몇 가지 공통점을 띄기도 한다. 경제적인 불확실성으로 인한 정서적 불안, 문화적인 충돌로 말미암은 정체성의 균열,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피로감 등이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극우 세력들의 해결책은 '다시 좋았던 예전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현재의 세계가 복잡다단하고 불가해하기 때문에 과거의 이해 가능하고 위계가 있었던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인데 이는 명백한 허상이다. 그들이 되돌리고 싶다고 말하는 '헝가리 왕국'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그들의 상상 속에서 편의에 의해 재구성된 '만들어진 과거'다. 마치 '더 이상 불을 떼지 않겠다'던 아흔 둘 먹은 노인네에게 왕관을 씌워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란 말이다.


자, 이쯤되면 '내란 수괴'로 정신병원에 수감 당하는 요제프 아저씨에게 우리는 분노보다 연민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그는 분명 어리석었다. 현실 감각이 부족했고 스스로의 처지를 객관화하지 못했으며 헛되고도 위험한 욕망을 품었으니 큰 댓가를 치러도 할 말이 없다. 그는 비록 악행을 주도하지도 실행하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지적했듯 '악의 평범성'의 예시라고 할 만 하다.


하지만 나는 이 어리석을 노인을 위한 변론을 해주고 싶다. 요제프는 그를 휩쓸고 지나간 정치적 혼란과는 무관하게 이미 개인적 혼란을 겪고 있는 자였다. 요제프에겐 딸과 가족이 있지만 그에게 철저히 무관심했고 그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폐하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병원 생활을 견뎌야 했다. 이런 그를 쉬이 손가락질 할 수만 있을까? 개인의 존엄이 무너진 상태에서 세계의 부조리함을 한 개인에게 전가할 수 있는가?


그런 요제프에게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의 심장을 지니고 있다'고까지 표현한 죔레와 강제로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끝까지 요제프의 곁을 지킨 죔레는 요제프라는 인간 존재의 결핍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존재다. 요제프를 둘러싼 숱한 거짓 그리고 폭력의 허상에 둘러 쌓여도 '죔레는 거기에' 있었다. 어쩌면 이 소설이 끝내 붙잡고 있는 것은 거창한 정치적 서사라기보다, 그렇게 끝까지 남아 있는 어떤 미세한 관계, 혹은 존재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끝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거대한 이야기들이 서로를 밀어내는 동안에도 끝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삶은 바로 그 ‘있음’, 즉 '죔레가 있던 그 자리'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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