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은 “인류의 생존에 이르기까지 소피스트들의 시도에 맞서 어떻게 칸트적 제스처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말로 서양 철학의 현재적 위치와 지향점을 매우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Žižek,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2007: 16). 여기에서 소피스트란 해체주의자에 다름 아니며, 칸트적 제스처란 ‘물자체’에 이를 수 없으나, 세계의 모든 질료들을 통해 그것에 도달하려는 지난한 노력을 의미한다. 서양철학이 이룩해 놓은 모든 사유를 폭파시키는 해체주의적 허무와 대항하면서 물자체에 이르기 위해 끝없이 탐구하는 일, 혹은 이보다 투박하지만, “철학은 궤변론에 대항해서 진리들이 있다고 선언”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제스처일 것이다(Badiou, 󰡔조건들󰡕, 2006: 86). 즉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진리에 다가서기 위한 현재적 실천이다. 상실에 대한 상실감만을 소유하려는 우울증 환자들과 같이 이들은 내용 없는 실천, 껍데기만 남은 실천을 소유하려 한다. 이들이 다다를 곳은 결국 “부재하는 현존” 혹은 그것이 전부인 진리다(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2009: 237).  

 아감벤은 메시아적 사건은 우리 옆에 있는 것(파루시아parousia)이라고, 즉 “메시아는 이미 도래하고 있으며, 메시아적 사건은 이미 성취되어 있다.”고 말한다(Agamben, 󰡔남겨진 시간들󰡕, 2009: 121). 그러나 이 도래와 성취는 우리의 옆에 있는 것이지 이미 이뤄진 것이 아니다. 이러한 파루시아는 “그 내부에 또 하나의 시간을 포함하고 있고, 파루시아를 지연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파루시아를 파악하기 위해서 파루시아를 연장시킨다.”(같은 책: 121) 이러한 연장은 ‘지양katargeō’의 성격을 띠며, 이것은 ‘약함asteneia’을 통해서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같은 책: 174~185). 마치 나치스당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개인의 자유에 관한 헌법의 제조항을 단순히 정지시킴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메시아적 사건은 지양됨으로써 약함 속에서 실현된다(같은 책: 176). 그리하여 어떠한 요구나 대가의 의무도 초월한 과잉적인 상태, 즉 “언제나 모든 것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고 온갖 좋은 일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주권적=자기통치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같은 책: 197 ; 199). 이것에 대한 믿음이 바로 메시아즘이며, 이러한 메시아즘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바울은 실천할 수 있었고,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음을 아감벤은 말하고자 하였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 그들의 현란한 말하기가 포장해 놓은 것은 결국 실천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지난하고도 엄숙한 실천이 예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실천이 작동할 때 허무가 낄 자리는 없을 것이나 그 내용 없는 실천은 언제든 허무가 틈입할 자리를 마련되어 있다. 그들의 제스처란 그들 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그들의 제스처란 “해독제이자 일시적인 구원책”이자, “부활의 몸짓”일 것이다(Kristeva, 󰡔검은 태양󰡕, 2004: 216 ; 217). 그러나 이어지는 크리스테바의 가혹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나(네르발-인용자)는 두 번이나 지옥의 강을 승리자로 건넜다…….” 세 번째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같은 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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