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1999년 5월
평점 :
절판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 만약 그 책이 모두를 위해 쓰였다면. 난 생각했다. 이 세계의 삶이 이토록 느리고 무심하게 흘러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유없이(당연한 거잖아! 어리석은 청춘이라니!) 불안하고 막막하던 그 시절, 이 책이 마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줄 수 있을 것처럼, 소설의 첫 문장에 홀려, 처음 만났던 오르한 파묵의 소설.

좋은 책이란 우리에게 모든 세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것이야. 어쩌면 모든 책이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하고. (...) 책은 실제로 책 속에 존재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에 쓰여 있는 말을 통해 내가 그 존재감과 지속성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의 일부분이야. (...) 좋은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 일종의 무(無), 일종의 죽음을 설명하는 글이지. 그렇지만 단어들 너머에 존재하는 나라를 글과 책 밖에서 찾는 것은 헛일이야.

그러나 물론 이 책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는커녕 일부도) 바꿔주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움직인 건 또한 이런 문장들.


때로 같이 어울릴 친구를 찾지 못하고, 창문에서 볼거리도 없고, 걸어서 갈 곳도 없을 때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떠오르고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한방향을 향해 단호한 걸음을 내딛는다. (...) 나는 버스들을 탔고 버스들에서 내렸다. 수없이 많은 버스터미널을 돌아다녔다. 버스를 타고 여러 마을에서 내렸다. 며칠동안 어둠속으로 갔다. 이 젊은 여행자는 어떻게 그 자신을 알 수 없는 나라의 문턱으로 데려다줄 길에서 방황하는 것에 이토록 단호할 수 있을까, 하고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다.

인생은 사실 이렇다. 사고가 있고, 운이 있고, 사랑이 있고, 외로움이 있다. 즐거움이 있고, 슬픔이 있고, 빛과 죽음, 그리고 있을 듯 말 듯한 행복이 있다. 이러한 것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어떤 곳을 향해 가고 있다면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물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아직 그 단호한 첫걸음을 떼어놓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두 발은 땅에 닿지 못한 채 허공에서 버둥거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권의 책이 내 인생을 바꿔줄 수 있으리라 믿었던 어리석은 그 시절부터 많은 시간이 흐르는 사이 깨달은 것이--역시 이것은 스스로 깨우친 것이 아니라, 시간의 도움으로 알게 된 것일 터인데--있다면,

그것은, 때론 그저 그 시간의 흐름에 그저 몸과 마음을 맡겨둘 수만 있어도 된다는 것.
때론 시간이 자연히 우리를 어떤 곳으로 데려다주기도 한다는 것.
그러나 이때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들--그 안에 사랑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슬픔이 있고 빛과 죽음 그리고 행복이 있다는 것.

                                                                                                          1999. 8 / 20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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