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죔레는 거기에 ㅣ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평점 :

(작가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얼굴을 잘 모르는 나는 <죔레는 거기에>의 겉표지에 그려진 작가의 사진을 주인공인 요제프(요지 아저씨)의 얼굴이라 상상하며 읽었다)
요제프는 분명 책의 서두에 ‘더 이상은 불을 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느덧 아흔 살을 훌쩍 넘긴 그에게 남은 여생은 분명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기운 빠진 상태로 존재했다. 그런데 어느날 한 무리가 찾아와서 그에게 '폐하'라고 부른다. 요제프는 어제까지 평범한 노년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오늘 갑자기 헝가리 왕국의 왕의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상태에서 상징적인 권력을 부여받은 요제프는 이제 그 권력에 걸맞는 일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이 웃지도 울지도 못할 한바탕의 부조리한 상황을 작가인 라슬로는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만연체로 구술에 가까운 리듬으로 밀어붙인다. 이리저리 복잡하게 이어지는 생각과 상황을 문자화하기라도 한 듯 문장은 마침표 하나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끊어져야 할 때 끊어지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은 내게 모종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안겨주었는데, 이는 내가 작품 속 세계와 인물들에게 느끼는 감각과 닮아 있었다. <죔레는 거기에>에 등장하는 요제프의 추종자들은 명약관화한 정치적 믿음을 가지고 요제프를 왕위에 앉히려고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들의 주장은 논리라고도 부르기 힘든 망상에 가깝다. 마치 꿈을 꾸듯 주저리주저리 읊어대는 몽언과 닮았다고나 할까. 이런 현실 감각의 부재를 나타내기에 라슬로의 만연체는 더없이 좋은 예술적 장치라 느껴졌다.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극우의 물결은 이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각 나라의 역사와 배경은 각기 다르지만 이런 현상은 몇 가지 공통점을 띄기도 한다. 경제적인 불확실성으로 인한 정서적 불안, 문화적인 충돌로 말미암은 정체성의 균열,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피로감 등이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극우 세력들의 해결책은 '다시 좋았던 예전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현재의 세계가 복잡다단하고 불가해하기 때문에 과거의 이해 가능하고 위계가 있었던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인데 이는 명백한 허상이다. 그들이 되돌리고 싶다고 말하는 '헝가리 왕국'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그들의 상상 속에서 편의에 의해 재구성된 '만들어진 과거'다. 마치 '더 이상 불을 떼지 않겠다'던 아흔 둘 먹은 노인네에게 왕관을 씌워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란 말이다.
자, 이쯤되면 '내란 수괴'로 정신병원에 수감 당하는 요제프 아저씨에게 우리는 분노보다 연민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그는 분명 어리석었다. 현실 감각이 부족했고 스스로의 처지를 객관화하지 못했으며 헛되고도 위험한 욕망을 품었으니 큰 댓가를 치러도 할 말이 없다. 그는 비록 악행을 주도하지도 실행하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지적했듯 '악의 평범성'의 예시라고 할 만 하다.
하지만 나는 이 어리석을 노인을 위한 변론을 해주고 싶다. 요제프는 그를 휩쓸고 지나간 정치적 혼란과는 무관하게 이미 개인적 혼란을 겪고 있는 자였다. 요제프에겐 딸과 가족이 있지만 그에게 철저히 무관심했고 그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폐하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병원 생활을 견뎌야 했다. 이런 그를 쉬이 손가락질 할 수만 있을까? 개인의 존엄이 무너진 상태에서 세계의 부조리함을 한 개인에게 전가할 수 있는가?
그런 요제프에게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의 심장을 지니고 있다'고까지 표현한 죔레와 강제로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끝까지 요제프의 곁을 지킨 죔레는 요제프라는 인간 존재의 결핍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존재다. 요제프를 둘러싼 숱한 거짓 그리고 폭력의 허상에 둘러 쌓여도 '죔레는 거기에' 있었다. 어쩌면 이 소설이 끝내 붙잡고 있는 것은 거창한 정치적 서사라기보다, 그렇게 끝까지 남아 있는 어떤 미세한 관계, 혹은 존재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끝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거대한 이야기들이 서로를 밀어내는 동안에도 끝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삶은 바로 그 ‘있음’, 즉 '죔레가 있던 그 자리'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