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쇼의 하이쿠 기행 3 - 보이는 것 모두가 꽃이요 바쇼의 하이쿠 기행 3
마쓰오 바쇼 지음, 김정례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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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 모두 꽃이 아닌 것이 없으며, 생각하는 것 모두 달이 아닌 것이 없다.
그 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야만인과 다를 바 없다. 또한 그것을 보는 마음이 꽃이 아니라면 새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그저 그날그날의 소원 두 가지가 있을 뿐. 오늘밤 좋은 숙소를 빌릴 수 있었으면, 그리고 짚신이 발에 맞았으면 하는 것. 이 두 가지만이 아주 조그만 나의 바람이다.
여행은 그때그때에 따라 기분을 바꾸고 그날그날의 심정을 바꾸어 새롭게 한다. 만일 여행중에 조금이라도 풍아風雅를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백 개의 뼈와 아홉 개의  구멍을 지닌 나의 몸속에 무언가가 있다. 그것을 임시로 '후라보風羅坊'라 이름지어 스스로 부르고 있다. '후라'란 그 몸이 바람에 쉬이 찢어지는 얇은 옷처럼 허무하다는 뜻일 것이다.

 

바람에 찢어지기 쉬운 얇은 옷과 같은 사내,
바람에 기꺼이 찢어지고자 했던 사내 바쇼의 벚꽃놀이.
그 바람의 흔들림에 조금은 동참하고도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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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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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려가지 않나요?”
“전 여기가 더 편해요.”
“어떻게 여기가 더 편할 수 있어요?”
“설명하기 어렵군요.”
“여기 생활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제 남편은 방문 판매를 하는 영업사원이었답니다.”
“그런데요?”
“오래전 얘기지요. 그이는 항상 이것저것을 팔러 다녔어요. 그이는 변화무쌍한 삶을 좋아했지요. 또 항상 멋지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곤 했어요. (...) 하루는 그이가 군수 용품 상점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냈지요. 전쟁이 막 끝난 참이라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찾아낼 수 있었던 때였어요. 그이는 그것을 자기가 끌고 돌아다니는 고물 자동차의 배터리에 연결해서 고정시켰죠. 그러고는 저한테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로 올라가라고 말했어요. 자기가 뉴욕을 돌아다니면서 가끔씩 내가 자기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하늘로 빛을 쏴서 나를 비추겠다고 하더군요.”
“정말로 보였어요?”
“낮에는 안 보였지요. 완전히 깜깜해져야 볼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일단 빛이 보이면, 정말 놀라웠어요. 그이의 불빛만 빼고 뉴욕의 모든 불빛이 다 꺼진 것 같았죠. 그 정도로 눈에 확 띄었어요. (...) 첫날 밤이 기억나요. 여기 올라와 있는데 다들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리키며 전망을 굽어보고 있었죠. 볼만한 구경거리가 너무나 많았어요. 하지만 거꾸로 자기를 가리키는 무언가가 있는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죠. (...) 정말 여왕이 된 기분이었다니까. 불빛이 꺼지면, 그의 하루가 끝났다는 것을 알았어. 그러면 내려가서 집에서 그이를 만나곤 했지. 그이가 죽었을 때, 난 다시 여기로 왔어. 바보 같지.”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이를 찾고 있었던 건 아니야. 난 소녀가 아니거든. 하지만 대낮에 그의 불빛을 찾던 때와 똑같은 기분이 들었단다. 내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불빛이 저기 있을 것만 같았어.”
 

그러나 또 이런 문장.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인생에 왔다가 가버리냐! 다 셀 수도 없을 정도라고! 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놔야 해!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들이 떠날 땐 잡지도 말아야지!
 

그러니,
어떤 불빛이 나를 향해 있을 땐, 나를 비추고 있을 땐, 온몸으로 그 빛을 감싸안기.
하지만 그 빛이 거두어질 때는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기.
오늘 말할 수 있는 것, 말해야 하는 것들은 내일을 위해 아껴두지 않기.
더이상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더이상 오늘의 마음이 아닐 수도 있으니. 

