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감벤의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은 사실 <아우슈비츠에 대한 레비의 회고 연구>라는 제목으로 붙여져야 옳다. 여하튼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분석을 따라가보자. 그러면 아감벤의 정치철학의 지향점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가 말하는 생명정치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역시 알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에서 작동했던 이슬람교도에 대해 치밀히 분석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는 삶에 대한 의지도 죽음에 대한 의지도 갖지 못한 비인간이다. 그들은 극도의 영양실조로 아사 직전에 처해 있다. 그들은 이슬람교도들이 기도를 할 때 어깨를 흔드는 모양으로, 마치 좀비처럼 걷는다. 그래서 그들은 아우슈비츠의 다른 수감자들과 분리되어 이슬람교도라는 은어로 불린다. 그들은 죽음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들은 극심한 굶주림과 학대 속에서 살아 있음 조차 느끼지 못하는 걸어다니는 시체들이다. 그들은 삶에 대한 의지도, 심지어 자살에 대한 의지조차도 갖지 못한 자들이다. 잘루스는사람은 결코 참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꼭 참아내야만 할 필요는 없으며, 또한 어째서 이런 극도의 고통에는 더 이상 조금도 인간다운 것이 없는지 꼭 보아야만 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최극단까지 간 사람, 그래서 어떤 인간도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사람, 인간으로서 불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참아낼 수 없는 것조차 참아낸 사람들, 이들을 인간으로 부를 수 없다는 말일 께다. 아우슈비츠의 수인과 이슬람교도는 그런 점에서 비인간이다.

수용소에 있던 누구라도, 익사한 자건 살아남은 자건, 참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심지어는 바라지 않았을 것까지도 혹은 참아야 하지 않아야 했던 것까지도 참았다. 극도의 인내’, 이러한 가능성의 소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인간적인 힘이 비인간적인 것에 아주 근접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성은 또한 비인간성을 견디어낸다.

그렇다면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독일인들, 유대인들을 관리하고 감독했던 그 가해자들을 이런 방식으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수인들과는 다른 방식이긴 했지만, 가해자들 역시 고통을 견뎌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들 역시 비인간이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그들 역시도 수인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감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분명히 그들 역시 모든 것을 참아냈고 참아낼 수 없는 것조차 참아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이후 전범 재판에서 거의 모두가 그랬듯이 어쩔 수없이 명령을 따랐고, ‘할 수없이 행했을 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우슈비츠에서 행했던 행위들을 온전히 경험하지 않았다. 그들의 비인간적인 경험이나 행위를 내면화하지 않았으며, 그 행위의 의미도 모른 채 기계처럼 그 일을 행했을 뿐이다. 이들은 그 당시 자기 자신이 아닌 명령을 따르는 로봇이었다고 변명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지켜냈으며, '비인간'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아감벤은 왜 아우슈비츠의 가해자들이 '인간'이었고, '이슬람교도'를 비롯한 수감자들이 '비인간'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까? 이러한 분리를 통해서 그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죽음이 일상화 되어버린 공간에서 죽음을 품는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결단을 행할 수 없는 자들, 죽음을 통해 비고유성과 비본래성을 전유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어버린 자들을 우리는 오늘날 왜 다시 사유하여야 하는 것일까? 아감벤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이 책을 썼다.

아우슈비츠 이후 우리는 시를 쓸 수 없다또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모든 문화는 그 절박한 비판을 포함해,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와 같은 아도르노의 말에 아감벤은 매우 격분한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태도는 아우슈비츠의 고유한 범죄를 특정하지 못하는 이성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더 가혹하게 말하자면 그리하여 아우슈비츠에 대한 전체적 기억을 말소하고 아우슈비츠에 관한 역사 전체를 지워버리는 술수다. 하지만 아우슈비츠는 결코 매장해버릴 수 없는 진정한 라르바’(악령)이다. 결코 매장될 수 없는,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사유함으로써 아감벤은 근대적 정치의 중요한 특징을 포착하고 있다.

아감벤은 현대 정치의 핵심을 '생명정치'라고 말한다(이에 대해서는 <호모사케르>를 참조하는 것이 좋다). 생명정치란 정치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통치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 안전만을 문제 삼는 정치다. 이러한 생명정치는 근대 이전의 정치와 분명한 차이를 갖는다. 근대의 정치는 배제의 방식 즉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다스림을 가능하게 만든다. 근대 이전에도 대량학살은 있었지만,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 두는 법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근대 이전의 정치가 '죽이거나 살게 내버려 두는 정치'라면, 근대의 생명정치는 '살거나 죽게 내버려 두는 정치'다.

근대의 생명정치의 다스리지 않음, 이것을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휴지(休止)'인데 이를 기입함으로써 통치를 가능케 한다. 휴지가 기입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근대의 생명정치의 극단에 왜 아우슈비츠가 있는지를 알게 된다. 생명정치는 인간과 인구 사이에 휴지를 만든다. '인간'이 통치의 영역이라면 '인구'는 비통치의 영역이다. 인구는 숫자로 존재하며, 인구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나치는 이러한 인구를 다시 아리아인 혈통과 비아리아인 혈통이라는 휴지를 만든다. 비통치의 영역에 비아리안 혈통을 구분하고 다시 비아리아인을 유대인과 혼혈인으로 분리하며, 다시 유대인을 유형인과 수인으로 분리하며, 다시 수인을 수인과 이슬람교도로 분리된다. ‘이슬람교도는 더 이상의 휴지가 불가능한 지점 곧 인간의 가장 극단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버려진 자들이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이다. 그들은 다스리지 않는 방식으로 다스리는 근대적 생명정치의 극단, 다스리지 않는 공백 혹은 배제의 가장 자리에 놓여 있다. 그 극단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비인간'으로 다뤄진다.

통치의 말단에 이슬람교도가 있으며 우리 역시 이러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 2001년 이후 그러한 생명정치가 노골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9.11이후 미국이 보인 그들의 태도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이겨내겠다는 미국 정부의 발언은 이러한 생명정치의 전형이다. 이 말은 결국 민주주의의 바깥에 아랍의 테러리스트들을 위치시키자는 것이다. 결국 테러리스트들을 통치의 영역에서 제외한 후 살리거나 죽게 놔둔다.” 관토모 수용소가 그 한 극단이다. 이에 더하여 국제법상 북한을 고립시키려 했던 정치 역시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윤리학이 필요하다. 더 이상 인간성, 존엄성 따위가 통용되지 않는 상태, 죽음이 일상화되는 세계에서 그들은 버려진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그와 같다면 여기에서 윤리학이 새롭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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