그러고 보니, 마크 트웨인의 이런 문장.
앞으로 20년 후에 당신은 저지른 일보다는 저지르지 않은 일에 더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밧줄을 풀고 안전한 항구를 벗어나 항해를 떠나라. 돛에 무역풍을 가득 담고 탐험하고, 꿈꾸며, 발견하라.

 
자, 불빛이 저기 있다, 아직은.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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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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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 만약 그 책이 모두를 위해 쓰였다면. 난 생각했다. 이 세계의 삶이 이토록 느리고 무심하게 흘러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유없이(당연한 거잖아! 어리석은 청춘이라니!) 불안하고 막막하던 그 시절, 이 책이 마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줄 수 있을 것처럼, 소설의 첫 문장에 홀려, 처음 만났던 오르한 파묵의 소설.

좋은 책이란 우리에게 모든 세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것이야. 어쩌면 모든 책이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하고. (...) 책은 실제로 책 속에 존재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에 쓰여 있는 말을 통해 내가 그 존재감과 지속성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의 일부분이야. (...) 좋은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 일종의 무(無), 일종의 죽음을 설명하는 글이지. 그렇지만 단어들 너머에 존재하는 나라를 글과 책 밖에서 찾는 것은 헛일이야.

그러나 물론 이 책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는커녕 일부도) 바꿔주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움직인 건 또한 이런 문장들.


때로 같이 어울릴 친구를 찾지 못하고, 창문에서 볼거리도 없고, 걸어서 갈 곳도 없을 때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떠오르고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한방향을 향해 단호한 걸음을 내딛는다. (...) 나는 버스들을 탔고 버스들에서 내렸다. 수없이 많은 버스터미널을 돌아다녔다. 버스를 타고 여러 마을에서 내렸다. 며칠동안 어둠속으로 갔다. 이 젊은 여행자는 어떻게 그 자신을 알 수 없는 나라의 문턱으로 데려다줄 길에서 방황하는 것에 이토록 단호할 수 있을까, 하고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다.

인생은 사실 이렇다. 사고가 있고, 운이 있고, 사랑이 있고, 외로움이 있다. 즐거움이 있고, 슬픔이 있고, 빛과 죽음, 그리고 있을 듯 말 듯한 행복이 있다. 이러한 것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어떤 곳을 향해 가고 있다면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물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아직 그 단호한 첫걸음을 떼어놓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두 발은 땅에 닿지 못한 채 허공에서 버둥거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권의 책이 내 인생을 바꿔줄 수 있으리라 믿었던 어리석은 그 시절부터 많은 시간이 흐르는 사이 깨달은 것이--역시 이것은 스스로 깨우친 것이 아니라, 시간의 도움으로 알게 된 것일 터인데--있다면,

그것은, 때론 그저 그 시간의 흐름에 그저 몸과 마음을 맡겨둘 수만 있어도 된다는 것.
때론 시간이 자연히 우리를 어떤 곳으로 데려다주기도 한다는 것.
그러나 이때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들--그 안에 사랑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슬픔이 있고 빛과 죽음 그리고 행복이 있다는 것.

                                                                                                          1999. 8 / 20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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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
찰리 채플린 지음, 류현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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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과 근심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절망에 빠지지 않게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탈출구는 철학이나 유머에 의지하는 것이다."

찌그러진 중절모, 헐렁하고도 깡총한 바지, 커다란 구두와 지팡이, 커다란 눈과 딱 어울리는 콧수염.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 그리고 작은 키 뒤로 끝없이, 화면 밖으로까지 이어질 듯한 긴 그림자.

찰리 채플린은 언제나, 우스꽝스럽고도 쓸쓸한 뒷모습에서 시작되는 기다란 그림자로 기억되곤 했다. 빨리감기라도 한 듯, 경쾌하기 그지없는 음악 위에 덧씌워진 그 침묵과 유머와 슬픔의 힘.

"내가 스크린 위에 내 보이는 가엾은 존재, 그 겁 많고 허약한 친구는 결코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의 희생양이 되지는 않는다. 그는 결연히 고통을 초극하여 일어선다. 희망, 꿈, 갈망이 덧없이 사그라지고 나면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발길을 돌릴 뿐이다."

1000페이지가 넘는 책장을 순식간에 다 넘기고 나니, 그 우스꽝스러운 몸짓 안에 어떻게 그런 슬픔과 생의 비극들이, 또 그것들을 극복하는 힘들이 녹아들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온몸으로 겪어낸 생의 비애를 유머로 끌어안고 있는 그 힘이 새삼 놀랍다.

"채플린은 기적의 거울이다. 그의 모습은 그렇게 희극적인데도 번번이 그의 모습 속에서 희극은 휘발돼버리고 증류수처럼 간절하게 남아있는 삶의 비극만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는 기적의 거울 앞에 서서 모던 타임즈의 마지막 장면처럼 아직도 긴 그림자를 우리 앞에 드리우는 것이다."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매달릴 수 있는 것들은 물론 많겠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무엇보다 "유머"를.

20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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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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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종소리가 7시를 알렸을 때, 장밋빛 하늘에는 아주 밝은 별 하나만이 떠 있었다. 배는 처량한 작별의 고동을 울렸다. 그러자 나는 내 사랑이 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모든 사랑들로 목이 메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하지만 그 아이를 잃어버리지는 마세요. 혼자 죽는 것보다 더한 불행은 없어요. 최악의 남자라 할지라도 평생 내 곁에 있어주려 했다면, 영혼이라도 바쳤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 질투심을 불러일으킨 사악한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지금 당장 그 불쌍한 아이를 찾도록 하세요. 하지만 할아버지의 낭만주의는 버려야 한다는 거 잊지 마세요. 그녀를 깨우세요. 그리고 그녀가 흡족해할 때까지 사랑을 안겨주세요. 진심으로 말하는데,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경이를 맛보지 않고 죽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소녀가 따를 거라고 생각하오?

아, 나의 서글픈 현자 양반, 늙는 것은 괜찮지만 멍청한 소리를 하지 마세요.
그 불쌍한 아이는 당신을 미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어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잠시, 놀라운 것은 포주인 로사의 입을 빌려 마르케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아이에게 상처주지 마세요'가 아니라 '그 아이를 잃어버리지' 말라고. 아흔의 노인에게 이제 겨우 열네 살의 '그녀를 깨워 그녀가 흡족할 때까지 사랑을 안겨주'라고.


아흔 살이 되는 날, 노인은 풋풋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랑의 밤을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열네 살 소녀 델가디나와의 하룻밤. 그날 밤에서야 노인은 깨닫는다. "욕망에 쫓기거나 부끄러움에 방해받지 않거 잠든 여자의 몸을 응시하는 것이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쾌락이라는 사실을." 
열두 살에 처음으로 창녀와 사랑을 나눈 후, 쉰즈음에는 그와 관계한 여자들의 수는 오백이 넘었다. 그사이 돈을 내지 않고 여자와 관계한 적은 한번도 없다.
수많은 사랑이 그렇게 자신을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던 그 여유로운(그렇게 믿었던) 마음으로 아흔까지 살아왔다. 더 많은 사랑을 위해서 약혼녀까지도 버렸다.
그리고 아흔이 된 지금에야, 그는 고백한다.
"나는 내 사랑이 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모든 사랑들로 목이 메었다."

길지 않은 작품을 단숨에 읽어내리면서 놀란 것은, 무엇보다, 이것이 '지나간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현재의 이야기다. 긴 시간 동안 다양한 경험들을 한 한 남자의 삶에 대한 '현재'의 감정을 털어놓는 이야기다.
거장의 소품,쯤으로 생각했지만, 작품이 남긴 단상은, 그 이상이다. 실제로 1980년대 초부터 쓰기 시작해 이십 여 년만에 완성된 작품을 두고 마르케스는 말한다.
"나는 모든 개인적인 경험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아주 긴 침전의 과정을 통해서만 시적인 무게를 지니게 되지요. 시간과 기억과 노스탤지어만이 줄 수 있는 시적인 무게 말입니다."

20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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